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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강(京江)의 광진·뚝섬·서강나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9. 5. 22:19

     
    한강의 정의는 지금과 조선시대가 달랐다. 지금의 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양평 두물머리에서 합류해 서울시를 경유,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는 514km의 강줄기를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한강은 옥수동 두모포와 한강진(漢江津) 주변의 강, 즉 지금의 동호대교와 한남대교 일대를 흐르는 강줄기에 국한된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는 불렀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경강상인은 한강을 타고 경기·충청을 오가며 상행위를 하던 사람들을 말하는데, 굳이 경강의 경계를 짓자면 한성부의 시작과 끝인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였다. 그 사이에 있는 한강, 용산강, 서강이 이른바 '경강의 삼강(三江)’이었다.
     
    광나루는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 강원도의 임산물이 강의 상류로부터, 삼남지방의 미곡이 하류로부터 거슬러 도달했던 곳으로 경강 나루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곳이다. 지금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은 나말여초에, 쉽게 말해 후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한강을 오가던 뱃사람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석조 보살입상이다. 
     
     

    아차산로 변의 광나루 표석
    상부암 석보살입상
    3미터에 가까운 대불이다.
    상부암 오르는 길
    과거엔 '너븐나루'로 불렸다고 쓰여 있는 광나루 터 표석

     
    원래 이 석조여래입상은 지금 자리의 아래 쪽, 오가는 배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강변에 위치했었다. 하지만 그 일대가 금싸라기 땅으로 개발되며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2000년대 초만 해도 상부암의 석축이 왜식 축대로 이루어져 볼썽사나웠으나 지금은 우리나라 축성법으로 깨끗하게 단장되었다. 
     
    아래 겸재정선이 그린 '광진'(廣津)은 옛 광나루를 그린 그림으로 지금의 강동구 위치에서 강건너 풍경을 묘사했다. 보이는 산은 아차산이고 중턱의 집들이 몰려 있는 자리에는 지금은 쉐라톤 워커힐호텔이 자리한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상부암 석보살입상의 본래 위치쯤이 될 것 같다. 
     
     

    겸재 정선의 광나루 그림

     
    하지만 과거의 은성했던 광나루는 한강의 퇴적물이 쌓이며 조선 중기 이후로는 집하 나루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운선들을 비롯해 서해에서 올라오는 배들은 조류에 의지해 경강 상류까지 쉽게 이동하였으나 퇴적물들로 인해 점차 조류가 올라오는 지점이 하류 쪽으로 후퇴하며 조선중기에는 뚝섬나루, 후기에는 서강나루가 집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뚝섬은 뚝도(~島)라고도 불린다. 용례가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한자로는 독도(纛島)로 표기했다. 그러나 뚝섬은 섬이 아니고 그저 삐쭉 나온 모래사장이다. 그것이 마치 섬처럼 보였던 듯한데, 그 삐쭉 나온 곳마저도 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하며 사라져 지금은 옛 자취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뚝섬은 너른 백사장으로서 꽤 유명했던 곳으로 광나루 해수욕장과 함께 뚝섬 해수욕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강수욕장이 되겠다. 

    그 강수욕장은 진작에 사라졌지만 뚝섬나루는 나루로써의 역할을 근래까지 수행했다. 그것이 정확히는 1973년 11월 7일까지로, 그 이튿날 영동대교의 준공식이 있었다. 준공 전까지는 아래와 같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다녔는데, 뚝섬나루에서 강건너 봉은사 쪽으로 왕래하는 하루 이용자가 500명이 넘었고, 그 이용자를 위한 배들이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서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바빴던 듯하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과 강남구 청담동을 연결하는 영동대교
    다리 교각 바로 아래 뚝섬나루 터 표석이 설치됐다. 표석은 후미진 곳에 있어 찾기가 힘들지만 위치는 꽤 정확하다.

     
    나룻배는 너비 5m, 길이 12m의 목선(木船)으로 오늘날의 버스보다 많은 사람을 실었고, 가축, 자전거, 자동차, 분뇨 트럭까지 운반했다. 발동선을 본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삿대로 강바닥을 밀어 운행했다. 한강이 생각보다 낮았던 셈인데, 지금은 준설로 강바닥이 깊어져 삿대를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물론 쓸 일도 없겠지만) 아래 첫째 사진에서는 긴 삿대를 들고 있는 사공을 볼 수 있다. 이들 사공들은 한강이 결빙되는 겨울에는 쉬었다가 해동이 되면 다시 일터로 나왔다. 
     
    나룻배의 이용객들은 강 건너 삼성리, 청담리, 대치리 등에서 인분으로 채소 농사를 지어  동대문 시장에 내다팔던 사람들이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나룻배를 이용하는 이유는 뚝섬에서 동대문까지 가는 궤도차(기동차)가 있었기 때문인데, 1932년 (주)경성궤도가 동대문∼뚝섬선, 동대문∼광나루선을 만들어 운행했던 열차이다. 늘 만원이던 이 궤도 열차는 1968년도 쯤이라는 것 외에 언제 사라졌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어제 본 것 같던 배추 농사 짓던 그 강 건너 밭들이 지금은 온통 아파트며, 빌딩 숲이다. 
     
     

    1960년대 한강의 나룻배 / 정원 초과로 사고가 잦았다.
    1963년 문화영화 <나룻배> 속의 삿대 젓는 사공
    성동교를 넘는 기동차 / 오른쪽으로 한양대학교가 보인다.
    성수동 SK테그노 빌딩 옆의 성수동 기동차길
    성수동 기동차길 안내문
    기동차길 주변으로 즐비했던 중소 공업사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 있다. 몇 개 남지 않은 공업사마저 모두 문이 닫혔다.
    1955년 임인식 작가가 촬영한 인산인해의 뚝섬 기동차 정거장
    1955년 임인식 작가가 촬영한 뚝섬해수욕장
    1974년 임정의 작가가 찍은 뚝섬유원지
    한영수 작가가 찍은 뚝섬유원지 / 1956-1963

     
    조선 후기에는 마포나루와 서강나루가 은성했다. 다만 서강나루는 나루터라기보다는 세곡선의 종착점인 선착장이자 경강상인들의 거점으로 쓰였다. 18세기 후반 삼남에서 서울로 운송된 세곡이 1년에 30만여 석이었는데, 그밖에 경상(경강상인)이 들여오는 40만여 석의 쌀과 사대부들이 개인적으로 거두어들인 20만 석의 쌀도 바로 이곳 서강나루에 집하되었다. 
     
    까닭에 서강나루는 조선 최고의 쌀 집하장이 되었던 바, 주변에는 조운선이 싣고 온 공미(貢米)를 점검하는 점검청(點檢廳), 그 공미를 저장하는 광흥창(廣興倉), 서강나루로 들어온 선박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는 공세청(貢稅廳) 등의 관청이 있었으며, 경상들이 머물거나 운영하는 객주(客主, 여관)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한강공원 상수나들목 앞의 서강나루터 표석
    서강대교에서 본 양화대교
    양화대교
    서강나루에서 본 여의도
    관리의 봉록미를 관장하던 광흥창 터 표석

     
    ▼ 기타 경강나루에서 본 것들

    휴관 리모델링 중인 뚝섬유원지 '자벌레 서울생각마루'
    청담대교
    선상 레스토랑 아리랑 하우스
    대한불교조계종 방생도량 / "뜻은 좋으나 방생하지 말아주세요. 육식성 외래어종이 유입돼 생태계를 교란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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