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의 부군당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4. 4. 25. 06:48
용산 원주민으로 짐작되는 연세든 사람에게 부군당(府君堂)의 위치를 물어보면 모두가 잘 알고 있을뿐더러, 더러는 어느 부군당을 찾느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용산에는 그만큼 부군당이 많다는 뜻이니 대충 짚어봐도 이태원, 동빙고동, 서빙고동, 한남동 등에 있다. 용산구 용문동 고개에 있는 남이장군 사당이나 보광동 오산중·고등학교 부근의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도 부군당에 속한다.
까닭에 용산에만 유독 부군당이 많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것은 서울의 다른 곳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신당(神堂)이라 더욱 그러한데, 2008년 용산문화원에서 펴낸 <용산의 역사문화 여행>이라는 책에는 각 부군당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에 관한 설명은 따로 없다. 하긴 용산문화원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 없을 터, 사실 부근당이라는 단어의 유래나 뜻마저 불분명한 마당인지라.... 또 부군당(府君堂)은 문헌에 따라 부군당(附君堂) · 부근당(付根堂) · 부강당(富降堂) 등으로도 나타나 표기마저 일정치 않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부군당에 대해 "관부에 수호신을 모신 작은 숲을 두고 그 사당에 지전(紙錢, 종이돈)을 걸어 부군이라 일컫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을 보면 그 역사가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올라간다. 앞서도 설명했듯 조선왕릉 소전대(燒錢臺)는 고려시대 유행하던 지전인 저화(楮貨)를 태우며 망자의 극락왕생을 빌던 데이다. 까닭에 소전대는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릉)과 정릉(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 릉)과 헌릉(태종 이방원의 릉)에만 존재한다. 조선시대 초기 이후로는 저화가 통용되지 않으며 소전대도 따라 사라진 것이다.
소견을 말하자면, 부군당은 앞서 '경강(京江)의 광진·뚝섬·서강나루'에서 언급한 광나루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처럼 한강을 오가던 뱃사람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 위치로써 짐작이 가는 바, 용산의 동빙고동, 서빙고동, 청암동, 한남동은 물론이요, 송파 신천동이나 영등포 당산동의 부군당이 모두 한강과 근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보광동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도 실은 물과 관계가 있다. 김유신의 사당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 부근의 한강물이 얕아 이곳을 통해 한강을 건너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 이곳 주민들에게 잘 대해 주었기에 주민들이 그를 부군당 주신으로 모셨다는 전설에 기초한 것이다. 입구 삼문에는 용화문(龍華門), 사당 본전에는 명화전(明和殿)이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명화전에는 김유신뿐만 아니라 기타 14명의 잡신도 모셔져 있다. (사당 건립에 공이 있는 듯, 용화문 앞에는 작고한 국회의원 서정화의 공적비가 세워졌다)
유감스럽게도 한남동 569-85와 568-88에 있다는 한남동 부군당과 한남 제2부군당을 모두 찾지 못하고,(GPS에는 분명 그렇게 찍혔으나 주소지 근방의 주민들도 부군당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대신 입을 모아 강원한의원 쪽에 부근당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폐허가 된 '한국의 몽셀미셀'의 잔해만을 담아 왔다. 내가 '한국의 몽셀미셀', 혹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이 한남동 산동네는 나의 어릴 적 추억이 진하게 담겨 있는 있는 곳이나 재개발이 확정되며 이제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졌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교동·재동·미동초등학교 (2) 2024.04.29 한영수의 명동과 임인식의 가회동 (2) 2024.04.29 윤치왕과 윤치창이 살았던 가회동 집 (2) 2024.04.23 반계 윤웅렬과 그 아들 윤치호가 살던 집 (5) 2024.04.22 이완용 생가 터와 별장 터 (3) 2024.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