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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과 예방의학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1. 1. 26. 20:53
후한의 역사가 반고(班固, AD 32-92)가 쓴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갈관자(鶡冠子)라는 도인(道人)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나온다. "갈관자는 초나라 은자(隱者)로서 성과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깊은 산중에 살며 산꿩인 갈(鶡) 깃을 모자에 꽂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갈관자(鶡冠子)라 불렀다. 그가 쓴 책은 없어져 전하지 않으니 지금 전하는 《갈관자》 3권은 후대 사람의 위서(僞書)이다."
그럼에도 《갈관자》는 도가(道家)의 입장에서 본 의학을 다루고 있어 가끔 그에 관한 논문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갈관자》의 번역본은 없으나 원문으로는 구입할 수 있다) 오늘 말하려는 것은 《갈관자》에 나오는 편작(扁鵲)이라는 명의에 관한 예화다. 그 책의 <세현(世賢)>편에는 '누가 가장 뛰어난 의사인가(孰最善醫)'를 묻는 위나라 문후(文侯)의 질문에 대한 편작의 유명한 답이 실려 있다. 원문과 해석은 아래와 같다.
魏文侯曰 “子昆弟三人, 其孰最善醫?” 鵲曰 “長兄最善, 中兄次之, 扁鵲最爲下.” 魏文侯曰 “可得聞耶.” 扁鵲曰 “長兄於病視神, 未有形而除之, 故名不出於家. 中兄治病其在毫毛, 故名不出於閭. 若扁鵲者, 鑱血脉, 投毒藥, 副肌膚間, 而名出聞於諸侯.” 《鶡冠子》
위나라 문후가 편작에게 물었다.
“그대는 형제가 셋이라 했는데 그 중 누가 가장 뛰어난 의사인가?”
편작이 답했다.
“맏형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이 그 다음이고, 저는 가장 아래입니다.”
편작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는 문후가 의아해 다시 물었다.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맏형은 질병을 보는 눈이 신의 경지라 병이 드러나기 전에 치료합니다.(맏형은 낯빛만 보고 장차 병이 있을 것을 압니다. 따라서 환자는 아프기도 전에 치료를 받으므로 아픔을 모르며 자신이 병이 있었다고도 생각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집 밖을 벗어나지 않습니다.(그래서 유명해질 수가 없습니다)
둘째 형은 병증이 미미할 때 치료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마을 밖을 벗어나지 않습니다.(그래서 덜 유명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혈맥에 침을 놓고, 독한 약을 투여하고, 살갗을 찢고 하니까 그 이름이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 《갈관자》는 위서(僞書)라고 함에도 3형제 명의의 편작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보다도 개연성 있다. 《사기》에서는 여관 종업원으로 있던 편작이 단골손님이 준 알약을 먹고 전시안(全視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람의 몸도 투시하여 병증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써 있는 반면, 《갈관자》의 것은 꽤 신뢰할 만하다. 형제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쉽게 볼 수 있는 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갈관자》의 이야기는 현대 의학에서도 중시되는 예방의학을 강조한 예화라서 더욱 눈이 간다. 그 취지인즉 '아프기 전에 예방하고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료하라'는 것인데, 앞서 '전시안(全視眼, All seeing eyes)을 가진 편작'에서 소개한 편작이 제(齊)나라 환후(桓侯)를 만난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예방의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바, 이를 따르면 현대인에게 수반되는 직업병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직무상 얻게 되는 직업병을 숙명으로 여겨 용납하기 일수지만 선천적 질환이 동반되지 않는 직업병은 얼마든지 예방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직업상 컴퓨터 모니터를 하루종일 보아야 되는 분은 한 시간에 단 1분이라도 시선을 멀리 두거나 눈을 감고 있으면 피로 누적을 예방할 수 있고 병도 예방할 수 있다.(망막박리로 전신마취 수술을 한 본인으로서는 가장 강조하고픈 사항인데, 눈은 뜨고 있는 동안에는 내내 일하는 인체기관이라 특히 휴식이 필요하다) 조립 같은 작업으로 팔을 많이 쓰는 분은 가끔 손목을 풀어주고, 팔을 어깨 위로 들어주고, 어깨를 한번씩 돌려주면 오십견 등에 대한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종일 서서 일하시는 분은 필히 앉아 휴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하며, 반대로 직업으로 운전을 하시는 분이나 앉아만 있는 사무직의 경우, 하체 강화를 위한 걷기는 필수다. 기실 이런 것쯤은 다 알고 있으며 방법도 쉬우나 정작 실행하는 분은 보기 어렵다.
하남성 탕음(湯陰)에 있는 편작묘(廟) 내의 동상과 무덤
서안(西安) 편작기념관 내에 있는 편작 묘
편작의 무덤은 하북성 임구, 산서성 영제, 산동성 제남에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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