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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바른 논공행상과 낙하산 인사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19. 07:23

     

    진문공(晉文公)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지난(至難)한 여정을 거쳤는지는 앞서 '삼사(三舍)를 후퇴한 진문공'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 문공이 도읍인 강성(絳城)에 입성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 그간 자신을 호종하며 보필했던 신하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말한 대로 그것이 무려 19년 간이었으니, 그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보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이때 문공의 포상은 무척이나 적절했던 바, 이는 훗날에도 논공행상의 모범 사례로 자주 회자됐다. 원칙을 가지고 분명히 행하면 불만이 없다는 것인데, 아래 호숙(壺叔)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문공은 그동안 자신을 보필했던 신하들에 대한 보상을 시행하며 혹시 누락된 사람이나 보상이 소홀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자 호숙이란 신하가 섭섭함을 표했다.

     

    "신(臣)은 포성(浦城)에서부터 주공을 호종한 사람으로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천하를 함께 누비며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습니다. 주공께서 머무실 때는 늘 곁에서 침식을 보살폈고, 마차를 점검하며 한시도 주공의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모두 포상하시면서 신은 제외하시니 제게 무슨 죄가 있음이옵니까?"

     

    호숙의 말대로라면 그는 충분히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던 바, 당당히 그 보상을 요구할 만했다. 하지만 문공의 생각은 달랐다.

     

    "그대는 이리 가까이 오라. 과인이 그대에게 그 이유를 분명히 알려주겠노니, 과인은 

    첫째, 인의(仁義)로 나를 이끌어 나의 마음을 넓게 열어준 사람에게 가장 높은 상을 내렸으며,(夫導我以仁義 我肺俯開通者)

    둘째, 나를 지모(智謀)로 보좌하여 나로 하여금 다른 여러 제후에게 욕되지 않게 만들어준 사람에게 그 다음 상을 내렸고,(輔我以謀議 我不辱諸侯者) 

    셋째,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온 몸으로 나를 보호해 준 사람에게 그 다음 상을 내렸다.(冒矢石犯鋒鏑 身衛寡人者)

    이 세 가지 포상이 모두 끝나면 네게도 상이 돌아갈 것이니 물러가 있거라."

     

    즉 문공은 인덕을 베풀어 자신의 마음을 편안히 해준 자, 지혜로운 행위로써 자신을 망신스럽지 않게 만들어준 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운 자를 보상의 1, 2, 3위에 올렸던 것이니, 그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발품만을 판 필부의 노고(若夫奔走之勞,匹夫之力)에는 금, 은, 동메달을 수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호숙은 꼬랑지를 내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壺叔愧服而退)    

     

    이처럼 사리가 분명한 논공행상은 누구나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와 같은 엄격한 신상필벌의 원칙은 어떤 조직을 막론하고 그 바탕으로 삼아야 된다. 이것은 논공행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조직사회의 기강을 세움에 있어서도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어느 조직이든 원칙이 세워지고 그 원칙대로 신상필벌이 행해지면 모두 원칙을 존중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만, 반면 정실 관계, 혹은 개인의 호불호로써 논공행상이 행해지면 그 조직이 무너지는 것은 다만 시간의 문제가 될 터이다. 

     

    어느 사회, 어느 집단, 혹은 양자 간에도 원칙이 무너지면 반드시 불만이 생겨난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문공이나 제갈량, 혹은 조조의 원칙 있는 논공행상이 길이길이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설명을 달겠거니와 제갈량이나 조조의 논공행상은 강하면 강한 대로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대로 원칙이 있었던 바, 강국이 되고 강군(强軍)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원칙이 세워지면 작금의 문제인 낙하산 인사도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으리라 본다. 원천적으로 그와 같은 부정한 틈입이 통용되지 않는 건전한 사회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도덕에만 매달리다가는 백년하청일 터, 강력한 법제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니 지난해 어느 소수 정당이 발의한 이른바 '낙하산 금지법'은 끝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여여 모두 현행의 '은근슬쩍 낙하산 제도'에 대한 공범자요, 애증 뒤얽힌 오래된 불륜 남녀에 다름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오히려 이 사회의 건강함과 건전성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원래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좀 짧은 듯해 한식(寒食) 날의 유래가 된 개자추(介子推)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그 설화의 진위까지 함께 논해보고자 한다. 

     

    진문공의 논공행상은 그렇게 마감되었다. 그런데 그의 논공행상이 두루 형통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를 호종했던 신하 중 단 한 사람이 배제되었다. 경황 중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을 빠뜨린 것인데, 그는 유랑 중 허기에 지친 문공에게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잘라 바치기도 한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이것이 가능한 일인가는 추후에 논하기로 하고, 좌우지간.....)

