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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성지의 비변십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26. 00:03
     

    앞서 1892년 일본공사로 부임했던 오이시 마사미의 지적을 언급한 바 있다.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이미 망한 나라이다. 그저 다른 나라가 아직 이 땅을 집어삼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조선은 이른바 국가를 조직하는 뼈대가 모두 무너져내려 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은 강대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국경에 방위할 군사를 단 1명도 배치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안에 군함이나 군항이 전혀 없을 정도로 국방력이 허약하니 아프리카 토인보다 못한 세계 최악의 지경이다. 아울러 관리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로 정부의 재정은 매우 궁핍하고 경제전반은 침체되었으며 근대식 교육마저 미비해 앞으로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 이러한 국가 위기를 인지하고 극복해 갈 인재마저 보이지 않는 바, 한국은 이미 망한 나라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已, 1855~1935) / 열강의 동양 침탈에 있어 태평양의 발칸반도인 한국을 점령하는 나라는 동양의 패권을 쥘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나라를 중국 일본 러시아가 노렸다. 그리고 일본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당사국인 조선과는 단 한 번 싸우지 않고서도 말이다. 그래서 당시 조선통감부 외사국장이던 고마쓰 미도리는 "한국 병합은 군인 한 명 움직임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낸 쾌거"라고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아마도 세계에서 이렇듯 허무하게 망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만일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이 전쟁을 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를 말하기 이전에 두 나라의 군인 수를 비교해 보는 편이 빠를 것 같다. 대한제국군대가 가장 많은 병력을 거느렸을 때가 1904년으로, 서울에 시위대라 불리는 1만 명의 중앙군이 있었고 진위대라 불리는 지방군(평양·전주 주둔)이 1만8천 명 있었다. 합계 2만8천 명이 이른바 전성기의 대한제국 군인의 수였다. 그 무렵의 일본군은 1백3만 명, 전쟁은 해보나 마나 한 일이었다. 

     

    그것을 보면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일에 벌어진 대한제국군과 일본군과의 반나절의 교전은 비록 패했으나 전투 다운 전투가 벌어진 싸움이라 부르만 하다. 그날 아침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소령)의 자결로 촉발로 전투는 정오 무렵에 이르러 장교 13명을 비롯한 68명 사망, 100여 명 부상, 포로 516명이라는 결과를 냈다. 우리나라 정규군이 일본군과 싸운 마지막 전투였다. (☞ '대한제국 최후의 날 II - 남대문 전투')

     

     

    남대문 대한상공회의소 앞의 대한제국군 서울시가 전투지 푯말
    부영사옥 앞의 정미의병 발원터 표석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대
    전쟁기념관에 재현된 세검정 총융청의 대한제국군

     

    잠시 남대문 전투를 주목한 것은 그래도 대한제국이 총 한 발 쏘지 않고 무너지지는 않았음을 강변하기 위함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대한제국의 허망한 최후를 보자면 국초(國初)의 양성지(梁誠之, 1415〜1482)라는 관료의 뛰어난 능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양성지는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무려 330통의 상소문을 올려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중 국방과 외교 분야에 제시한 지침은 다음과 같다. 

     

    국초인 1449년 동아시아에서는 '토목의 변'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있었다. 명나라 영종이 몽골의 일족인 오이라트부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패하며 명군(明軍) 수십만이 죽고 영종이 포로가 된 사건으로서 중국 역사상 황제가 전장(戰場)에서 붙잡힌 유일한 예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이웃나라인 조선을 긴장시키기 충분했는데, 이때 양성지는 당황하는 세종에게 '비변십책'(備邊十策)이라는 국방력 강화 방안을 올렸다.

     

