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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포는 왜 몰락했나?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0. 1. 10. 23:56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무장 중에서 최고의 싸움꾼을 꼽으라면 단연 여포(?-198)다. 그에 대한 손쉬운 증명으로서 흔히 들이대는 것이 호뢰관(虎牢關) 전투로, 이 싸움에서 여포는 유비 관우 장비 3형제와 3:1로 싸워 무승부를 이룬다. 누구나 삼국지 최고의 무장으로 여기는 관우와 장비가 힘을 합했음에도 여포를 누르지 못했다는 것인데, 게다가 당시 관우와 장비는 20대였고 여포는 30대였다.


    역사적으로 이 싸움이 진짜로 있었는지, 아니면 연의(三國志演義)에 재미로 끼워놓은 사건인지는 모르겠지만,(필시 후자겠지만) 이것이 픽션이라 하더라도 여포의 무용(武勇)은 반감되지 않는다. 나관중이 이 이야기를 만든 것은 관우, 장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포의 무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없다. 한가지 더 강조하자면 역사에 기록된 여포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꽃미남으로서, 185cm 신장의 헌헌 장부였다. 



    호뢰관 유지(遺址)와 황하


    호뢰관의 흔적

    호뢰관은 중원에서 서쪽 지방으로 나가는 첫번째 관문으로 지금의 하남성 형양현 사수진(汜水鎭) 근방에 있었다


    호뢰관 상상도

     청나라 때 세운 호뢰관 비석


    호뢰관 전투를 그린 <삼국지 연의>의 삽화

     

    청나라 때 그려진 책을 보는 여포의 초상화

    다른 그의 초상화에도 늘 방천화극과 활과 책이 함께 하는 바, 무용과 지혜를 겸비한 지용겸전의 무장임을 말해준다.


    고우영 화백이 그린 여포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무식하기 한량없다.


    여포의 무기 방천화극

    극(戟)은 원래 찌르는 용도의 과(戈)와 같은 무기인데, 여기에 월아(月我)를 얹음으로써 찌르고 벰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무기가 됐다.



    우리가 여포를 찌질이로 착각하기 쉬운 이유는 필시 작고하신 고우영 화백의 영향이 지대할 터, 그 양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포를 위와 같은 못난이로 그렸다. 하지만 역사에서 말하는 여포는 분명 출중한 영걸로서, '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고 말 중에는 적토가 있다'(人中有呂布 馬中有赤兎)는 표현은 여포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적토마 위에서 방천화극(方天畵戟)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는 그는 가히 천하제일의 무장이었는데, 더욱이 활 솜씨 또한 천하제일로서 '천자문'에는 아직도 그 전설이 남아 있다.


    ‘여포는 활을 잘 쏘았고 웅의료는 공을 잘 다뤘으며(射僚丸) 혜강은 칠현금 연주를 잘했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嵇琴阮嘯)’


    여기서 여포의 활솜씨에 관한 전설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비가 소패(小沛)에 있을 때 조조의 사주를 받은 원술이 쳐들어온다. 그러자 유비는 서주(徐州)의 여포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때 여포는 한판 붙기를 원하는 관우와 장비, 그리고 원술군의 장수 기령을 화해시키기 위해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한다.


      "내 방천화극을 여기서 150보 떨어진 군문(軍門)에 세울 터, 만일 내가 활로 그 화극 자루를 맞추면 천명(天命)이라고들 생각하고 서로 군대를 물리시오."


    아무리 활의 명수라 해도 설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기령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포는 화극 자루를 쏘아 맞추었던 바, 원술군은 결국 강화를 맺고 돌아가게 된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여포가 활솜씨뿐 아니라 지략까지 갖춘 인물임을 말해주는 예이다. 게다가 그는 진궁이라는 참모까지 두고 그의 계략에 따라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州)를 공격, 조조를 죽음 바로 직전까지 몰고 간 적이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었다. 그러나 여포는 하비(下邳) 전투에서 패하며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 이때의 죽음은 그의 화려한 일생에 비해 무척이나 허망하다.


    * 그는 특히 말 위에서 쏘는 활솜씨가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출신지인 오원군 구원현(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바오터우·包豆)이 부각되며 그가 흉노족 출신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꽤 타당성이 있다.



    하비성의 흔적

    여포가 죽은 하비성의 흔적이 2017년 11월, 강소성 서주 휴녕현에서 발굴됐다. 건안 3년(198) 조조 ·유비 연합군에 패한 여포는 이곳 하비성 백문루 위에서 목졸려 죽는다.


    하비성임을 증명한 전돌의 글씨

    하비성은 남송의 한세충이 금나라를 격퇴시킨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나 청대(淸代)에 멸실됐다.



    여포는 전투 중의 식사 후 잠시 졸다 부하 장수 위속과 송헌에게 붙잡혀 조조에게 넘겨진 것으로 돼 있다. 이때 여포는 마지막으로 목숨을 구걸해보지만, 양아버지인 정원과 동탁을 죽인 배신의 죄를 물은 유비와, 여포의 낭자야심(狼子野心, 길들여지지 않는 이리 새끼와 같은 야성)을 경계한 조조에 의해 결국 죽고 마는데, 천하제일의 무용과 지략을 겸비한 지용겸전(智勇兼全)의 그가 허망한 최후를 맞은 이유는 아래 만화 속의 대화로 축약된다. 





