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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유명한 환관들(I) ㅡ 문고리 권력의 최후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1. 9. 27. 06:08
환관(宦官)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마도 십상시(十常侍) 일 것이다. 중국 후한 말, 황제 영제(靈帝)를 황음에 빠뜨리고 정치권력을 독점한 그 열 명의 내시들은 각종 부정과 매관매직으로 나라를 망가뜨렸던 바, 결국 저 유명한 <삼국지>의 서막을 장식하게 된다. 즉 그들의 전횡이 황건적의 난이라는 농민 반란을 불러오고, 동탁, 여포, 원소, 조조, 그리고 손견(손권의 아버지)과 유비 삼형제를 차례로 역사의 무대 위로 불러올리는 까닭이다. 십상시는 동탁에 의해 소탕된다.
그에 앞서 진나라를 망가뜨린 조고(趙高)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지록위마(指鹿爲馬)로 유명한 바로 그 자이다. 진시황이 죽은 뒤 맏아들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황위(皇位)에 올린 환관 조고는 어느 날 황제 앞에 사슴 한 마리를 끌고와 말했다. "제가 폐하를 위해 좋은 말 한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호해가 어처구니 없어 물었다. "아니, 그게 어찌 말이란 말이요? 사슴 아니오?" 그러자 조고가 신하들을 향해 물었다. "이게 사슴이오? 말이오?" 조고 앞에 숨죽이던 신하들은 거의가 말이라고 했지만, 개중에는 사슴이라고 솔직히 답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후 그 사람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다시는 조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하가 없었다. 물론 조고의 최후도 좋지 않았다.
시대를 확 뛰어넘어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기라성(綺羅星·glittering stars) 같은 환관들이 출현한다. 영락제의 명을 받아 대선단을 이끌고 항해에 나선 환관 정화(鄭和)는 베트남, 자바, 보르네오, 수마트라, 인도, 나아가 아라비아와 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중국의 존재를 과시했다. 정화의 7차례 원정(1405~1433년)이 끝난 후 중국은 30개 나라로부터 새로이 조공을 받았다. 정화의 원정은 유럽 제국의 대항해시대에 50년을 앞선 일이었으나 영락제 이후로는 원정이 끊겼다.
정화 이후로 출현한 환관들은 나쁜 쪽으로 기라성 같은 자들이었다. 정덕제(무종) 때의 유근(劉瑾)은 무종에 앞서 3명의 황제를 모신 베테랑 환관이었다. 무종이 즉위했을 때는 10살이었고 유근은 55살이었던 바, 노회한 유근이 어린 황제를 농락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태감(환관의 우두머리) 유근은 황제를 쾌락에 탐닉하게 만든 후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을 포함해 8호(虎)라 불리던 7명의 환관들과 함께 국정을 농단하였으니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돈으로 감투를 산 자들이 본전 이상을 뽑으려 듦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에 과중한 세금에 짓눌린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지만 유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나머지 환관들과 공모해 역모를 기도했다. 자신이 황제가 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발각나 붙잡히고 마는데, 그때의 재산이 국고(局庫)를 능가하였던 바, 그를 중국 역사상의 최고 갑부로 평가한 현대의 경제자료도 본 적이 있다.
유근은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당했다. 여기서 능지란 '천천히 오르는 구릉'이란 뜻으로 죄인이 최대한 고통을 받으며 천천히 죽게 만드는 형벌을 말한다.(능지처참은 살점을 조금씩 벗겨내 죽이는데 보통 2박3일로 진행되었다) 일설에는 유근에게 가해진 칼질이 모두 4,780여 회였으며 이틀째 되던 날 죽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토막 나고 내장도 꺼내져 거리에 던져졌는데, 그에게서 가족을 잃은 백성들이 달려들어 시신을 씹어 삼켰고 그중 어떤 남자의 입에는 유근의 성기가 물려있었다고 한다.(※ 능지처참형은 청나라 광서제 4년인 1905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명나라 정통제(영종) 13년인 1448년, 몽골고원을 통일한 오이라트 부족이 대규모 조공팀을 파견해 조공무역을 청하였다. 당시 태감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왕진(王振)은 무역을 허락하긴 했으되 오이라트가 제시한 말 값을 5분의 1로 후려쳤고 이에 분노한 오이라트 부족은 명나라 변방을 공격했다. 그러자 왕진은 황제 영종을 부추겨 52만의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했고, 23살의 황제를 앞장 세워 원정에 나섰다. 1449년 9월, 52만 명의 명나라 대군은 북경 외곽의 거용관(居庸關)을 나서 몽골고원을 향해 북진했다.
