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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을지로에서 태어난 이순신 장군 & 같은 동네 살던 류성룡 대감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3. 23. 22:45

     
    흔히들 이순신 장군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충청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아산 현충사 및 그곳에서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한 무덤 때문이리라. 보통 타지에서 생활하다 죽더라도 고향 선영에 장사지내는 것이 통례이기에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 이후를 잠시 좇아가면, 1598년 유해는 노량 바다에서 남해군 관음포로 옮겨져 잠시 안치되었다가 강진 묘당도 월송대로 이장돼 80일 간 모셨졌다. 이후 1599년 2월11일 충남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 지내졌다가 전사 16년 뒤인 1614년(광해군 6) 왕으로부터 선무공신의 칭호를 받고 좌의정으로 추증된 후 현재의 아산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아산 현충사와 9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 유해가 왜 이곳에 묻혔는지를 설명해주는 자료는 의외로 희박하다. 추적해본 결과로는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먼저 아내 상주 방씨가 묻혔고 이후 아내의 무덤에 합장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이순신은 외가가 있는 곳에 유택이 마련된 셈이다.  
     
    현충사는 1706년(숙종 32년)에 아산 지방의 유생들이 충무공 이순신을 기려 아산에 사당을 짓고 이듬해 숙종 임금으로부터 '현충(顯忠)'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현충사(顯忠祠)' 글씨는 숙종이 직접 쓴 것이다. 하지만 현충사 역시 한말 서슬퍼렀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비껴가지 못했으니 1865년 전국 1천여 개의 서원이 철폐될 때 함께 정리되고 말았다.
     
    이후로도 수난이 그치지 않았으니 일제강점기에는 충무공의 13대 종손 이종옥이 가난에 쫓겨 자신의 고택과 충무공 묘소가 포함된 임야, 그리고 권리가 보존되던 현충사 부지를 경매에 내놓았다. 그러자 1931년 5월 동아일보가 이 사실을 알리며 모금 활동을 벌었는데, 전국 2만 여명의 독지가로부터 총 16,021원의 성금이 답지했다. 동아일보사 주관  충무공 유적보존회 측은 빚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다시 현충사를 짓고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 봉안식을 거행했다.(이때 숙종의 친필 현판이 다시 걸렸다)  
     
    현재의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에 진행된 성역화 작업의 결과로서 몇 차례의 중수와 확장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박근혜가 탄핵되며 현충사 본전에 위기가 찾아왔다. 대표적으로는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내리라는 일각의 요구가 있었다. 이미 광화문 현판을 비롯한 여러 곳의 박정희 글씨가 사라졌음에도 아산 현충사는 워낙에 박정희의 공이 지대한지라 버티고 있었는데 여기도 바람이 불어온 것이었다.
     
    심의에 들어간 문화재청은 2018년 2월 21일 '박정희 친필 현판'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본래의 숙종 친필 현판은 1932년 중건된 구(舊) 본전에 그대로 걸려 있으며, 1967년 신축된 본전은 박정희의 작품임에 분명한 까닭에 현판 철거는 오히려 역사성과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취지의 설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겨우 위기를 벗어난 현판이 지금도 현충사에 위태로이 걸려 있다.
     
     

    문화재청의 현충사 안내문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사무소의 충무공 묘소 안내문
    아산 충무교육원 산기슭에 현충사 유허비가 방치된 채 전한다.
    이 비는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지역 유림이 건립한 것으로 현충사에 관한 가장 오랜 흔적이다. / 아산 충무교육원 제공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 이정(이순신의 父)의 집 에서 태어났다. 도로명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이다. 하지만 워낙에 아산 현충사의 이미지가 굳은 탓인지 유명 등산잡지에는 이순신 사당이 있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가 장군이 소년시절 전쟁놀이를 하며 살던 곳이라 소개돼 있다. 그리고 마을 앞으로 광덕산 장군바위가 묘하게 마주한다고 설명했는데, 아래 십경도(이순신의 생애에 관한 10가지 그림)에서 보이는 산은 광덕산이 아니라 경복궁 뒤쪽의 백악산이다.
     
     

    이순신 장군 십경도 중의 '소년 시절' / 현충사 충무공기념관

     
    그는 이곳에서 서애(西厓) 류성룡과 전쟁놀이를 하며 함께 자랐다. 1542년 경상도 의성 사촌리에서 태어난 류성룡은 어릴 적 아버지의 부임으로 한양으로 올라와 낙선방에 살았다. 건천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류성룡은 이때 이순신과 처음 만났는데, 나이는 류성룡이 3살 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순신의 꼬붕 노릇을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워낙 이순신의 인품이 강조되어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점잖은 사람으로써 인식하게 되지만 사료가 전하는 내용은 사뭇 다르다. 물론 어릴 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순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남의 구속받기를 싫어 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전쟁놀이를 할 때면 그는 늘 진(陣)을 구축하는 남다른 면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항상 그를 대장으로 떠받들었다.
     