    사실 낭자야심이 있는 사람은 무리에 동화되기 힘들다. 그런 사람들은 조직생활보다는 자영업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혹간은 큰 회사의 오너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어 낭자야심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늘 조직의 뒤통수를 치는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서는 곤란하니, 그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해도 결국 천망(天網)을 벗어나지 못한다.


    <노자 도덕경>에 '천망회회 소의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라고 했다. 하늘의 그물은 (눈에 보이지 않아) 성기고 성긴 것 같지만 결코 놓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하늘의 그물은 사실 성겨 소소한 것들은 때때로 놓치기도 하는데,(일부러 놓아주는 것도 있겠지만) 큰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듯하다. 여포의 배신의 악업은 워낙에 큰 것이어서 천망의 큰 그물코조차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 주요 지명 보기



    그러나 세상의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사실 누구나 이런 실수는 한다. 목전에 큰 이익이 어른거리는데 모른 척 군자가 되기는 힘든 노릇이다.(여포가 눈 앞의 욕심에 병주자사 정원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포와 정원이 부자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사서든 연의든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장자>에 성왕패구(成王敗寇)란 말이 존재한다. 성공하면 왕이 되지만 실패하면 한낱 도적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 여포 역시 왕이 되고자 했음이었다.


    그런데 여포는 왜 왕이 되지 못했을까? 앞서 말한대로 배신의 아이콘으로서 세상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었을까? 크게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직접적인 사유는 보다 현실적인 데 있다.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는 것! 이것은 잘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여포 역시 낭야지심과 지용겸전의 자만심에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군사(軍師) 진궁의 마지막 계책인 기각지계(掎角之計)까지 저버림으로써 결국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게 된다.


    기각지계! 사슴을 잡는 방법과 같은 작전으로서 다리(掎)뿔(角)을 동시에 잡는다는 뜻이다. 즉 여포를 하비성 밖으로 내보내 적의 타깃에 되도록 만들고, 공격이 여포에게 집중될 때 다시 성의 주력군을 내보내 적의 후방을 때리면 적은 방향을 다시 앞으로 돌리게 된다. 그러면 여포는 적의 뒤쪽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이에 죽기로 싸우면 전후 협공으로써 적을 섬멸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이 포위된 합비성의 진궁이 내놓은 계책이었다. 하지만 여포는 결국 따르지 않았고, 진궁은 절망한다.


    그래도 진궁은 포기하지 않고 회남(淮南)의 원술에게 구원을 청해보나 이마저 유비군에게 차단당하고 결국 하비성은 함락되고 만다. 진궁은 여포와 함께 포로가 된 채 옛 동지였던 조조와 짧게나마 회포를 푼다.


      "진궁. 오랫만이군. 그래, 그간 잘 지냈는가? 내가 높은 곳에서 자네를 맞을지 몰랐네."


    둘은 지난 날 잠시 손을 잡았으나 조조의 잔인함을 깨달은 진궁은 그를 버리고 떠났던 바, 다분히 뒤끝이 묻어나는 조조의 물음이었다. 그러자 진궁이 담담히 답한다.


      "과거 여백사(呂伯奢)의 일로 당신을 버린 것은 지금도 후회가 없소. 머리가 나빠서 그렇지, 여포는 그래도 당신처럼 간교하진 않소."


      "그런데 왜 내게 붙잡혔느냐?"


      "방금 말했잖소? 옆에 있는 여포가 돌대가리라서 그리 됐다고. 여포가 처음부터 내 말을 따랐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나는 자리를 바꿔 앉았을 것이오. 허! 그렇고 말고. 설마하니 내 지모(智謀)가 조조 따위에 밀렸을라구?"


    그리고는 조조의 투항 제안을 거절하고 참수를 청하는데, 죽기 직전 잠시 산하를 굽어보던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강산이로다."



    드라마 <삼국지> 속의 진궁


    그는 여포의 꼴통짓을 몇 번이나 다그치며


    살 길을 뚫어보려 애쓰지만.....


    결국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만다.


    <연의> 속의 진궁



    여포가 몰락한 이유는 이제 분명해졌다. 주위에 좋은 조력자가 있었음에도 기어코 제 똥고집만을 부리다 마침내 망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여포가 죽자 조조는 다음 타깃으로 황제를 칭한 회남의 원술을 도모한다. 원술 역시 다른 사람 말 안 듣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였던 바, 수춘성 싸움에서 20만 대군이 패배하며 걸인보다도 못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다른 사람 말 안 듣는 건 그의 종형(從兄)인 원소도 못지 않았으니 서기 200년 관도(官渡) 싸움에서 조조의 7만 군사에게 70대군이 패퇴하며 명문거족이었던 원소의 가문 역시 저문다. 



    고향인 내몽골 자치구 포두(바오터우)에 세워진 여포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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