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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원장은 어떻게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나?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2. 8. 23. 05:09

     

    명태조 주원장은 1328년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잘 알려진 그대로 주원장의 어린 시절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으니, 전염병으로 부모 형제를 잃은 후 비렁뱅이 고아로 떠돌다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러다 스물다섯 무렵 자포자기의 심정으로서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마을을 휩쓸던 도적의 무리에 합류했는데 바로 홍건적이라는 무리였다.

     

    백련교라는 신흥종교에 뿌리를 둔 그들 홍건적의 무리는 세력이 커지며 어느덧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항하는 한족(漢族)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고, 그 무리 중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은 아예 왕을 칭하며 한족의 중원 수복 전쟁에 나섰다. 그러면서 군웅할거한 주변의 다른 무리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한편으로는 원나라를 공격해 몽골의 세력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낸 후,  1368년 1월 4일 스스로 황제에 올라 대명(大明)이라 하는 한족의 나라를 세웠다. 

     

    주원장은 건국 이후에도 다른 군웅들을 소탕하고 또한 원제국의 번왕들을 공격하였으니 1381년(명 홍무 14년)  12월 백석강(白石江) 전투에서 운남의 양왕을 패망시키며 한족에 의한 통일왕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주원장은 어떻게 비렁뱅이 고아에서 중원의 패자(覇者)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실에 주관적 관점을 추가해 요점정리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가 호구지책으로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간 때는 1344년으로 16살이 되던 해였다. 그는 황각사에서 행자(行者) 스님으로 생활했는데 말이 좋아 행자일 뿐 밥, 빨래와 청소부터 구걸 행각까지 갖은 노역은 다해야 하는 절의 노비와도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식은 밥 한 덩이라도 얻어먹기 위해서는 그 더러운 꼴을 참아내야 했는데, 하지만 그나마도 여의치 않았으니 어느 날 절에서도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전염병과 대기근으로 절 또한 긴축을 해야 했던 바, 절에서도 밥 한 끼를 줄이려 탁발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밖으로 내몬 것이었다.

     

    그는 합비를 시작으로 서쪽의 여러 땅들을 돌아다녔다. <명사(明史)>에는 그 3년의 시기를, "태조께서 서쪽으로 가서 합비에 이르렀고 광주, 고주, 여주, 영주 등의 여러 주를 편력하였다(太祖西至合淝 歷光 固 汝 潁諸州)"라고 간략히 피력했지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동반하였던 바, 3년 후 다시 황각사로 돌아온 것이 차라리 신기할 정도였다. <명사>는 이 구차하고 힘든 시간을 "3년 동안 기구하게 지내고 황각사에 되돌아왔다(崎嶇三載 仍還皇覺寺)"라는 말로 줄이고 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안휘성 봉양면의 용흥사 / 1352년 전쟁으로 황각사는 소실되었고, 황제가 된 주원장은 1383년에 황각사를 이곳으로 옮겨 대용흥사라는 이름으로 개창했다.
    봉양면 명황릉(明皇陵) 북쪽의 황각사 터 표석


    그는 황제가 된 후 이때를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고, 또한 모욕적인 시절이었다"고 회고한 것을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나를 알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다시 황각사로 다시 되돌아온 것은 그 3년 동안 달리 갈 곳을 찾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가 돌아온 때는 원나라 지정(至正) 12년(1352년) 중엽으로, 황각사의 중들은 그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어찌 됐든 살아돌아와 준 그에게 온 비로소 연기(緣起)를 느꼈던 듯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행복감도 잠시, 그해 황각사에 곽자흥(郭子興) 휘하의 홍건적들이 쳐들어왔다.  

     

    그 무렵  이미 원나라는 망해 가고 있었고 남쪽 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도적 떼와 반란군이 일어났다. 그중 도교에 바탕을 둔 홍건적의 무리가 가장 강했다. 황각사에 쳐들어온 홍건적은 호주(濠州)에서 봉기한 곽자흥의 무리였다. 홍건적들은 황각사를 노략질하고 절을 불태웠던 바, 갈 곳이 없어진 주원장은 홍건적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 25살 때의 일이었다. 

     
    말단 보졸(步卒)로 홍건적의 길에 들어선 주원장은 두어 달 만에 지휘자인 곽자흥 눈에 들었다. 황각사 시절의 어려움이 몸에 배서인지 주원장은 어떠한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전투에 임해서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용감하였으니 그 또한 절에서 익힌 사생관(死生觀)의 반영인 듯했다. 사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중국 학자 오함(吳晗)은 <주원장전>에서 이 무렵 주원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부지런하면서도 세심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또한 과감했다. 명령을 받으면 즉시 시행하였으며 마무리 또한 깔끔했다. 전투할 때는 다른 병졸보다 앞장을 섰고 전리품을 얻으면 자기가 취하지 않고 금은, 의복, 가축, 양식 등을 모두 원수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償)은, 실은 모두 동료들과 부하들의 덕분이라며 같이 싸웠던 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말을 하면 무게가 실렸다."

     

    그는 당연히 무리로부터 신망을 얻었고, 곽자흥은 그를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는 무척 못생긴 추남이었으니 지금 전해지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초상화 중에 (이  두 종류의 초상화는 지금도 진위를 다투고 있다)  아래 오른쪽의 존나 못생긴 초상화가 그의 얼굴이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마수영(馬秀英)이 증언한 바 있다.

