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원칙을 세우면 조직은 흥한다. 사목입신(徙木立信)의 예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20. 17:23


    진문공(晉文公)의 예에서 보여지듯 바르고 뚜렷한 인사원칙이 있는 나라는 반드시 강국으로 성장한다. 문공이 환갑을 훨씬 넘은 늦은 나이에도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고, 또 진(晉)나라가 대대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원칙 있는 인사에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전국시대의 강자로 급부상했던 진(秦)나라도 같은 경우이니, 그 나라 역시 국정 전반에 분명한 원칙을 세움으로써 강국이 될 수 있었고 또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다음과 같은 일화로서, 이는 '원칙'이라는 것이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전국시대 초기인 기원전 4세기 무렵, 진나라의 군주 효공(孝公 BC 381-338)은 부국강병을 실행하고자 위(衛)나라 출신의 공손앙(公孫鞅)을 등용했다. 위나라와 위(魏)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그의 법가사상(강력한 법치주의)을 효공이 받아들인 까닭이었다. 공손앙이 진나라에서 처음 한 일은 다음과 같이 단순, 유치한 것이었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10덩이를 주겠노라."


    그가 도읍인 한양 남문 옆에 10m 남짓한 큰 나무기둥을 심고 내건 방문(榜文)이었다. 사람들은 모여 호기심 속에 그 방을 읽었지만 정작 나무를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손앙은 다시 방문을 고쳐 적었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50덩이를 주겠노라."


    그러자 어떤 사내 한 명이 나섰다. 미친 척하고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사내가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자 공손앙은 곧바로 황금 50덩이를 지급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나라에서 방을 내걸면 믿을 수 있다는 좋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이목지신(移木之信=徙木之信), 혹은 사목입신(徙木立信)이라 불리는 고사인데, 문자 그대로 나라와 국민 간의 믿음(信)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목지신의 고사


    옛 함양성 터


    함양의 위치


    옛 함양궁 터에 지어진 유적발물관


    유적박물관 내의 함양궁 흔적



    이후 공손앙은 자신이 만든 부국강병의 신법(新法)을 공표하고 엄격히 준용했다. 물론 처음에는 불평이 많았지만 10년이 지나자 마침내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제것이 아니면 손 대지 않았고, 산에는 도적이 사라졌으며, 집집마다 다 넉넉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전쟁에서 용감하였으나 개인간의 싸움은 피했고, 나라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行之十年, 秦民大說, 道不拾遺, 山無盜賊, 家給人足. 民勇於公戰, 怯於私鬪, 鄕邑大治)


    이에 진나라는 효공이 원한 대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는데, 사실 그 과정이 그리 순탄할 리 없었을 터, 그것은 공손앙이 처음 효공을 만났을 때부터 그러하였다.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한 그 첫 번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재상인 경감이란 자를 통해 공손앙을 추천받은 효공은 그가 말하는 부국강병책을 들었다. 하지만 효공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꾸벅꾸벅 조는 듯하더니 급기야 코까지 골았다. 당연히 공손앙의 변설이 지루했기 때문이었을 터, 효공은 그를 추천한 재상 경감을 크게 꾸짖었다. 


      "어디서 그런 사람을 데려왔어? 졸려 죽을 뻔했어! 당장 그자를 내치게!"

      "허! 그럴 리가요? 뭔가 잘못됐을 겁니다. 한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나보십시오."


    공손앙의 재능을 잘 알고 있던 경감이 재차 사정을 했다. 이에 효공은 다시 공손앙과 마주하긴 했으나 이번에도 별 효과는 없어 보였으니, 앞서처럼 졸지는 않았지만 지루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감이 물었을 때의 반응 역시 미지근했다.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들을 만하셨지요?"

      "글쎄..... 전보다 좀 낫긴했는데, 역시 따분했어."

      "그래요? 이번에도 또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한번만 더 만나보시지요."


    경감이 내켜하지 않는 효공을 부추켜 독대의 자리를 가진 지 세 번째 되는 날, 효공은 마침내 무릎걸음으로 걸어와 공손앙의 코 앞에 앉아 그의 부국강병책을 경청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좌서장(左庶長)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어떻게 효공의 태도가 급변했던 것일까? "사기" '상군(商君=공손앙)열전'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등에서는 공손앙이 처음에는 맹자의 왕도정치 같은 것을 주장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군주가 덕을 완성하여 그 덕으로써 정치를 행하고 백성을 이끌어 나가는 온건한 치도(治道)를 역설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대충 맞을 것 같다. 본시 공손앙이 공부했던 것은 형명학(形名學)으로, 강력한 법치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그는 이것으로써 출세를 하고자 했으나 왕도정치를 원하는 다른 나라 군주들의 배격을 받았던 바, 효공에게도 처음에는 왕도정치를 피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효공은 그것을 성에 차지 않아 했으므로 점점 과격한 정책을 들이밀게 됐고, 결국 그와 같은 비전이 채택되게 된 것이었다.

     

    공손앙은 군주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행했다. 그리고 이 법은 처음에는 잘 지켜지는 듯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불편을 호소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태자가 법률을 위반하는 일이 발생했다. 공손앙은 당연히 군주의 뜻을 받들어 태자를 처벌하려 했다.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음은 윗사람이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야 옳은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음 임금이 될 태자를 벌할 수는 없는 일일 터, 그의 스승인 태부(太傅) 공자 건을 벌하고, 태사(太師)인 공손가에게는 경형(黥刑, 얼굴을 베어 먹물을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태부와 태사는 임금의 고문이자 태자의 가르침을 담당하는 국가 최고위직에 해당하는 직위였고, 게다가 태부인 공자 건은 국왕 효공의 친형이었다. 


    그  4년 후 공자 건이 법률을 위반하자 공손앙은 이번에는 여지없이 의형(劓刑, 코를 베는 형벌)에 처했다.(이로 인해 공손앙은 태자와 그 측근들의 깊은 원한을 사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이 말을 안 들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나라는 앞에서 말한 '도불유습(道不拾遺,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경지가 얼마나 깊었는 지는 법에 반대하는 자는 물론이거니와, 법을 찬양하는 자마저 없었던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법을 찬양하는 사람 역시 처벌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찍소리 말고 따라오라는 공포정치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이같은 강력한 법질서는 스스로를 옭매어 이 역시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아무튼 진나라는 이로 인해 강국이 되었고, 마침내 자신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당대의 최강국이었던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물론 전쟁은 승리로 마감지어졌다. 하지만 이때 위나라에 행한 트릭은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사건과 더불어 그를 옭아매었던 바,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장식하게 되는데, 그 최후를 다음 회에 위나라와의 전쟁과 함께 다뤄보려 한다.



    상앙의 석상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