하지만 대군에 겁을 먹었는지 몽골군은 꼭꼭 숨어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고, 파죽지세로 오이라트 부족을 쓸어버리려던 왕진도 지치고 황제도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몽골인은 유목민이라 특별한 치도(治都)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동·서를 헤매던 명군(明軍)은 결국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뜻밖에도 울주(蔚州)와 자형관(紫刑關)을 택해 회군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울주는 왕진의 고향이었던 바, 이 기회에 고향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싶었던 왕진의 욕망 때문이었다.
그렇게 군대는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다시 중간에 진로가 변경되었다. 가을철 수확을 앞둔 너른 벌을 본 왕진이 혹시라도 고향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어 인망을 잃을까 염려됐던 것이었다. 이에 군대는 다시 북으로 향했고, 이쯤에서 모두의 안위가 걱정된 병부상서(국방장관) 광야(鄺埜)가 나서 간언했다. "회군길이 너무 길어 다들 지친 상태입니다. 자형관으로 가지 않으려거든 폐하를 먼저 거용관으로 호송시키고 저희는 천천히 뒤따라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진은 그 또한 반대했다. 황제가 옆에 없으면 자칫 허수아비가 될까 염려한 까닭이니 결국은 52만 명이 다시 강행군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명군으로서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오이라트 부족은 꼭꼭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일부가 그들의 뒤를 따르며 정탐을 하고 있었던 바, 언제 공격이 개시될지 모르는 마당이었다.
상대가 지켰음을 안 몽골군은 그들이 회래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후방 보급로를 끊고 전 부족을 몰아 공격을 개시했다. 당황한 명군은 마구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그때도 빨리 회래현 성으로 피신하자는 장수들의 말을 들었으면 괜찮았을 것을, 왕진은 토목보(土木堡) 성채에서 원군을 기다리자 고집했고 결국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명군이 패한 것은 무엇보다 토목보 성채에 물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 기근에 시달리던 명군은 성 밖으로 나왔다가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에 수십만이 죽었고, 도망가던 왕진은 부하 장수 번충(樊忠)에게 피살당했다. 이어 분전하던 병부상서 광야마저 몽골군에 목숨을 잃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영종은 그저 초원에 쭈그려 앉아 있다 포로가 되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토목(보)의 변'으로 중국 역사상 황제가 전장(戰場)에서 붙잡힌 유일한 예로 남아 있다. (※ 예전 한고조 유방도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평성 백등산에 포위된 적 있으나 뇌물을 주고 벗어나 포로는 되지 않았다)
붙잡힌 영종은 어찌 되었을까? 오이라트 부는 당연히 그를 협상의 빅 카드로 내밀었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미 영종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새 임금(경태제)으로 옹립하였던 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가 돌아오면 임금이 두 사람이 되는 셈이니 차라리 안 돌아왔으면 하였고, 오히려 새로이 편성된 22만 대군을 북정(北征)시켰다. 이에 오이라트는 쓸모없게 된 영종을 1450년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었고, 돌아온 영종은 폐위되었다가 친위세력들의 쿠데타로써 1457년 천순제라는 이름으로 복위한다.
왕진도 어김없이 탐욕스러웠으니 그 실정의 죄를 물어 가산을 적몰했을 때 60여 개의 창고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고 역사상 최고 부호로 일컬어지는 동진(東晉) 석숭의 보고(寶庫)를 능가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같은 명나라 환관 열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 왕직, 위충현 같은 인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다음 2편에서 청나라 환관 안덕해, 이연영과 함께 다뤄보도록 하겠다.
* '역사의 유명 환관들(II) ㅡ 청와대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을 겸한 환관'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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