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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이 장난친 도시 예루살렘 (II)
    성서와 UFO 2017. 12. 11. 22:20


    성서에는 또 이스마엘에 관한 다음의 내용이 실려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가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급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가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이 한 바탕 미치는 거리에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급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창세기 21:8-21)


        

    빈사의 하갈 모자

    여호와가 UFO에서 이와 같은 절박한 광경을 목격했을 것임은 두 말할나위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은 여호와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왔을 때(* '소돔과 고모라를 폭격한 UFO' 참조) 받은 약속에의 이행이었다. 91세로 이미 폐경이 된 사라였으나 여호와의 장담 대로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아브라함은 그때 여호와가 지시한 대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한다.(사라가 아브라함의 체세포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출산을 했음은 앞서 챕터인 '예수 승천 때 출현한 UFO의 모선', '성서 속의 UFO/야곱이 목격한 거대한 비행선' 등에서 설명된 바 있다)


    그렇지만 이삭의 탄생은 당연히 이스마엘의 질시를 불러왔을 터, 결국 위와 같은 사단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은 그 어미 하갈과 함께 사막으로 내쫓기는데, 이때 여호와는 그들 모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이스마엘을 바란 광야에서 자라게 도와준다. 이렇듯 하나님의 비호 속에 자란 이스마엘이 훗날 이슬람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제기한 문제지만, 여호와는 향후 두 민족의 양립(兩立), 즉 이삭의 후예와 이스마엘의 후예가 큰 반목으로 대립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애써 비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호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 듯, 성서는 그 아들들과 당대의 영역까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사라의 여종 애급인(人)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일백삽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급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창세기 25:12-18)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모두가 궁금해 하면서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그것..... 하지만 성서에는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그랄 시절에 겪은 ‘잔인한 불신’의 기록으로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그 기록을 근거로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양립, 즉 이슬람과 기독교의 양립을 설명하고자 하는 바, 그것은 다름아닌 여호와가 번제물로 이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요구한 일이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燔祭)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후손들이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이에 아브라함이 그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창세기 22:1-19)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말리는 그림인데, 그 거추장스런 날개는 여전하다.



    여호와가 번제물로써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을 요구한 황당무계한 사건에의 기록...... 또 한편으로는 몹시 무섭기도 한 이 잔인한 기록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아브라함에 대한 여호와의 불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없어 아브라함을 불신케 만든 원인을 찾을 수는 없으나, 여호와가 무언가에 무척 화가 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그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만드는 만행을 자행하는데,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 마을의 동요를 막기 위함인지 그를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으로 유인한다. 브엘세바로부터 2박 3일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다. 


    이때 여호와가 아브라함을 유인한 산은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훗날 솔로몬과 헤롯왕이 건립한 성전이 있어 일명 성전산으로 불리기도 한 그곳이었다. 브엘세바로부터 모리아 산까지는 약 84km로, 아마도 여호와는 비행선의 빛과 같은 것으로써 아브라함을 이끌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일을 정작으로 실행한 사람은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사자였던 바, 여호와는 이 일에 그리 중요함을 느낀 것 같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 여호와는 아브라함이 제 자식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것이라고까지는 믿지 않았던 듯하니, 어쩌면 이 같은 시험은 그를 버리기 위한 핑계 같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아브라함은 제 아들 이삭을 구워 바치려 칼을 빼어들었기에 외계인이든 신이든 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했던 말, 즉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라는 말로도 증명되는데, 그 말인즉 지금까지는 너 아브라함을 믿지 않았다는 말과도 상통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다음의 마지막 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후손들이 네 적들의 땅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라는 말을 전하는 바, 또 이 말을 풀어 보면, 네가 이번에 아들을 번제물로 올리지 않았다면 복도 땅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혹자는 여호와께서 진심으로 이삭을 번제물로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다만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한 행위였을 뿐 이삭을 번제물로 받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딴은 그렇게 생각되기도 한다. 아이를 잡아먹는 물귀신이나 요괴와 같은 존재라면 또 모를까, 자애로운 하나님께서 이삭이 통구이가 되는 결과를 원했을 리 없었을 터, 그러한 결과는 어떻게든 막았을 것이라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 메치고 저리 둘러쳐 봐도 여기서 이삭이 번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 여호와가 막는 방법은 이미 번제물이 된 후의 일이니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호와는 산 자를 제물로 받은 경우도 없지 아니하니, 사사기(판관기)에 나오는 길르앗의 큰 용사 입다(Jephthah)는 여호와와의 약속을 따라 자신의 무남독녀를 눈물의 번제물로 삼은 적도 있었다.(사사기 11:3-40)


