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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유명 환관들(II) ㅡ 청와대 비서실장과 국정원장을 겸한 환관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21. 9. 28. 08:36
앞서 말한 왕진의 경우는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환자(宦者)가 임금과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잘 보여준 예이다. 그런데 그와 이름이 비슷한 왕직(汪直)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 몇 대(代) 전의 일도 아닌 바로 전대(前代)인 아버지 영종 때의 비극이 그 아들 대에 되풀이됨이 차라리 신기하기까지 하다. 왕진의 국정 농단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기대가 클 환관 왕직에 대해 알아보자.
왕직은 헌종(명나라 8대 황제 성화제, 재위 1464-1487년) 때의 태감이었다. 태감이 환관의 우두머리 직함이라는 것과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가는 앞서 누누이 말한 바 있는데, 왕직의 경우는 그보다도 더 급이 높았다. 이유는 황제가 만든 비밀경찰 조직인 서창(西廠)의 우두머리를 겸했기 때문이니 요즘으로 치자면 청와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내곡동 국가정보원 원장을 겸임하는 것과 같다.(으~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끔찍하다)
왕직은 거기에 성격까지 사나웠다. 그럼에도 그는 헌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이는 황제 역시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왕직과 헌종은 코드가 맞고 죽밥이 맞는 사람이었으니 인사(人事)도 끼리끼리 했으며 그에 반대하는 충량지신(忠良之臣)은 서창을 통해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했다.
게다가 황제는 한술 더 떠 변태 취미까지 있었으니 주위 사방의 젊고 예쁜 후궁들을 젖혀두고 자신보다 19살이나 많은 만귀비(萬貴妃)만을 끼고 산 정도야 독특한 milf 취향으로 치부하더라도 방중술에 탐닉해 방사(方士)와 요승(妖僧)을 고관으로 등용시킴은 기괴함이 넘쳐나는 중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따라서 아버지 영종의 패가망신은 환관 왕진의 잘못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헌종의 패악은 스스로 개척한 면이 없잖았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 도처에 황장(皇莊, 황제의 정원)을 조성한 일로, 역사상 전례가 없던 그 장원들은 모두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만든 것이었다. 상황이 이와 같았던 바, 변방과 내지(內地)를 가리지 않고 도적떼가 들끓었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도적떼와 유민들의 대부분은 황제와 권문세가에게 집과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백성들이 원성이 높아지자 황제는 태감 왕직에게 독직(瀆職)의 죄를 씌워 파직시켰다. 그렇다고 나라가 깨끗해질 리 만무할 터, 새로운 태감 상명(尙銘)의 비리와 그가 관리한 비밀경찰 동창(東廠)은 왕직과 서창을 뺨칠 지경이었는데, 다행히도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말년에 대사증후군에 시달리던 만귀비는 (궁녀를 때리다) 혈압으로 쓰러져 죽었고, 이를 몹시 슬퍼하던 헌종도 시름시름 앓다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 말한 대로 만귀비는 헌종보다 19살이 위였으니 천수를 살다 간 셈이나, 말년의 늙고 뚱뚱한 만귀비를 애오라지 사랑하다 뒤를 따라간 헌종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연상의 여인을 변치 않고 사랑한 순애보의 표상일까, 아니면 그저 사이코일까, 혹은 만귀비가 남다른 방중술을 터득했던 것일까?
위충현(魏忠賢)은 희종(명나라 15대 황제 천계제, 재위 1620-1627년) 때 태감을 지낸 자로 역사상 가장 권력이 강했던 환관으로 알려져 있다. 전에 이 말을 듣고 관심이 동(動)해 그에 관한 책을 구해 읽은 적이 있는데 과연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적으려면 한없을 것 같은 바, 최대한 드라이(dry)하게 축약해 보도록 하겠다. 위충현은 내시가 된 후 개명한 이름으로 젊었을 때의 이름은 이진충(李進忠)이다.(그래서 혼용될 수도 있다는 말씀!)
이진충의 고향은 북직례(北直隸, 현 허베이성)로 젊어서는 거의 건달로서 세월을 보냈는데, 그 필수 코스인 노름판을 전전하다 빚을 잔뜩 지게 되었다. 그쪽 세계는 고금(古今)이 같은 지 조폭들에게 쫓기던 그는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고, 이에 조폭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곳은 지옥과 건청궁(乾淸宮, 명나라의 궁궐)으로, 지옥으로 가는 방법은 스스로 목을 매다는 것이었고, 건천궁으로 가는 방법은 스스로 거세해 내시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 쪽도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승을 선택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남자가 거세되었다고 모두 환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 또한 좁은 문이었다. 또 요즘처럼 의료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거세를 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10명 중 8명은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살았고, 또 파락호 시절에 알던 그렇고 그런 사이의 주모 한 명이 후궁의 시녀로서 입궁하였던 바, 곁에 묻어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후궁의 아들을 돌보는 내시가 되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주유교(朱由校)로 훗날 명 희종 천계제가 되는 사람이다.
