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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원나루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뽕나무와 가장 비싼 아파트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3. 22:35

     
    앞서 말한 새말·사평나루 근방에는 잠원나루가 있었다. 잠원한강공원 신사나들목 입구에 위치한 '잠원 나루터' 표석을 보면 잠원나루는 「한남대교 북단 한강진(漢江鎭)에서 말죽거리 원지동을 거쳐 삼남지방(충청·영남·호남)으로 이어진 교통 중심지였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주변의 이수나루와 더불어 작은 나루였다는 것이 이곳 토박이들의 증언이다. 다만 이 작은 나루가 왕실과는 관계가 깊었으니 역대 임금이 헌인릉, 선정릉 행차 시 도강(渡江)하였고, 문정왕후와 같이 불심 깊은 사람은 봉은사 왕래 시 이 나루를 이용했다. 
     
     

    잠원나루터 표석
    잠원나루터에서 본 한강

     

    또한 이곳은 왕실용 비단을 생산하는 뽕나무를 키우던 곳이기도 하였으니 인근 100만 평에 이르는 평원이 모두 뽕밭이었다. 성현(1439~1504)의 <용제총화>에는 구 잠실(현 송파구 잠실동)에 이어 지금의 잠원동 일대에 신 잠실이 조성됐음을 밝히고 있는데, 잠원(蠶院)이라는 명칭도 누에잠(蠶) 자에 이곳에 새로 설치된 역원의 원(院) 자를 따 붙여진 것이다.
     
    지금은 잠원동 55-11번지 한신 16차 등 아파트 120동 앞의 세 그루 뽕나무만이 그 시절을 힘겹게 증언하고 있지만, 그나마 조선시대의 나무가 고사해 1982년에 옮겨 심은 후계목이다. 서울시는 1973년 원래 뽕나무의 역사성을 인정해 '서울시 기념물 1호'로 지정했는데, 지금은 세 그루의 후계목이 그 영예를 계승한 셈이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
     
     

    잠원동 뽕나무 / 앞 철제받침 있는 나무가 최후의 고사목이다.
    1972년 대한잠사회가 촬영한 잠원동 마지막 뽕나무 / 이미 고사한 것 같다.
    표석과 잠원동 뽕나무
    표석
    잠원역과 신사역에서 1km 이상 떨어진 잠원한강공원 어귀까지 와야 만날 수 있다.

     
    명색이 '서울시 기념물 1호'임에도 이 뽕나무는 주소를 알고 오기 전에는 찾기가 쉽지 않다. 또 찾아가도 표석이 '잠실리 뽕나무'로 되어 있어 잠시 당황스럽다. 1963년 이전에는 이곳이 경기도 시흥군 잠실리였던 까닭에 '잠실리 뽕나무'라고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표석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조선왕실에서는 비단을 얻는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를 매우 귀하게 여겨 잠실과 잠원에 각각 뽕밭을 조성했던 바, 구별이 필요할 듯한 데도 말이다.
     
    <세종실록> 등에서는 궁궐 안에도 뽕나무를 많이 심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지만,(경복궁 3590그루, 창덕궁 1천여 그루) 지금은 그곳도 귀해 각각 몇 그루씩만 남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 뽕나무

     
    다시 잠원 뽕나루에 대해 말하자면, 표석 옆에는 또 '서초 문화탐방 제5호 잠실리 뽕나무'라고 쓰여 있는데, 1~4호는 어디 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리고 표석의 뒷면에는, 이 뽕나루로부터 위쪽으로 640미터를 가면 잠원나루터가 나오고 아래쪽으로 1,010미터를 가면 주흥동이라는 이정표가 표시돼 있다. 잠원나루는 알겠으나 주흥동은 생소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주흥동은 지금의 서초구 반포동으로, 1925년 을축대홍수 때 잠실리 '간데마을' 사람들이 수해를 입자 시흥 부호였던 김주용(金周容) 이 이곳에 가옥 20동을 지어 수재민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당시 전나무골이라 불리던 이곳은 이후 김주용의 주(周) 자와 부근 흥동소학교의 흥(興) 자를 따서 주흥동이 되었다. (지금 동명은 사라졌지만 잠원IC 근방 고가도로에서 '주흥교고가'라는 교명주 동판을 볼 수 있다)
     
