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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족 멸문지화를 당한 혹리(酷吏) 왕온서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1. 2. 18. 02:43

     

    혹리(酷吏)란 가혹한 관리를 이른다. 이에 반대되는 말은 순리(循吏)인데, 사마천은 사기열전을 쓰며 <순리열전>과 <혹리열전>을 두었다. 여기서의 '순' 자는 순할 순(順) 자, 혹은 순수할 순(純), 순박할 순(淳) 자 등을 쓰지 않고 순환한 순(循) 자를 쓰는 바, 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무난한 정치를 하는 관리를 이름이다.(※ 물론 뜻풀이 가운데는 착하다는 의미도 있기는 하지만) 반면 혹리에 대해서는 다른 의미는 없으니 그저 가혹한 다스림을 보인 관리를 이를 뿐이다. 그 <혹리열전>에 나오는 왕온서(王溫舒, ? -BC 104)라는 관리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왕온서는 전한(前漢) 중기의 관료로 양릉현(陽陵縣)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사람을 죽여 암매장하는 등 간악한 짓을 저질렀으나 후한 시대의 서서(徐庶, 삼국지 인물)도 젊었을 때 악인을 징벌하고 도망자 신세였던 적이 있었으므로 왕온서의 행위가 반드시 악행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러다 하급 지방관의 천거를 받아 공무원이 되었는데, 비교적 순탄히 진급하여 정위(廷尉, 형벌과 법률을 관장하는 관직)의 사(史, 8계급 중 4번 째)까지 올랐고 장탕(張湯)을 섬기다 다시 승진하여 어사(御史)가 되었다. 

     

    왕온서는 오늘날 검경(검찰과 경찰)의 일을 하면서 도적을 잡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일이 많았지만 나름대로의 성과를 인정받아 광평(廣平)의 도위(都尉, 경찰서장)가 되었다. 그는 군내(郡內)의 용감하고 과감한 인물 10여 명을 특채하여 관리로 쓰며 자신의 비선(秘線)조직으로 활용했다.(왕온서는 사전에 그들을 은밀히 내사하여 중죄가 있는 자라도 용서해주고 관리로 내정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도둑도 잡게 했는데, 그들이 지명수배된 중범죄자를 체포했을 시에는 체포 과정에서 가혹행위나 불법행위가 있었다 해도 모두 눈감아 주었다. 그들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을 것임은 굳이 신발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양릉( )과 광평( )의 위치  

     

     

    하지만 그들 중 도둑 잡기를 꺼려하거나 게을리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만으로 사형에 처하고 과거의 일까지를 모두 끄집어내 일족까지 죽였다. 이에 과거 제나라나 조나라 지방의 도둑들은 광평 근방에 오려고도 하지 않았고, 광평군에서는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자가 없었다. 소문을 들은 무제(武帝)는 왕온서를 하내(河內) 태수로 영전시켰다. 왕온서는 영전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하내 지방 호족들을 내사해 평판 나쁜 자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9월, 하내 태수로 부임하자마자 개인 소유의 말 50필을 징발해 각 역참마다 배치시키고, 광평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선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자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던 바, 호족뿐 아니라 그들에 연좌되어 잡힌 자가 1천여 가구에 이르렀다. 이후 왕온서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죄가 무거운 자는 일족을 멸하고 죄가 가벼운 자는 당사자만 죽이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했다가 부당하게 뺏은 것을 변제토록 하겠습니다.

     

    신기한 것은 상소문을 올린지 2, 3일 만에 무제의 재가가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좌우지간 황제의 윤허를 받았던 바, 곧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이에 시신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피가 10여 리에 이르렀는데, 그즈음 하내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긴 것은 상소와 그에 대한 윤허가 어찌 그리 빨리 오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가 상소 처리를 신속히 하기 위해 만든 역참 제도를 알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왕온서의 이미지

     

    12월이 지날 무렵, 군내에서는 이에 불만을 제기하는 자가 없었고, 밤에 걸어나디는 자가 없었으며, 들에는 도둑으로 인한 개 짖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왕온서는 미처 잡지 못한 도둑들을 인근의 군이나 이웃 나라까지 추적해 잡아왔다. 입춘이 되자 '한겨울 동안 군내 범죄자들을 일소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던 왕온서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아아. 겨울이 한 달만 더 길었다면 일을 완수해낼 수 있었을 텐데....."

