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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위약조로(危若朝露)의 상앙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21. 07:13

    * '원칙을 세우면 조직은 흥한다. 사목입신(徙木立信)의 예'에서 이어짐


    공손앙이 시행한 신법(新法)은 그야말로 엄렬(嚴烈)한 것이어서 요즘으로 보자면 쓰레기 분리수거만 잘못해도 요참형(허리를 잘라 죽이는 병)에 처했졌던 바, 길거리가 깨끗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한마디로 가벼운 범죄도 무겁게 처벌한다는 것이 신법의 요지였으니, 거리는 깨끗할지 몰라도 위수(渭水)에는 오랫동안 핏물이 넘쳐 흘렀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것은 아니었으니, 토지의 사유화와 황무지 개간, 산업의 진작 및 도량형의 통일 같은 합리적인 법안도 적잖았다. 공손앙은 효공 6년(BC 356)과 12년(BC 350), 두 차례에 걸쳐 이 같은 신법을 공표했는데, 말했다시피 진나라의 부국강병은 모두 이 신법을 토대로 이룩된 것이었다. 


    그의 위나라 침공은 이와 같은 자신감의 발현이었다. 또 때는 마침 방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위(魏)의 강군(强軍)이 손빈이 지휘하는 제(齊)와의 전투에서 왕창 깨쳐 힘을 상실한 시절이었던 바, I·Q 좋은 공손앙이 이 시기를 놓칠 리 만무했다. 공손앙은 효공에게 전쟁을 강력히 진언했다.

     

      "진나라와 위나라는 국경이 접해 있어 항상 껄끄러운 사이입니다. 지금 위나라는 제나라와의 전쟁에 져 심히 피폐해져 있는 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면 옛 진(晉) 땅과 황하를 모두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몸이 근질거리던 효공은 즉시 이 말을 받아들여 공손앙으로 하여금 위나라를 공격케 했다. 이에 위나라는 공자 앙(卬)을 장군으로 하는 대군을 출동시켰는데, 그 양군이 대치하는 동안 공손앙은 사자를 시켜 다음의 편지 한 통을 공자 앙에게 보냈다.


      "예전 내가 위나라에 있을 때 당신과는 매우 친한 사이였소만, 다만 처지가 달라져 원수가 되었구려. 허나 당신과 내가 차마 싸우기는 어려운즉, 서로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기분 좋게 술 한잔 한 후 양군을 물려 돌아가기로 합시다."

     

    공자 앙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술상머리를 같이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공손앙의 계략이었으니 그는 장막 뒤에 숨겨둔 군사들로 공자 앙을 생포해버렸다. 이후 군대를 몰아 위나라를 공격하였던 바, 지휘관이 없는 위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위나라 혜왕이 크게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 내가 예전에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도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과거 공손앙이 위나라에 머물던 시절, 재상인 공숙좌는 병상에 누워 혜왕에게 이렇게 간했다. 

      "공손앙은 인물이오니 제가 죽거든 그를 중용(重用)하십시오. 만일 주군께서 중용하지 않을 요량이시면 그를 죽이십시오. 살려두면 필시 다른 나라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공손앙을 불러 그 사실을 솔직히 고하며 대비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공손앙은 의외로 덤덤했다. 

      "당신이 몇 번이나 천거해도 나를 중용하지 않았거늘 새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상황은 그대로 전개되었으니 공손앙은 여유롭게 국경을 넘어 진나라로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머리가 샤프했던 공손앙이었으니 전쟁은 승리는 당연한 귀결일는지도 몰랐다. 공손앙은 그 공으로 상(商)과 어(於) 등의 15개 읍을 하사받았는데, 그중 가장 큰 고을이 상 땅이었던 바, 이후로는 상군(商君)으로 호칭됐고 이름도 상앙(商鞅)으로 불려졌다.


    하지만 이렇듯 샤프한 머리의 상앙도 한계는 있었으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효공이 여전히 자신을 총애하는 까닭이기도 했을 터, 올해 43세로 아직은 팔팔한 왕의 사후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도 보였다. 