     

    표석 옆면
    표석 뒷면

     
    선생의 흔적은 잠원동 신반포 27차아파트 351동 부근 주흥공원 안에 있는 '고 김주용선생 기념비(故 金周容先生 記念碑)'로써 더듬을 수 있지만, 각박한 세태 때문인지 요즘은 선생과 같은 인물을 만날 수 없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가 아파트단지를 보유한 이곳에서도.....  반포동에 위치한 '반포 아크로 리버파크'는 올해 청담동에 있는 '더펜트하우스 청담'을 제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되었고, 그 뒤를 잠원동 '아크로 리버뷰 신반포'가 좇고 있다.  
     
     

    1972년 5월 신사동과 반포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의 사진 / 이때 이곳은 단독주택은 지을 수 없고 무조건 아파트만을 지어야 했다.
    최고의 한강뷰를 자랑하는 반포 아크로리버파크 아파트

     

    흥미로운 것은 반포 단지가 재개발되기 전에는 '내시 아파트'로 불렸다는 점이다. 지금은 출산률이 급감해 걱정이 태산인 지경이 되었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기르자'를 세뇌시킬 정도였고 나아가서는 둘도 많다는 분위기였다. 세계적으로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경제학자 맬서스의 잘못된 인구 증가 위험론이 지배했다.

     

     

    1955년 제1회 간이총인구조사 때 만들어진 기념재떨이 /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인구증가에 떨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제기획원은 1976년 11월,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동안 연평균 인구 증가율을 1.6%로 제한하겠다는 강력한 산아(産兒) 제한 드라이브 정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정부는 효과적인 정책을 위해 아파트 청약 제도에 우대 조항을 만들었던 바, 아파트 청약 1순위 경쟁에 있어 영구 불임시술자를 절대 1순위로 지정했다. 여담으로, 정관수술을 받으면 예비군 훈련도 1년간 면제되었다.
     
    이 정책은 즉각 효과를 보았으니 예나 지금이나 '내 집 마련'이 지상 최고 과제였던 서민들은 영구 불임시술자가 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여성보다는 수술이 간단한 남자들이 주로 병원에 갔는데, 76년말 8만여 명에 불과하던 영구 불임시술자가 77년 8월말 1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77년 9월 반포 주공아파트 청약 때 큰 빛을 발했다. 여담으로, 청약 희망자 중에서는 우대 조항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불임시술을 받은 뒤 증명서를 떼와 청약을 신청한 경우도 있었고, 무정자증이나 무난자증의 청약희망자는 국립병원의 확인증을 받아와야 한다는 규정이 급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를 보도한 1977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 / "아파트 분양에 불임인파". '시술자끼리 경쟁'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1979년 구 반포 전경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반포 주공1단지 아파트

     

    그 밖에도 불임수술에 관련돼 웃고 우는 사연이 속출하였고, 영구 불임시술자의 아파트 청약통장은 20만 원가량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었다. 아울러 미망인과 폐경기 주부의 항의도 이어졌는데, 아무튼 정책은 만땅의 효과를 보았으니 1970년에 100만명을 넘던 출생아수는 80년에는 86만명, 90년에는 64만명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불임시술자에 대한 아파트 우선 분양 정책은 1990년 중반 폐지되었다)
     
    이후 반포 주공아파트는 '내시 아파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었다. 그리고 그 같은 웃지 못할 사연은 2006년 재현되었으니, 이번에는 "3명 이상의 자녀를 둔 무주택 세대주에게 건설량의 3%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해 특별 공급할 수 있다"는 임시 법령이 시행됐다. 인구절벽이 눈앞에 다가오자 아파트 청약의 우선 조건으로 전과는 정반대의 정책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무렵, 시대는 다시 변하여  '내시 아파트'는 국내 최고가 아파트로 용트림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한 신사동 잠원나루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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