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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과 당태종 죽음의 공통점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1. 6. 10. 07:09
서귀포 시 정방폭포 가는 길에 서복공원과 서복전시관이라는 곳이 있다. 몇 해 전 유배생활(?)을 할 당시, 처음에는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또 별로 들어가고픈 생각도 안 들어 구경을 회피했는데, 우연찮게 들어가 보니 풍광이 장난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색과 중국인 관광객이 넘쳐났다. 까닭에 당연히 중국 관광객을 상대로 조영한 건물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알아보니 5공정부에 부역했던 이세기 의원이 문체부 장관시절, 중국에 짜웅하러 낸 아이디어에 기인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그때가 한중수교 무렵으로 그는 이후 한중친선협회 회장도 지냈다)
당시는 제주도 개발 붐이 불기 한참 전이었던지라 땅값도 싸고 장소도 널널했다. 그래서 서복전시관은 서귀포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게 되었지만, 설립 후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제주도민의 세금을 축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중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니 나름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까? 설명이 늦었지만, 서복전시관은 중국 진나라 때의 서복(徐福, 서불, 서씨라고도 함)이라는 사람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왔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과연 그것이 전시관을 지어 기념할만한 일인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으니 사마천의 <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2년 후인 기원전 219년, 그는 전국을 둘러보는 공무 순시 길에 올랐는데 낭야(琅琊, 지금의 산둥성 칭다오시 인근)에 이르렀을 때 서복이라는 방사(方士, 천문, 의학, 점복 등을 연구하는 학자)가 나타나 아뢰었다.
"바다 가운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 불리는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신선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童南東女)를 거느리고 불로장생약을 구하러 가게 해주십시오."진시황은 원래 워커홀릭 증세가 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통일 후에는 전국의 일을 모두 상관해야 했으니 일이 일곱 배가 늘었다.(7국의 전국시대를 통일시켰으므로) 그는 세인들의 생각처럼 천하통일 후 아방궁에서 만날 놀고먹은 것이 아니었으니(앞서도 말했지만 초호화 아방궁은 실재하지도 않았다) 하루에 처리해야 할 결재 서류가 120근이나 될 만큼 격무에 시달렸다.*
* 당시 도량형의 1근은 약 250g인데 죽간 하나의 무게가 평균 1kg이라고 하니 그는 하루 최소 30건의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처리해야 했던 셈이다. 요즘 그만한 일을 하는 국가원수나 CEO가 있을까? 그밖에도 할 일이 태산 같았을 것이다.
* 도량형의 말 자체도 진시황에 의해 만들어졌다. 도(度)는 길이, 량(量)은 부피, 형(衡)은 무게를 말한다. 당시 7국의 자(尺)의 길이는 거의 비슷했으나 됫박 크기와 저울추 무게는 각각 달랐던 바, 진시황은 통일과 더불어 이를 시정할 표준 도량형을 제정해 발표했다.
그는 이래저래 늘 피곤할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따라서 꼭 불로장생의 약이 아니더라도 여러 강장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까닭에 진시황의 승낙을 쉽게 얻어낸 서복은 남녀 아동 각 3천여 명과 식량 등을 꾸려 동쪽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영주산(한라산)이 있는 제주도라는 것이고,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복이 다시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에서 비롯됐다는 설(說)도 생겨났다.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썰이다. 서복이 중국으로 귀국했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돌아갔다는 소리조차 없는 마당에 서귀포라니....? 그리고 서복이 다녀갔다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는 정방폭포 옆 암벽에 새겨진 이른바 '서불과지'라는 글자도 사실은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썰일 뿐이니, 우선은 글자체가 당대 중국의 글씨 소전(小篆)체가 아닌 정체불명의 문자로서 전혀 해석이 닿지 않는다.
진시황은 순수길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로서도 이른 죽음이었다. 원인은 필시 격무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한 심신쇠약일 터인데, 최근에는 수은 중독이라는 설도 등장했다. 수은을 강장제로 여겨 즐겨 마신 탓에 그 독성에 중독되어 일찍 갔다는 것이다. 진위를 떠나 이 말은 꽤 일리가 있다. 과거에 수은은 그렇게도 쓰였기 때문이다. 비단 수은이 아니더라도 진시황은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것은 죄 복용했을 터이고, 검증의 과정이 없었던 그 건강보조식품(?)들은 필시 간에 무리를 주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히려 죽음이 앞당겨졌을 것이다.
