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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장료라는 인물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0. 1. 12. 23:57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 장수 장료(張遼, 169?-222)는 그다지 유명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니아 급의 인물 또한 아니니, <삼국지>를 한 번이라도 정독한 사람이면 웬만큼 기억에 담겨지는 정도의 장수다.(다만 삼국지 게임 마니아 사이에서는 용감무쌍한 캐릭터로 인해 인기 짱이라고)





    장료는 병주(幷州) 안문군 마흡현(현재 산서성 삭주시 삭성구) 출신으로 본래 섭씨(攝氏)였으나 그 조상 섭일(攝壹)과 흉노와의 원한 때문에 장씨로 성을 바꾸었다.* 이름인 료는 요동(遼東)의 요(遼, 멀 요) 자이므로 장요로 불려져야 원칙이겠는데, 대부분의 책에서 '장료'로 기록하고 있어 여기서도 통례에 따라 그렇게 쓰기로 하겠다.** 


    * 전한 무제(武帝) 시절 흉노를 토벌할 때 한나라 장수 섭일이 흉노족을 유인하여 섬멸시키려 한 적이 있었는데,(<한서> 52권) 이후로도 병주는 흉노의 세력이 들락날락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성을 바꾼 듯하다. 아래 지도 참조.


    ** 장료의 이름이 '료'로 적혀진 이유는 아마도 초기 <삼국지> 번역의 대종이었던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 삼국지의 영향인 듯하다. 거기서 장료는 '쵸료(ちょう りょう)로 발음되는 바, 그것이 그대로 한글 삼국지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한다.(북한이면 몰라도 그외는 '료'로 적혀질 이유가 없다)



    청대(淸代)에 그려진 장료의 초상화



    장료가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게 된 이유는 앞서 말한 여포와 같은 경우로, 십상시(十常侍)의 난을 타도하기 위해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낙양에 왔을 때 여포와 함께 종사(從事)하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하진, 동탁을 섬기게 되는데, 동탁이 실각하고 이각과 곽사의 난이 일어날 무렵 기도위(驥都尉)로서 여포와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이니 이후 여포가 유비를 몰아내고 서주성(徐州城)에 입성했을 때, 장료는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국상(魯國相)과 북지태수(北地太守)를 겸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포는 왜 몰락했나?') 조조·유비 연합군에 하비성이 함락되며 여포의 세력이 궤멸되자 장료는 위속과 송헌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한다. 장료는 이때 중랑장(中郞將)과 관내후(關內侯)를 제수받는데, 어떤 이본(異本)에는 친구 관우에 의해 구명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불성설이니 출신지나 활동 범위를 볼 때 이때까지 두 사람의 교집합이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의 교우는 (연의에서 두 사람은 '베프'로 설정돼 있다) 장료가 조조에게 항복한 이후로 봐야 옳을 것이다.



    삼국시대 양식으로 재건된 서주성


    조조에게 붙잡힌 장료(드라마 <삼국지> 스틸컷)




    본시 능력이 있던 자였으나 오너(owner)를 잘못 만나 고생한 케이스였던 장료는 조조 밑으로 들어간 이후 비로소 그 능력이 빛을 발한다.(하지만 관우는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어떤 이본에는 다음과 같은 멘트가 실려 있다. "어찌하여 귀공같은 이가 역적을 섬기는가?") 


    장료와 관우, 두 사람이 친구로서의 관계가 부각되는 대목은 유비군의 소패 · 서주 · 하비성이 차례로 조조에게 함락된 뒤 관우가 결사항전을 다짐할 즈음으로, 이때 단기(單騎)로 관우를 찾아간 장료는 다음과 같은 변설로 상대의 의지를 허문다.(드라마에서는 아래처럼 장료가 술을 준비함으로써 분위기를 살린다)


    "죽기로 싸우겠다는 건 자네와 같은 영웅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닐세. 아니, 그보다 자네가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세 가지 죄를 범하게 되네."







    그가 말한 세 가지 죄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만일 유비가 살아 있다면 유비 관우 장비가 삶과 죽음을 함께 하겠다고 맹세한 도원의 결의를 깨뜨리는 셈이 되고,

    둘째, 당신이 맡은 주군 유비의 처자를 돌보지 못하게 되며,

    셋째, 당신 삼형제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한실(漢室) 부흥은 물 건너 가게 된다.


    이에 관우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달고 투항한다.


    첫째, 내가 항복하는 것은 조조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한실(황제)에 대한 항복이며,

    둘째, 형수님(유비의 두 부인)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며,

    셋째, 주군 유비의 생존 및 소재가 확인되면 조조의 허락과 관계 없이 그곳으로 가겠다.


    그러자 장료는 이 조건을 가감 없이 그대로 조조에게 전하고, 조조가 이 모두를 수용함으로써 관우는 조조의 신하가 된다. 이후 관우는 저 유명한 백마벌 전투에서 원소군의 대표 장수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벰으로써 조조에게 입은 신세를 갚고, 오관참장(五關斬將)을 결행하며 유비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장료와 관우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허도(許都)로 돌아가는 마지막 길목인 화용도에서인데, 이때 장료는 조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살길을 연다.


    "관우는 오만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나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며, 또한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반드시 그 은혜를 갚는 절의(節義)의 사내입니다. 그러한즉 지난 날 관우의 항복 조건을 모두 받아주고 그와 유비의 부인을 거둔 일, 그리고 그가 다섯 검문소의 장수들을 죽였음해도 모두 용서하고 보내준 일 등을 거론해 이 위기를 눈 감아 달라 청해 보십시오."










