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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운16주(II) - 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던 송나라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9. 8. 11. 06:31

     

    중국 대륙 최초의 북방 정복민족이었던 거란족의 요나라는 서기 1004년 '단연의 맹(盟)' 너머부터는 조금씩 맛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송나라로부터 은과 비단 등의 세폐(歲幣: 일종의 조공)를 받으면서부터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게 된 요나라는 북방민족 특유의 단순·용맹한 기질이 사그라지고 사치 풍조가 일었는데,(단연의 맹에 대해서는 '복마전과 연운16주' 참조) 그후로 꼭 100년이 지난 1114년, 요나라의 통치를 받던 동쪽 완안부(송화강 지류 안출호수 부근에 살던 여진족 부락)의 추장 아골타가 분연히 일어나 대국 요나라를 쳤다. 아골타는 요나라의 동북 요충인 영강주(寧江州)를 함락시키고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하는 여진족의 나라를 건국했다.(1115)

     

     

    <지도 1>

     

     

    양강주에서 요나라가 깨졌다는 소식을 들은 송나라는 드디어 복수를 할 때가 왔구나 싶어 바다를 통해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동안 요나라에 보내던 세폐를 금(金)에 보낼 테니 양국이 힘을 합쳐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것으로, 조건은 금나라가 요의 변방을 차지하고, 자신들 송나라는 연운16주를 갖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양국은 군사동맹의 합의를 보고 남북으로 요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송나라가 연운16주를 얼마나 오매불망했는가는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송(宋)은 개쪽을 당한다. 금나라가 요의 오경(五京)[각주:1] 중 중경(中京)과 서경(西京)을 함락시키고 수도인 상경(上京 )[각주:2]을 압박하는 동안 송은 남경(南京)[각주:3]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쩔쩔맸던 것이다. 남경성은 이후 금이 보낸 원군에 힘입어 겨우 함락시키게 되는 바, 이는 송나라의 허약함을 만천하에 광고한 꼴이 된 셈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금나라는 금세 합의 조건을 바꾸었으니, 받기로 한 군량과 세폐를 크게 올렸을 뿐만 아니라 연운16주 중에서 겨우 남쪽 6개만을 내주었다.

     

    ~ 양군의 공격을 받은 요의 천조제(天祚帝)는 서하로 도망갔다가 금의 추격군에 붙잡혀 죽음으로써 요나라는 9대 210년만에 멸망한다.(1125) 이때 황손(皇孫) 야율대석이 유민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동, 카라한 왕국을 격파하고 서요(西遼)를 건국한 사실은 '아시아의 기독교 왕국 요한의 실체'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북경시 천녕사 요나라

    지금도 수십 기가 남아 있는 요나라의 거대 불탑들은 과거 강력했던 국력의 상징과도 같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의 허약함을 알아차린 영국의 거듭된 침략에 청(淸)이 영혼까지 털린 사실은 앞서 '미중 무역전쟁. 신(新) 아편전쟁?' 등에서 다룬 바 있다. 마찬가지로 송의 허약함을 인지한 금태종(金太宗)은 마침내 남침을 개시,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 휘종과 흠종 및 황족, 궁녀, 귀부인, 관료, 기술자, 1만 5천 명을 붙잡아 만주로 끌고간다. 송이 세폐를 이행하지 않고(과도한 세폐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오히려 제 이득만 챙기려 했던 것이 태종 오골매의 분노를 샀음이다. 이것이 유명한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중국 역사상 유래가 없던 참극이었다.

     

    이후 금나라 군사의 추격을 겨우 피한 고종이 남쪽으로 내려와 항주(임안부)에서 왕업을 이으니 바로 남송이다. 남송은 잃어버린 북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악비(岳飛), 한세충 등이 반격을 취해 어느 정도의 땅을 되찾지만, 결국 진회(秦檜)의 화전론(和戰論)이 대세로 받아들여져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의 세폐를 바치는 조건으로 아래 <지도 2>를 국경으로 하는 평화조약이 성립되게 된다.(1141) 이것이 이른바 '소흥(紹興)의 화약(和約)'이다.(정강, 소흥 등은 모두 당대의 연호임) 하지만 평화의 댓가를 쓰라렸던 바, 송은 중국 초유로 주변국에 대해 신하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과거 중국은 주변국에 대해 약세일 경우 돈을 주고서라도 주군의 자리를 유지했으나 사상 처음으로 역전을 허용한 것이었다.

     

     

    항주시의 악비 사당 악왕묘(岳王廟)

    중화 회복을 위해 분전하다 진회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악비는 관우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수이다. 그래서 그의 사당도 관왕묘(關王廟)처럼 악왕묘로 불린다.