당태종도 격무에 시달렸다. 당나라에 앞서 건국된 수나라는 300년 동안의 분열시대를 마감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루었으나 불과 36년 만에 망했던 바, 산적한 통일 후의 과제들을 당나라가 안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또한 아버지 이연을 밀어나고 제위(帝位)에 오른 만큼 회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인재들을 등용해 태평성대를 지향했는데, 이것은 훗날 '정관(貞觀)의 치(治)'로 일컬어지며 모범 정치의 표상이 된다.('정관'은 당대의 연호이다)
우리로서는 고구려를 침입한 원흉이지만 중국 역사에의 당태종은 한무제, 청나라 강희제와 더불어 역사상의 3대 명군 정도로 자리매김하는데, 고구려 원정에는 실패했지만 돌궐을 정벌해 텡그리카간(天可汗, 왕 중의 왕)에 오르고 서쪽으로도 진출해 당나라의 영토를 기존의 2배 이상 확장시킨다. 그리고 저 유명한 조·용·조의 수취제도를 마련해 국민들의 세금을 경감시키면서도 국고(國庫)는 늘렸으며, 그 바탕 아래서 문화는 창달하였던 바, 어쩌면 삼황오제 이래의 최고 정치가인지도 모른다.
그는 격무에 더해 장기간의 고구려 원정에서 얻은 이질과 종기로 고생을 했다. 이에 잦은 설사로 기력이 쇠해진 그는 원정에서 돌아온 이듬해 아들 이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요양에 들어가나, 649년(정관 23년) 5월 인도 출신 방사(方士)가 만든 불로장생의 약을 먹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당 51세로 진시황보다는 두 해를 더 살았다.
이때 인도 출신의 방사가 한 말은 "이 약을 먹으면 200살까지 너끈히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달을 넘지 못했으니 모르긴 해도 그 인도 방사도 향후 2개월 이상은 살지 못했을 것 같다. 이른바 불로장생을 표방하는 약들은 비방(秘方)이라 하여 알려주지 않으니 당태종이 무엇을 먹고 죽은 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정상적인 식품이나 약은 아닐 것인즉, 앞서 '드라큘라 백작과 동로마제국 최후의 날'에서도 말했지만 화약도 본래는 불로장생의 약이었다.*
*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성 공격에 사용됐던 화약은 발명과 연구의 산물이 아니라 중국 도가(道家)의 불로장생술에서 비롯되었다. 위진시대의 이른바 도인들은 불로장생의 단약(丹藥)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들은 연금술사에 비견돼 연단술사로 불렸다. 이들 연단술사들은 여러 재료를 배합하는 과정에서 초석(질산칼륨)과 유황과 숯을 배합하면 엄청난 폭발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따로 화약(火藥)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북송시대에 이르러 군용으로 쓰이게 되었고, 이후 아라비아를 거쳐 오스만제국에 이르러서는 대포에 실려 발사되는 강력한 군사 무기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지금도 유황가루를 먹는 미련한 사람이 있고, 몸에 좋다는 속설에 검증되지 않은 동식물을 먹는 사람 또한 흔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별 효력이 없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하니, 면역력 강화와 항암 효과가 있다는, 귀하기도 무지무지하게 귀한 자연산 ○○버섯을 장복하던 주위의 어떤 분은 간암에 걸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버섯의 어떤 성분이 오랜 시간 간에 부담을 주었다는 것이 간암의 진단을 내린 의사의 말이었다. 내가 하고싶은 얘기는 여기까지다.* 당태종은 유언으로 "내가 생전에 탔던 말들은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말들이니 그 모습을 새겨 무덤 좌우에 두도록 하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따라 무덤 곁에는 그의 애마 6마리가 새겨지나 훗날 모두 뜯겨지고 그중 2개는 밀반출된다. 밀반출된 2개 중의 하나가 위의 '삽로자 석각'이다. 부조 속의 삽로자라는 이름의 말은 군벌 왕세충을 정벌하러 갈 때 탄 말인데 소릉육준(昭陵六骏)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이 새겨져 있다. 왕세충과의 낙양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이세민을 구했던 구행공(丘行恭)이라는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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