     

    그런데 개자추는 본래 성격이 나서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바, 다른 신하들처럼 공을 다투지도 않았고 호숙처럼 섭섭함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이에 자연히 논공행상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었다. 개자추는 문공에 대한 실망감을 가득 안은 채 소리 소문 없이 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홀어머니와 함께 면산(綿山)으로 숨어들었다. 

     

     

    개자추가 숨었다는 면산 
    면산은 지금 태원(타이위엔)의 평요고성과 함께 산시성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면산의 위치  

     

    얼마 후 문공은 문득 개자추를 찾았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문공과 신하들은 그제야 미안함을 가지고 서둘러 개자추를 수배했지만 그저 들은 것이라곤 그가 면산에 숨었다는 것뿐이었다. 문공이 면산 깊은 산중에서 그를 찾기란 참으로 막연했던 바, 산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면 결국 기어 내려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으니 개자추는 제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껴안은 채 불타 죽었다. 

     

    남에게 제 공치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성격이 대개 이렇다. 좋은 말로 외골수다. 아무튼 우리의 명절 비슷한 한식(寒食) 날은 중국의 한식에서 비롯됐다.('한식'은 차가운 밥이라는 뜻이다) 한식은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인 바, 4월 5일이나 6일쯤이 된다. 우리 24절기의 하나인 청명(淸明)일의 다음날이거나 같은 날이 되므로 '이판사판'의 의미인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의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명절 정월대보름이 오곡밥을 먹는 날이라면 한식은 찬밥을 먹는 날이다. 문공이 개자추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려 해마다 그날에는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던 바, 찬밥을 먹는 풍습이 생겨났던 것이다. 의아한 점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까지 찬 밥을 먹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지랄 같음은 익히 설명을 마쳤지만,(*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참조) 과연 찬밥 먹는 풍속까지 따라야 할는지.....

     

     ~ 그렇다고 그날 정작 찬밥을 먹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껏 한식 날에 찬밥을 먹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한식이란 것도 그저 달력에만 표시되는 식적 마크일 뿐, 그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음력 5월 5일의 단오절만큼은 내 것이냐 네 것이냐를 두고 중국과 다투고 있는 중인데, 그저 한식이나 영원히 가져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오절은 중추절과 함께 우리의 고유 명절이니 건들지 말고.....(그러고 보니 오늘이 단오날이다)

     

    아울러 개자추의 행위 자체도 문제를 삼을 만하니, 그가 무슨 큰 공을 세웠거나 혹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죽은 것도 아니다. 그저 '삐침'의 성격상 산에 들어가 은거한 것뿐이다. 굳이 교훈을 삼자면 '지나친 충성은 자신을 망친다' 정도....? 넓적다리 살을 베어 문공에게 바쳤다는 갸륵한 일화도 실은 말이 안 되다. 사람이 그러고도 과연 살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과다 출혈이나 이차 감염 등으로 죽을 것 같은데 말이다. 

     

    면산에 있는 개자추의 묘라는 것도 진위가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사실 면산은 절벽으로 뒤덮인 산이라 불을 지르기도 적당치 않거니와, 개자추의 분묘 형식도 당대에 없던 봉분 묘이며 게다가 한대(漢代)의 아치형 벽돌무덤 형식이다. 물론 후대에 개축됐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묘(假墓)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사실 이게 맞는 말일 게다) 

     

     

    면산  개자추 의 묘 
    면산 가는 길
    개자추와 그 어미의 석상
    면산 전경/정과사는 도교사원이다. 
    기타 면산의 절들은 거의가 도교 사원이다.

     

    개자추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 전설의 기원은 진문공 대인 기원전 7세기가 아니라 이후 한대에 들어서였고,(봉분이 만들어진 시기와 일치함) 또 이 고사의 기원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개자추가 '은거하다 죽은 것'으로 나오며, 문공이 그를 찾다가 못 찾자 '면상(綿上)을 그의 전(田)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심재훈 저,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참조)

     

    위 책에 따르면 개자추의 '넓적다리 살'에 관한 일화 등도 <한시외전(漢詩外傳)>이나 <한서(漢書)> 등에 추가된 이야기이고, 면산 운운의 내용은 그보다 더 이후에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한서‘는 후한의 반고가 AD 90년경에 저술한 책이니 진문공 당대보다 무려 700년을 퇴행한 셈인데, 위 책의 저자인 심재훈 교수는 <좌전(춘추좌씨전)>의 짤막한 이야기를 토대로 살이 붙어 각색되다가 그보다도 200년 후인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정착됐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대-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중국 전역에서 만연된 고대 인물의 자취를 활용한 '역사 만들기'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아울러 저자는 오늘날 중국의 여러 지역에 복수로 남아 있는 전설시대의 인물, 즉 요·순·우임금 등과 관련된 지명이나 분묘 등의 흔적 역시 이러한 역사 만들기와 무관치 않을 것임을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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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