     

    이 말에 황제의 귀에 들어가자 무제는 왕온서를 중앙으로 끌어올려 중위(中尉, 경찰총장)에 임명했다. 그를 유능하고 책임감 강한 관리라 여겨던 것이다. 왕온서는 중앙에 가서도 통치 방법은 하내에 있을 때와 매 한가지였으니 교활한 하급관리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일했다. 그러다 보직 이동으로 다른 직책을 맡게 되었으나 확실히 중위 때만 못했으니 이렇다 할 실적도 업적도 없었다. 그리하여 왕온서는 중위로 리턴하게 됐고, 다시 활발하게 치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왕온서는 아첨에는 귀신이어서 권세 있는 자들에게는 알랑거렸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종처럼 천시했다. 그는 권문세가에는 불법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손을 쓰지 않았고, 권세 없는 자는 귀한 신분이든 외척이든 가차없이 욕보였다. 법령을 교묘히 적용하여 비천한 계급의 무리에게 죄를 덮어씌움으로써 간악한 호족들을 비호했다.

     

    그가 중위의 직책을 수행해 나가는 방법은 이런 식이었다. 무고하다며 버티는 자들은 심한 심문을 받았는데, 대부분 혹독한 고문에 몸이 문드러져 감옥 안에서 죽었으므로 재심을 받아 출옥하는 자가 없었다. 왕온서의 부하들은 사람의 탈을 쓴 이리처럼 포악하였다. 때문에 중위의 관할 범위 안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왕온서와 그의 부하들에게 굴복하였고, 권세 있는 자들도 왕온서를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의 치적을 찬양하였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왕온서의 비선조직은 거의가 큰 부자가 되었다. 

     

    왕온서는 당연히 스스로를 최고라 여겨 자신을 따르는 사람만을 중시하고, 반대파라 여겨지는 자는 어떻게든 찍어눌렀다. 이것은 옛 상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혹한 정치에 여론이 나빠지자 면직되었는데, 그러다 다시 우보도위(右輔都尉)가 되어 중위의 직무를 맡았다. 그는 다시 예전처럼 비선라인을 조직해 사찰했으나 이제는 식상한 감이 있었다. 그는 다시 면직되었고 결국 몰락했다. <사기>는 그의 몰락에 특별한 사건을 적지 않았으니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평범(?)하다.

     

    어떤 사람이 왕온서가 뇌물을 받았고, 또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일을 하였다고 고발하였다. 그 죄는 멸족에 이르는 것이었기에 왕온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온서의 두 아우와 그들의 두 사돈 집안도 다른 죄를 지어 오족이 멸족되었다. 이를 보고 광록훈 서자위는 이렇게 이렇게 말하였다. " 슬픈 일이다.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였는데, 지금 왕온서의 죄는 오족이 동시에 멸하기에 이르렀구나 !"

     

    '그 사람을 알려면 권력을 쥐어져 보라'는 말이 있다. 필부는 조그만 권력이라도 쥐어지면 마구 휘둘러대기 바쁘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 큰 권력을 쥐어주면 안 된다. 얼마 전 어떤 고위공직자가 주어진 권력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며 많은 사람을 상해하다 결국 제 칼에 제가 다쳐 물러났다. 주변 사람들이 그걸 예상했고, 또 그렇게 된 결과에 안타까워 했는데, 딱하게도 본인은 아직도 뭐가 뭔지 사태 파악을 못하는 듯하여, 보는 나 역시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는 퇴임 후에도 남탓하는 버릇은 여전했는데, "군자구제기 소인구제인"(君子求諸己 小人求諸仁, 군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서 찾는다)이나, "군자태이불교 소인교이불태"(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군자는 편안하고 교만치 않으며, 소인은 교만하며 느긋하지 못하다)라는 공자님 말씀을 빌리자면 그는 소인배에 더도 덜도 아니다.  

     

    공자님은 한마디를 더했다.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고 운명에 정해진 것 같이 편안히 행동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知其不可奈何, 而安之若命, 德之至也) 이것이 순리(順理)이고 그렇게 행하는 공직자가 순리(循吏)일 터다. 그런데 이번에 자리에 오른 사람도 전임자에 못지 않게 자존감이 높은 자인 듯, 그저 막무가내(莫無可奈), 묵가내하(無可奈何) 하니 그 역시 순탄치 못할까 걱정이다. 혹리는 칼을 휘두르기를 즐기나 결국은 칼을 무게를 감당해내지 못하게 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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