     

    주원장이 마음에 든 곽자흥은 급기야 자신이 양녀 마수영을 내주며 사위로 삼았는데, 주원장은 첫날밤 전족(纏足)하지 않은 마수영의 커다란 발을 보고 크게 놀란다. 당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여자의 발을 어릴 적부터 옭아매 작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던 바, 여자의 큰 발은 흉이요, 놀람과 놀림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때 마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혼인을 했으니 당신도 내 발에 대해 흉을 잡지 말아 주세요."

     

     

    명태조 주원장의 두 종류의 초상화

     

    주원장은 평생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리고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황제에 오른 후에도 평생 황후를 폐하지 않고 오직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수영만을 정비(正妃)로 두었다. 당연히 그녀 또한 주원장을 위해 헌신했으니 초기 주원장의 권력과 지혜는 실상은 아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속 좁은 곽자흥이 주원장의 인기를 두려워해 트집을 잡아 옥에 가둬 죽이려 할 때 몰래 만두를 삶아 갖다 준 것도 그녀였다. 훗날 홍무제는 "그 뜨거운 만두에 마음을 데였다"고 술회하였다.

     

    마수영은  주원장과 30년을 함께하다가 홍무 1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인지한 후에는 오히려 약을 먹지 않았다. 조선도 마찬가지지만 왕과 왕비가 죽음을 맞이하면 어의(御醫)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화를 당했다. 마황후는 스스로의 병으로 인해 의원들이 화를 입게 될까 봐 일부러 약을 먹지 않은 배려심이 깊은 여인이었던 것이니, 그 지혜 또한 얼마나 깊었을지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어질고 지혜로웠던 마황후

     

    예전에 신용준·윤석일이 공동 저술한 <생존을 넘어 완생이 되는 직장인 생존전략. 인간관계가 답이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흔한 직장인 처세술서였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을 서술한 내면의 깊이가 느껴진 책으로 기억된다. 거기에는 (노골적으로) 오너에게 사랑받는 3가지 방법을 적었다. 

     

    첫째는 대신 책임을 지는 것이다.

    둘째는 조직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나쁜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셋째는 사적인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모두 힘든 일이고 성격에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상사들은 무척 좋아한다. 그들도 윗자리에 앉기 위해 거쳐온 과정이기도 하다. 조직의 실세에게는 위기 상황이 왔을 때 내 대신 책임을 져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 조직에서 윗자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고, 위기에서 지나갔을 때 책임을 대신 져 준 사람을 승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약속을 저버리고 팽개쳐지는 비정한 일도 없지 않지만 장치적, 역사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보면 궂은일을 해준 사람을 끝까지 믿고 가는 경우도 많다. 이것이 진심이든 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 행동이든 말이다. 여하튼 여기서는 직장 생활에서 궂은일을 대신하겠다는데 미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서 필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직장 속에서의 당신은 성과로만 기억된다"는 냉정함이다. 직장은 어디까지나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곳이니 때문인데, 그와 더불어 신속한 업무 처리를 강조한다. 

     

    수많은 업무 능력 중에서 단연 으뜸은 무엇일까? 내가 느끼기에는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리더십이 있는 사람들이 결국 인정받고 조직에서도 크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사의 입장에서 부하직원을 볼 때 가장 높이 평가하는 능력은 무엇일까? 기획력, 설득력, 영업력 등 다양한 능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상사들이 '신속함'을 높게 평가한다. 

     

     

    이 책은 본질, 관계, 정치, 수습으로 된 총 4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면에 있어 주원장은 그야말로 맞춤 표본이다. 그리고 그의 일화에서는 '어떻게 하면 빨리 망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 또한 나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원장은 1364년 호북성과 호남성을 점령하고 강서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나이 37세가 되던 그해 무왕(武王)으로 자립했다. 이제 원(元) 말의 군웅 가운데 왕(吳王) 장사성과 한왕(漢王) 진우량만이 그의 상대였다. 그때 주원장은 주위 사람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진우량을 먼저 공격해 멸망시켰는데, 그는 훗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장사성과 진우량이 나보다 강대했다. 오왕 장사성은 풍요로운 지방을 갖고 있었고, 한왕 진우량은 군사력이 강했다. 나는 이 두 가지 면에 모두 모자랐지만, 오직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말한 것을 지키며, 힘써 일하고, 모두 함께 같은 마음으로 협력함으로써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다. 이때 장사성은 금릉(남경)에 도읍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나와 가까웠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장사성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진우량은 뜻이 교만하고, 장사성은 그릇이 작았다. 교만한 사람은 그릇이 작은 사람보다 일찍 먼저 망하는 법, 나는 그래서 진우량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 자수성가한 인물이기에 주원장에 관한 일화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전한다. 우리에게는 국초의 조선을 무던히 괴롭힌 자라 극혐에 밉상이지만 (☞ '명태조 주원장은 제주도를 명나라 땅으로 생각했다') 기회가 나는 대로 몇 가지를 더 적으려 한다.

     

     

    주원장과 마황후의 남경 명효릉(明孝陵)
    효릉 최고의 건물인 명루(明樓) / 명루 계단을 올라가 볼 수 있는 산이 주원장의 무덤이다.
    주원장의 무덤을 볼 수 있는 명루의 옛 사진
    860명효릉의 상설 / 효릉은 홍무14년(1381년)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25년이 걸려 완공되었다.
    명효릉의 낙타 / 낙타는 명효릉에서 처음으로 출현했다고 함.
    낙타가 벌판에 서 있을 때
    코끼리가 벌판에 서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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