    과연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비인륜적 명령을 이행한 덕으로 복을 받고 후손도 번창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부러워 베꼈는지 아니면 그와 같은 일이 또 있었는지 그 또한 알 수 없으나, 이슬람의 꾸란에서는 이때 번제물로 바쳐진 사람은 이삭이 아닌 맏아들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아브라함 행위의 잘잘못이나 번제물의 주인공이 아니라, 여호와가 왜 그런 비인륜적인 행위를 아브라함에게 시켰는가 하는 그 이유이다.


    그것은 물론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아브라함이 탈락했을 경우, 소위 여호와의 복이라 하는 것은 곧장 하갈 모자에게 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자 또한 멀리하지는 않았으니 언제라도 전방이 무너질 경우, 후방의 군을 전방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예비군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이번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 분수령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양립 배경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 삼으려 누인 자리가 지금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슬람 사원인 '바위 돔 사원' 내에 있다. 이슬람에서는 그 바위를 '무함마드 승천 바위' 부른다. 무함마드가 하늘을 부름을 받아 승천한 사건, 이슬람에서는 이 일을 미라지(Miraji)라 부르며 신성시하는데, 당시 그가 딛은 바위 또한 신성시 여김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꾸란에는 죽어 부활한 예수와 달리 무함마드가 살아생전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서 승천했다고 기록돼 있다.(AD 632년)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안내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부라끄(Buraaq; 번갯불)라고 하는 날개 달린 흰 말을 타고서.(이 내용은 꾸란 70장에 실려 있는데, 당연히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취급되고 있는 바, 전승(傳承)의 의미의 '쿠라파(Kurafa) 앞에 정관사인 알리프나 람을 생략하였다. 신화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1540년에 그려진 미라지 

     

     

    '바위 돔 사원' 안의 무함마드 승천 바위

    무슬림은 예루살렘을 꾸드스(Quds)라고 부른다. 무함마드가 승천한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내려 본 무함마드 승천 바위

    길이 약 18m, 너비 약 13m, 높이 1.25~2m의 화강암 바위이다. 

     

    '바위 돔 사원' 전경

    691년 사라센 제국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무함마드의 승천을 기려 만든 건축물이다. 

     

    '바위 돔 사원'과 통곡의 벽



    또 꾸란은 AD 621년에 있었던 무함마드가 밤에 메카의 하람 사원에서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Al-Aqsa;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로 이동해 하나님들의 표적들을 일부 목격한 일 또한 성스럽게 여기고 있는데(꾸란 이스라 17장 1절), 이는 마치 BC 597년 에스겔이 한밤중에 바빌로니아의 니푸르에서 예루살렘으로 UFO를 타고 이동한 사건을 연상케 해준다.(* '성서 속의 UFO/여호와라 불린 외계인의 대규모 학살극' 참조) 지금 성전산에 있는 또다른 이슬람 사원 '알 아크사'는 이 일을 기려 AD 705년 세워진 건물이다. 

     

     

    무함마드의 예루살렘 행을 묘사한 그림

     

     

     

    예루살렘 성전산의 '알 아크사 사원' 전경



    이상을 보면 기독교의 신 여호와나 이슬람의 신 알라는 동일 인물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은 바, 앞서 말한대로 그 기독교와 이슬람 그 양자간의 싸움은 동일 신을 모신 자들 끼리의 적장자 싸움이요 선명성 싸움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완전히 꼬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싸움을 끊을 수가 없는데, 나는 이 싸움을 신이 부추킨 장난 같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무함마드를 예수가 승천한 그 '멀리 떨어진 곳'까지 불러 승천을 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 예루살렘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두 세력간의 싸움 역시 신의 장난에 놀아나는 우리 미약한 인간들의 아귀다툼에 더도 덜도 아닌 일이다. 예루살렘 올드 시티의 면적은 고작 0.9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 협소한 장소에서 벌어진 신의 장난이 5억 1천만 평방 킬로미터에 사는 지구인들을 갈라놓고 싸우게 만들고 있는 것인데, 우리 대한민국의 입장은 이삭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우리나라는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국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조차 승인하지 않고 있다)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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