    이에 관우는 결국 조조를 보내주게 되고 이로 인해 제갈량에게 크게 혼나게 되는 결말을 앞서 '백발 인물열전(관운장 편)'에서 다룬 바 있다. 아무튼 장료와 관우의 우정은 이러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장료의 활약에 대해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하 정사(正史)를 위주로 하였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먼저 올렸다.





    1. 백마벌 전투

    조조가 원소와 건곤일척을 겨룬 관도대전(官渡大戰)의 전초전 격인 백마벌 전투에서 관우와 함께 공을 세워 비장군(飛將軍)에 오른다.


    2. 관도대전과 하북 진압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을 무찌른 후 원소의 장남 원담을 토벌해 기주, 유주, 청주 등 하북(河北) 지방을 평정한다. 이어 잔당인 유의(柳毅)의 난을 진압해 탕구장군(蕩寇將軍)에 올랐으며, 형주 강하(江下)의 여러 고을을 무력으로 편입시켜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진다.


    3. 요서원정

    이후 장료는 조조를 따라 요서 지방에 출정, 오환(烏丸)족과 연합한 원소의 셋째 아들 원상을 지금의 랴오닝성 백랑산(白狼山)에서 격파한다. 이에 원상과 차남 원희는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의탁했으나 조조의 세력을 두려워 한 공손강에게 목이 잘리고, 오환족의 우두머리 선우답돈(單于踏頓)은 장료에게 붙잡혀 죽는다.


    ~ 당시 요동은 공손씨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와의 접촉은 없었으나 AD 238년 공손씨가 토벌된 이후로는 결국 고구려와 부딪히게 된다.(☞ '백발 인물열전, 천자문의 저자는 누구인가?')


    4. 합비성 전투

    장료의 업적 가운데서 가장 높이 치는 것이 바로 오나라와의 싸움이다.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오나라와 국경을 접한 합비성(合肥城)을 중히 여기고 장료에게 악진과 이전을 부장으로 붙여 지키게 한다. 그러나 적벽의 패전으로 인해 군사는 전부 7천 뿐이었는데, 이 틈을 이용해 손권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온다. 7천 명 대 10만 명.....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장료는 조조가 남기고 간 편지를 펴 본다.


    "만일 손권이 오면 장료 장군과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과 호군(護軍 ; 수비군)은 절대 출전하지 마시오."


    장료는 이것을 '원군을 기다리면 그동안 적이 성을 부술 것이니 기다리지 말고 사생결단을 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소를 잡아 아군의 사기를 북돋운 후 다음날 새벽 8백 명의 결사대를 데리고 출전한다. 장료의 맹렬한 공격에 당황한 손권의 부대는 소요진(逍遙津)에서의 패전 후 전의를 상실하고 마는 바, 결국 십수일 후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8백 명으로 10만 대군을 격퇴시킨 것도 놀랍기 그지없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때 장료가 퇴각하는 손권을 추격해 하마터면 손권을 사로잡을 뻔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손권은 장료의 부대와 함부로 싸우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하니 어지간히 혼났다는 방증에 다름아니다. 


    조조가 이런 용장(勇將)을 뒤에 둘 리 없을 터였다. 이에 조조는 장료에게 정동장군(征東將軍)의 위(位)를 내리고 향후 오나라 전담 맨(man)으로 활용하는 바, 오나라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그러면 위나라 장료가 잡으러 온다"는 말로써 자식들을 을렀다고도 한다.


     

    안휘성 합비시 옛 합비성 자리에 조성된 삼국신성유지(三國新城遺址) 공원


    '조조의 위나라가 쌓은 옛 토성'이라는 글이 써 있는 입구


    입구의 표석 


    성의 동문 자리


    병영이 있던 자리


    공원 내부의 합비성 자리 표석



    정사에 따르면 장료는 황초(黃初) 3년(222) 조휴와 함께 오나라 원정을 떠났다 강도(江都)에서 병사하는데, 이때 위왕 조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료의 업적, 특히 합비성 전투에서의 업적을 기려 치하한 후 장료의 직책과 권한을 모두 그의 아들 장호(張虎)에게 승계시켰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그의 죽음마저 영웅답게 처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황초 5년 조비와 함께 오나라 원정에 나섰다가 화살을 맞아 죽는 것으로 미화했다.(퇴각하는 조비를 보호하려다 오나라 장수 정봉이 쏜 화살을 맞게 되고 그 상처가 악화되어 죽는다)


    죽음이야 어찌됐든 그는 살아생전 명예로웠던 장수였다. 그리고 그 명예는 조조 밑에서 얻은 것이니(정원이나 하진이나 동탁이나 여포 밑에서 얻은 게 아니라) 장료와 조조는 서로 '좋은 말'의 관계였던 것 같다. 유명한 마케팅 전략가 잭 트라우트와 알 리스가 <My Positioning>이라는 책에서 이르기를, "성공에 이르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은 자신을 성공으로 태워줄 '좋은 말'을 찿는 것"이라고 했다. 또 "성공이란 스스로 성취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선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장료에게는 참으로 적합한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트라우트와 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피동적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성공의 유일 조건인데, 불행히도 당신 곁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일견 운 나쁘고 억울하게 느껴질는지 모르나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주변인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면 되므로.(그러면 무엇이 좋은지는 '예양(豫襄)의 의리'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안휘성 합비시 소요진(逍遙津) 공원 내에 있는 장료의 무덤


    무덤의 원경(아래 비문이 보인다)


    장료의 옷과 관을 묻었다는 내용의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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