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한강 신사동 나루를 배 타고 건너던 시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 22:28

     

    새말나루는 조선시대 한강 사평리(沙坪里)에 있던 나루터였다. 새말과 사평리는 생소한 지명이겠지만 강남구 신사동은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다. 강남구 신사동은 새말의 새(新) 자와 사평리의 사(沙) 자가 합쳐져 생긴 동명(洞名)으로, 1962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다가 1963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1975년 분구(分區)가 이루어지며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사평리는 문자 그대로 '모래밭 마을'로, 고려시대에는 사평도(沙坪渡)라 불리었다. 아울러 나룻가에 사평원(沙坪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같은 구전에 의지하자면 마을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된 듯하다. 잠원 한강공원에 세워진 표석에 따르면, 사평리는 조선시대에도 한남동 한강나루터와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어 상업이 성행했으며, 말죽거리 판교를 지나 남부 지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곳이다.
     

     

    새말나루터 표석 / 1994년 12월 강남구청에서 세웠다.

     

    그런데 사평리의 위치는 문헌마다 차이가 있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지명사전>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지적이 없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평리가 한강진의 대안(對岸)이라 한 옛 기록과 한강진이 현재의 한남대교 위쪽에 위치하는 점을 들어 한남대교 남단을 사평나루로 추정하고 있다. 현지를 답사해 보면 이 말이 거의 정확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새말나루와 사평나루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현지를 가보면 두 나루는 같은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즉 위 표석이 놓인 새말카페의 아래가 새말나루이자 사평나루로서, 현 행정구역으로는 강남구 압구정동 386-1이다.  

     

     

    잠원한강공원 내 새말카페와 새말나루터 표석
    표석에서 직선 거리에 위치한 한남대교 / 과거 제3한강교로 불리기도 했던 한강의 얼굴마담격 다리다.
    강 건너로 보이는 한국의 몽셀미셀 / 한남동 재개발이 확정되어 한국의 몽셀미셀은 이제 곧 볼 수 없는 풍경이 될 것 같다.

     

    강 건너 한남동 순천향대학병원 부근의 '한강진 나루터'에도 "건너편 사평나루를 잇던 나루터"라고 되어 있는 바, 그곳으로부터 최단거리인 한남대교 남단을 사평나루로 짐작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까닭에 옛날에는 이곳에 나룻가 마을이 존재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곳 마을은 1925년 을축대홍수로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다시 마을이 형성되었고, 70년대 들어 강남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말 사평나루 위치 / '서울 &' 자료
    송파 근린공원의 을축 대홍수 기념비 / 1925년 전국적으로 7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가옥 6000여 채를 유실시킨 '을축 대홍수'는 특히 한강 중류 지역에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 이 일대는 상전벽해를 이루어 강남에서도 최고의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그 시절에 관한 얘기들을 흔히 입에 올리지만 (그때 땅을 좀 사뒀어야 했다는 말과 함께) 속을 들여다보면 이곳 주민들도 애환이 있었다.  

     

    우선 교통이 불편했다. 1968년 <경향신문>의 기사에 의지하면, 이 일대에 살며 매일 강을 건너야 하는 학생과 직장인 등은 1000 명이 넘었으니 잠원·반포·신사동의 적어도 1000 명의 주민들이 서울(강북)로 갈 때면 잠원나루를 이용해야 했다. 만일 나룻배를 타지 못하면 그야말로 10리 길을 걸어 동작동까지 가 한강대교를 건너는 유일한 노선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그것이 무려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는데, 잠원나루의 뱃삯은 60년대까지는 20원이었다가 70년대 들어 버스 요금과 같은 30원으로 올랐다. 배를 타려는 사람은 흡사 한국전쟁 때 사용된 것 같은 오래된 철제 탄약통에 아래의 10원짜리 지폐를 넣거나 50원 혹은 100원짜리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야 했다. (최고 고액권인 500원 지폐도 있었으나 그걸 내는 사람은 드물었으리라) 배는 사람과 화물뿐 아니라 가축, 자전거, 손수레, 용달차, 분뇨 트럭까지 운반했는데, 차량은 100원을 받았다.  
     
    장마철 한강이 불어나면 이용할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이에 잠원·반포·신사동에서 출퇴근이나 통학을 해야 했던 사람들은 물이 빠져 나루가 정상화될 때까지 약 한 달간 직장과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던 바, 기말시험을 보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대체 시험이 치러기도 했다. 겨울에는 아예 나루가 폐쇄되었고 해동이 되면 다시 개장했다. 그동안은 언 한강을 걸어 건너야 했는데 해빙기에는 가끔 익사사고 소식도 들려왔다. 물론 거룻배 전복 사고도 심심찮게 있었다. 
     
     

    이 정도는 예사이고,
    승합차도 가볍게 운송한다.
    60년대 10원 지폐 / 1966년까지 쓰였고 이후 동전이 발행됨.
    60년대의 50원 지폐 / 1969년까지 쓰였고 이후 탑골공원 팔각정이 들어간 지폐로 바뀜. (발행량이 많지 않았던 듯 당대 화폐 중 가장 고가에 거래된다고 함)
    60년대 100원 지폐 / 1965년까지 쓰였고 이후 세종대왕이 들어간 지폐로 바뀜.
    60년대 500원 지폐 / 1962년 화폐개혁 이후 나와 1966년까지 쓰였고 이후 새로운 남대문 도안으로 바뀌었다.

     

    잠원 한강공원 새말나루터 표석 옆에는 최근 '서울수복 작전지 국군 17연대 도하지'라는 안내문이 세워졌다. 안내문에는 「새말나루터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1950년 9월 25일 미 제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서울 수복을 위해 서빙고 방면으로 한강을 도하했던 곳이다. 당시 서울의 서쪽 방향에서 미 해병사단의 서울진입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남쪽으로부터 북한군을 포위하는 작전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강 도하 후 남산을 점령하고, 남산의 동남·동북쪽으로 잔출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새말나루터는 서울수복 작전 완수하는 데 중요한 돌파구를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라고 쓰여 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1950년 9월25일 국군 제17연대와 미 보병 제7사단 32연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행주 한강도하에 성공한 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사리 나루에서 서빙고 방면으로 한강을 건너 남산으로 진격, 서울을 수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행주나루를 도하해 북쪽에서 내려 온  한국 해병대는 북한군이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삼은 연세대학교 부근 연희동 104고지에서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3일 낮밤에 걸친 결전을 벌였는데, 결국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고 104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서울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새말나루터 서울수복 작전지 국군 17연대 도하지' 푯말
    새말나루터 도하지에서 보이는 남산
    행주산성 부근의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연세대 인근 주택가에 세워진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