    다만 조량(趙良)이란 사람만이 세태를 먼저 읽었다. 그는 자신이 바른 말을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받고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제가 보기엔 지금 상군은 위약조로(危若朝露, 위태로움이 아침 이슬과도 같음)의 상태인데, 오히려 세력을 더 얻으려 하시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봉토로 받은 상(商) 땅을 비롯한 열다섯 고을을 반납하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 위여조로(危如朝露)’, ‘조로지위(朝露之危)’로 쓰인 책도 있으나 내내 같은 의미이다. 



    상앙의 초상


    상앙이 편찬한 법가의 책 '상군서'

    병농일치에 입각한 부국법, 신상필벌에 따른 강병책, 법과 형벌에 의한 다스림 등에 관한 29권의 책(현재 남아 있는 것은 25권)으로 훗날 제갈량이 이 책을 유비에게 필사해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상앙은 이에 수긍하지 않았다. 

      "내가 진나라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는 오랑캐의 풍속에 젖어 사는 야만의 땅이었다. 내가 그 땅에 법도를 가르치고 저 위엄 있는 궁궐도 지었다. 나의 공이 어찌 백리해(진목공 때의 명재상)에 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조량이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천 마리 양 가죽은 한 마리 여우 가죽만 못하고, 천 명의 아첨꾼은 바른 말하는 한 사람만 못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진나라 왕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 조정에 서지 못하게 되면 진나라에서 당신을 제거하려는 명분이 어찌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다가올 것입니다.(翹足而待)"


    그럼에도 상앙은 끝내 조량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의 넘어짐은 정말로 한 발을 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그로부터 5개월 만에 효공이 갑자기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이 자가 곧 혜문왕이다. 그러자 상앙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은 공자 건과 그 무리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들고일어섰다.


      "자고로 신하된 자의 권력이 너무 크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무지랭이 백성들은 상앙의 법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상앙의 법이 임금을 능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봉토는 열다섯 고을이니 그 권력을 이용해 언제든 반역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긴 말이 아니라도 혜문왕이 상앙을 좋게 볼 리 없을 터, 가차없이 그를 삭탈관직했다. 그리고 상 땅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상황을 보니 그것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상 땅으로 돌아가는 그의 행렬이 마치 임금의 행차 같았던 바, 아직도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조정 대신들이 그 뒤를 따르며 배웅했던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혜문왕(드라마 '대진제국' 스틸컷) 



    이에 텅 비다시피한 조정을 바라보던 혜문왕이 갑자기 명령을 고쳐내렸다. 상앙을 체포해 끌고 오라는 것이었다. 가는 도중 자신에 대한 체포령을 인지한 상앙은 급히 말에서 내려 숲으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함곡관 근처의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 주인은 손님 맞기를 거절했다. 


      "여행 증명서를 갖고 있습니까?" 

      "급히 오느라 못 가지고 왔소."

      "그럼 숙박할 수 없습니다. 상군의 법에 여행증이 없는 자를 재우면 함께 처벌받는다고 돼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상앙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아. 내가 만든 법이 나를 죽이는구나."



    형장의 상앙(드라마 '대진제국' 스틸컷) 



    하지만 불리한 상황은 그것만이 아니었으니, 수상한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신고하라는 (신고를 안 하면 당연히 처벌받는) 밀고 장려법으로 인해 포위망은 더욱 좁혀져만 갔다.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위나라까지는 갔는데, 예전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꼼수로 공자 앙을 죽인 원한으로 오히려 그곳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상앙은 진나라의 대역죄인이다. 진나라에 돌려보내야 후환이 없다."

    상앙은 이같은 위나라의 중론에 따라 진나라로 보내졌고, 거열형(車裂刑)에 사지가 찢어져 죽었다. 어쩌면 인과응보의 전형 같은 죽음이었다.(어떤 책에서는 상앙이 자신의 봉토에서 반란을 꾀하다 붙잡혀 죽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역시 죽음은 거열형이었다)  



    거열형의 광경


    진효공의 동상

    현대 사상가 곽말약(궈모뤄)은 상앙의 변법을 신뢰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경주한 효공을 중국의 역대 군주 가운데 가장 대공무사한 리더로 평가하였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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