     

    악왕묘의 악비(岳飛, 1103-1141) 상

    하지만 최근 중국정부의 국가통합작업으로 그의 위상은 급전직하됐다. 그는 지금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중국 통일을 방해한 반동분자로 취급받는다. 그의 뒤에 써 있는 '우리강산을 돌려달라(還我河山)'이라는 글자가 이제는 무색해졌다. 참으로 역사란 알 수 없다.(그러나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런지 모른다)

     

    <지도 2>

     

     

    금나라는 중원을 차지하고 남송을 신하국으로 삼음으로써 명실공히 천자의 나라로 등극한다. 하지만 중원 경략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서북쪽 땅은 잃어버려 훗날 몽골 제국이 일어날 수 있는 여력을 제공하게 되었다.(지도 1, 2 참조) 아울러 몽골에 대한 장악력 역시 요나라에 크게 뒤졌던 바, 장성을 쌓아 방비하는 소극적 경영으로 일관했다. 더불어 금은 과거의 요나라처럼 편안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처지가 되자 마찬가지로 유약해져 지난 날의 빛났던 상무정신이 차츰 쇠퇴해져갔다. 그런데 이즈음 몽골 고원에서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하였으니 그 유명한 테무친(鐵木眞)이다. 그는 북방의 유목 몽고족들을 통합해 칭기즈 칸(가장 위대한 왕)에 오른 뒤 드디어 정복사업을 개시하였다.

     

     

    원태조(元太祖) 칭기즈 칸(1155-1277)

    중국정부는 역사 왜곡 작업(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으로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와 발해도 자국의 역사로 취급하는 것인데, 징기즈 칸의 후예들이 세운 원나라에 대해서는 과연 뭐라 할는지....? (그건 몽골의 역사이지 중국의 역사가 아니잖아?) 

     

     

     

    칭기즈 칸은 중앙 아시아의 대국 호라즘 왕국을 멸망시키고, 도망간 호라즘의 국왕을 추격해 러시아 카스피 해 일대까지 점령한 후, 다시 서하와 금나라 공격하던 중 병사한다. 하지만 1234년 아들 태종 오코타이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금의 개봉을 공격하자 남송은 몽골을 적극 돕는다. 과거 금나라에 당한 치욕을 복수를 할 때가 왔구나 생각했던 것이니, 이는 과거의 금·송 관계와 너무도 흡사한 상황이었다. 아울러 결과 역시 흡사했으니, 송은 몽골에 보내주기로 했던 세폐를 이행하지 않았고(마찬가지로 과도한 세폐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오히려 제 이득만 챙기려는 했던 것이 태종 오코타이의 분노를 샀음이다.[각주:4] 이에 오코타이는 금에 이어 남송마저 밀어버리니 송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1276)

     

    조좌호 교수는 자신의 저서 '동양사대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데 그 옛날 희종이 요에 대한 숙원을 보복하기 위하여 금을 도와 이를 멸망시켰으나 그 뒤 금과의 약속을 위반하여 마침내 중원의 북반부를 빼앗긴 전철을 밟은 것이니, 한 번 실패도 무엇한데 두 번이나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하였다는 것은 송에 얼마나 인물이 없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 차제에 작금의 반일 운동을 생각해 본다.(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뜻에서.....) 사태를 해결해야 할 정치인들은 자신이 없으니 모든 것을 반일 감정을 이용해 감정몰이에 나서고, 국민들은 그저 이용당해 휘둘린다. 남북이 힘을 합치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대통령의 공허한 외침, 애국·매국 타령의 청와대 수석..... 이런 발언들이 삼복 더위 속에 불쾌지수를 더욱 높인다. 일본놈들은 우리를 철저히 연구해 우리가 단기간에 절대 개발할 수 없는 시스템 반도체 소재라는 첨단 무기를 사용하는데, 우리의 무기라야 일본 소비재 불매 운동 정도....? 과거 우리가 당했던 공식 그대로 활과 조총, 화승총과 스나이더 소총과의 싸움이다.(앞서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I'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번 싸움의 발단은 일제에 대한 개인청구권, 즉 징용 피해자 보상금인데, 난 가난하지만 일본에서 이런 돈 거저 줘도 솔직히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대신 일본에 한마디할 거다. "나는 피해보상금 따위는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너희들의 과거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도 생각해봐라. 우리가 그걸 어찌 잊겠는가....."  내 단견으로는 약자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약자 최후의 무기다. 이것이 뒷받침되면 아무리 강자라 해도 함부로 못한다. 물론 본인은 조금 춥고 배고프겠지만 말이다.(앞서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에서도 말했지만 이게 없으니 만날 중국에게 씹히는 거 아닌가?)

     

     

    아무튼 이번 싸움은 장기전에 될 것 같다. 일본이 우리의 미래 산업을 죽이겠다고 나온 이상..... 하지만 뾰죽한 대책은 없다. 그저 지금의 불매운동은 과거 무기력한 시절의 데자뷰로 여겨져 씁쓸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이거라도 끝까지 밀어붙었으면 한다. 예전처럼 흐지부지되면 정말로 일본은 우리를 더 우습게 볼 것이다.(총이 없으면 돌팔매질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가만보면 우린 늘 몇 개 던지다 마는 식이다)

     

     

     

    1. 요나라는 발해의 5경(五京) 제도를 본받아 자신들도 5개의 배도(陪都)를 두었는데, 이중 상경임황부(上京 臨潢府)가 메인 캐피탈의 역할을 했다. [본문으로]
    2. 흥안성 박라성(興安省 博羅城) [본문으로]
    3. 남경석율부(南京析律部): 하북성 평산시(河北省 平山市) [본문으로]
    4.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개봉(변경)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 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과 개봉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위키백과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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