    순신은 진을 칠 때 어른들이 방해가 되면 비록 어른이라 할지라도 활에 화살을 먹여 쏘는 시늉을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피해갔다.  
     
    한번은 이순신이 여름철에 참외밭을 지나다가 참외가 먹고 싶어서 한 개를 달라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조랑말을 타고와 밭을 밟아 뭉개버렸다. 이후 밭주인은 그가 지나가면 달라지 않아도 참외를 주었다. 
     
    위의 두 건은 류성룡의 회상이고, 아래의 참외밭 건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선조충무공행장>의 내용인데, 이쯤되면 동네주폭 수준이다. 하지만 장성해서는 달라진 듯하니 류성룡은 <징비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며 수행을 하여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도 같았다. 아울러 담대한 기운이 있어 국난(國難)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잊고 목숨을 바쳤던 바, 이는 평소에 수행하여 축적된 성품이다. 
     
     

    을지로3가 명보 아트홀 앞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석
    퇴계로3가 SK주유소 앞 류성룡 집터 표석
    류성룡 집터 부근 서애로에서 본 남산


    이와 같은 이순신이었지만 등과는 늦었으니 29세 때인 1573년(선조 6) 무과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낙마(落馬)해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 왼쪽 다리가 부러졌으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부러진 다리를 싸매고 나머지 시험을 치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하는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로 초인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다. 경험으로 보자면 다리뼈에 금만 가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튼 그러했으니 합격할  리는 없었다. 
     
     

    이순신 장군 십경도 중의 '청년 시절' / 낙마 후 버드나무 껍질로 다리를 싸매고 다시 말을 타려 하고 있다.
    이순신이 시험을 본 을지로6가 훈련원터

     
    3년 후인 1576년(선조 9) 2월, 그는 식년시 무과에 드디어 급제해 훈련원 봉사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권관(權管/ 종9품)으로 부임했다. 반면 류성룡은 출세가 빨랐으니 20살 무렵 안동에 있는 퇴계의 사숙(私塾)에 들어가 이황의 제자가 되었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하늘이 내린 사람'(天之所出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입격은 당연했을 터, 1564년(명종 19) 소과인 사마시에 합격했고 1566년 문과에 급제한 후 탄탄대로를 내달았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애 류성룡의 공(功)과 과(過)이다. 과를 먼저 얘기하자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한 점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전쟁 전, 동래의 왜인들이 조만간 히데요시가 쳐들어 올 것이라며 하도 떠드는 바람에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일본의 사정을 정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사와 부사의 보고 내용이 달랐으니,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한 것이 반드시 침범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마치 쥐새끼처럼 생긴 것이 두려워할 인물이 못 되며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는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황윤길은 왜군의 침입을 강력히 예고하며 방비가 있어야 한다고 거듭해 강조했다. 하지만 김성일은 매번 정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당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A당이 이쪽으로 가자 하면 B당은 의당 저쪽으로 가야 옳다고 주장하는 요즘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형국이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류성룡은 당연히 같은 당(동인)이었던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했다. 같은 당 사람의 의견을 두둔해 국무총리 이상의 자리에 있는 자가 국방을 게을 리 한 일, 이것은 정말로 큰 잘못이라 아닐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뒤가 께름직했는지 전라도 정읍 현감(종6품)이던 이순신을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무려 7계급을 뛰어넘는 파격 승진이었다. 이와 같은 파격 승진은 당대에도 드문 것이어서 사간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류성룡은 갖은 편법을 써가며 기어코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앉혔다. 이와 같은 정실 인사는 물론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류성룡의 정실 인사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니, 이상은 류성룡의 가장 큰 공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직전 완성된 거북선 / 거북선은 이순신이 창안한 함선이 아니라 본래 있던 수군의 귀선(龜船)을 조금 개량한 것이다. 하지만 전란을 대비한 이순신의 유비무환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

     
    그밖에도 류성룡의 공은 많으니, 압록강 너머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선조의 도강을 막은 일, 면천법을 만들어 왜군의 목을 따오면 천민에서 벗어나는 제도를 만든 일,(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누구든 천민이라면 어차피 희망 없는 삶에 찾아온 인생 역전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왜란 후 <징비록>을 써 후대에 계고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공은 역시 이순신의 발탁이다.  
     
     

    서애로 길가의 류성룡의 최후 유시(遺詩)
    종로1가 종각 건너편의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표석
    류성룡 집 부근의 남부학당 터 표석 / 사부학당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중,동,서,남부에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으로, 사학(四學)이라고도 하였다. 남부학당은 낙선방 옆 성명방에 있었는데, 기록에는 없지만 이순신과 류성룡이 동문수학한 곳일는지도 모른다.
    필동 서애길 쉼터 / 남부학당이 있던 까닭인지 이곳 선명방에서는 문필가가 많이 배출되었고, 이후 붓필(筆) 자 필동이 되었다.
    세종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상 / 2022년 설치한 '명량분수' 사이의 거북선이 정말로 명량바다로 나아가는 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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