    '비변십책'은 '변방을 강화하는 10가지 방책'이라는 뜻으로, 그 요지는 의외로 자존심 외교, 배짱 외교로 귀결된다. 즉, 만일 몽골군이 조선에 쳐들어온다 해도 처음부터 비사후폐(卑辭厚弊, 몸을 낮추어 예물을 많이 바침)로써 평화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려가 요·금과의 전쟁에서도 죽어라 싸워 먼저 승리를 구한 후 평화를 도모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오이라트의 침입에도 무조건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고 우선은 결사 항전을 한 후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쉽게 말하자면, 돈이나 굴종으로 얻은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양성지는 이것을 명과의 관계에서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실천에 옮겼으니 1481년 명나라가 동북 변방 진지를 요양(현 요녕시)에서 압록강과 가까운 봉황성(현 요녕성 봉성진)으로 이전하려 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결국 관철시켰다. 즉 봉황성 북쪽 책문까지 유지되던 완충지대가 없어지는 것은 미구에 국경분쟁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계하며, 두 나라는 현재처럼 비무장지대를 두어 국경을 마주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비록 지금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므로 만약의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그 일환으로써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활을 구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우리나라의 고구려 이래로 전래되는 맥궁(貊弓)은 천하가 알아주는 명기(名機)이므로 조선 활의 국외 유출 자체가 군사기밀 유출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례로 신라의 노(弩)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이 당나라에 노 만드는 기술을 알려주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는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천보노를 만든 사찬(沙飡: 신라 8번째 관등) 벼슬의 구진천(仇珍川)을 당나라로 데리고 와 천보노(千步弩: 1000보 떨어진 적을 쏠 수 있는 쇠뇌)를 제작하게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자신들의 패배를 쇠뇌의 열세 때문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구진천은 이러저러한 구실로 제작을 회피해 신라 국가기술이 끝까지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게 만들었다. 

     

     

    대형 쇠뇌의 일종인 녹로노 / 전쟁기념관

     

    국방에 있어서는 화전(和戰) 양면 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양성지의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15만 명의 상비군이 선결되어야 하며,(양성지는 양반도 징집 대상에 포함시키는 법안을 책정했다) 이들을 지휘할 장교와 하사관 선발, 군량미의 비축, 성과 보루의 축조, 신무기의 제조 등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일환으로써 1445년(세종 27년) 설립된 화약무기를 쓰는 총통부대를 강화시켰다.

     

    * '총통위'(銃筒衛)라 불리던 총통부대는 총 4000명으로 이루어진 특수부대로서 5조로 편성되어 800명이 넉 달마다 돌아가며 근무하였으며, 아래와 같은 대·중·소 승자총통을 주(主)화기로 사용했다. 총통위는 당시 명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은 첨단 군대로서, 1445년의 총통위 설립은 최초로 화약무기가 사용된 전투라고 하는, 그래서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이 된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전투보다 10년 가까이 앞선 일이었다. 

     

     

    총통 / 전쟁기념관

     

    양성지는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 등 같은 지도를 제작함은 물론  <팔도지리지>와 <연변방수도(沿邊防戌圖)> 같은 각종 지리서의 제작에도 직접 참여하였으며 조선조의 지역방어 개념인 진관(鎭管) 체제를 최초로 구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은 국방력을 바탕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세폐(歲幣)를 줄였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선물을 너무 많이 주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신감은 개국초에 반짝했다 사라진 천제(天祭)를 부활시켰던 바, 세조 때에는 다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는 <예기(禮記)/왕제(王制)>의 범례를 깨고 조선이 더이상의 번국(藩國)이 아님을 천명한 셈이었다. 즉, 그는 명나라를 천자국이 아닌 이웃한 강대국으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양성지가 이룩한 새로운 전통은 성종을 지나 연산군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중종조(1506~1544)에 이르러 양성지가 확립한 전통이 깨지고 말았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천제를 폐하고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중국에 의지해 확립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즉 그는 중국에 의지해 스스로에게 없는 힘을 얻으려 하였으니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사신에 대한 오배삼고두지례(五拜三叩頭之禮: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식)를 자청해서 행했다.  

     

    1537년 3월 5일의 일로서, 이후 모든 왕들은 중종이 만든 이 새로운 격식을 따라야 했는데,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는 청나라의 예법인 삼궤구고두지례(三跪九叩頭之禮: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으로, 1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3번 머리를 숙임으로써 총 9번에 이르게 된다)로 바뀌었다. 이것은 1886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고종의 삼궤구고두지례는 비록 모화관 앞 장막 안에서 행해졌다고는 하지만 그 자리에 외국공사들도 있었다는 데서 부끄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쉬쉬해온 이 사실을 드러냄은 대한민국 일각의 자존감 잃은 한 정치인이 다시 그때로 회귀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기에 그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내뱉게 된 일이다.

     

    다시 양성지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명나라 사신의 접대에 있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거나 자존심이 상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으며, 이에 조공 물품도 줄이고 번잡한 예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언젠가 명이 조선 땅에 욕심을 내면 전쟁을 벌일 수도 있으므로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서울 초동 18번지 '양성지가 살던 곳' 표석
    양성지는 위의 외교·국방 뿐 아니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수많은 서적의 편찬사업을 벌이기도 한 열정적인 인물이다. 양성지가 살던 곳 부근에 형성된 이른바 을지로 인쇄골목은 그의 자취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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