주유교는 황손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로 이유로 황위(皇位)와 배제돼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글도 배우지 않고 궁궐의 목수들을 따라다니며 놀았는데, 그러면서 어깨너머로 익힌 것이 있었는지 목공 솜씨가 기가 막혀 목수들이 신기(神技)라며 놀랄 지경이었다. 그런 칭찬을 받고 자라서인지 주유교는 더욱 목공일에 탐닉했으니 그가 만든 건천궁의 미니어처는 궁내에서 전시될 정도였고, 그가 만든 침대는 길이와 각도 조절이 자유로운 획기적인 것이어서 가히 침대가 아니라 과학이라 부를 만했다.
위충현 역시 주유교의 솜씨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주유교는 그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저 환관들의 입에 발린 아첨 정도로 여겼다. 그러자 위충현은 주유교가 만든 물건들을 저잣거리에 나가 비싼 값에 팔아오겠노라며 들고나갔는데 정말로 그날 저녁 제법 많은 돈을 가지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다지 돈이 필요 없는 주유교였으나 그날 이후 그는 더욱 목공일에 매달렸고, 그렇게 만든 물건은 또 위충현이 돈으로 바꿔왔다. 그리고 물건이 팔리지 않는 날에는 제 주머니를 털었는데, 주유교에게 아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기뻐하는 모습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관계는 이렇듯 진정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유교의 아버지 주상락이 황제에 오르나 싶더니(광종 태창제) 다시 한 달 후 주유교가 황제(희종 천계제)가 되었다.(1620년) 광종이 즉위 29일 만에 급서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주유교는 황제가 된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으니 글을 모르는 그로서는 문서에 결재하는 일조차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문서야 남들이 읽어준다지만 사인은 제 손으로 해야 했기 때문이었으니, 그는 이후로 모든 결재를 위충현에게 맡기고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목공일에 매달렸다.
그가 존재를 인정받을 때는 궁궐 건축 공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때 불쑥불쑥 나타난 황제는 마치 노가다 십장처럼 현장을 지휘해 목수들을 진땀 나게 만들었는데, 때로는 직접 끌, 망치 등을 들고 공포(栱包)와 창방을 깎거나 조각을 새겨 넣기도 했다. 희종은 침전에까지 각종 목재가 쌓였던 바, 때로는 밤을 새워 무언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신이나서 무언가를 만들 때면 가히 삼매경에 빠진 듯하였고, 다른 신하들은 물론이요 태감 위충현이 찾아오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위충현은 본의 아니게 황제에 버금가는 위치가 되었다. 다행히 젊어서 과거 시험에 잠시 뜻을 둔 적이 있어 글씨와 문장은 어느 정도 가능했는데, 그보다는 건달 시절 이런저런 놈들을 겪으며 익힌 사람 다루는 기술이 능해 국정을 이끎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말랑말랑한 백면서생들을 휘어잡는 지경이었다. 문제는 그의 파락호 기질이었으니, 권세를 잡은 그에게서 예전의 기질이 발휘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뇌물은 당연한 일이었고, 과중한 부세(賦稅)와 매관매직 등의 수단으로 막대한 재산을 치부한 위충현은 성화제 이후 폐지되었던 비밀경찰 창위(廠衛), 즉 동창을 부활시켜 동림당(東林黨) 등의 반대세력을 숙청하였고, 더 나아가 동창을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1624년에 이르러서는 나라 전체를 망라하는 첩보망을 구축하였으며 국정 전체를 관장하는 환관 부대를 만들어 정사를 펼쳤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정원을 장악했음은 물론 청와대 수석비서관실과 정책실에 모두 환관을 기용한 것이었다.
~ 요즘도 가끔 청와대 수석을 환관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고, 실제로 몇몇 사람들은 권한 남용으로써 감옥에 가기도 했으며 여태껏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 대기 중인 사람도 있다. 물론 재판이 끝나 봐야 알겠지만.....
이제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된 위충현은 전국 각지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게 했고 (살아 있는 자의) 사당이 건립되었다.(그가 직접 명령했다기보다는 주위의 아첨꾼들이 앞장서서 벌인 일들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하여 위충현은 공자와도 맞먹는 급이 되었으니 유교적 이상주의의 실현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동림당 무리들이 알면 입에 거품을 물었겠지만 동림당 관료들은 모두가 처형하거나 유배된 상태였던 바, 시끄러울 일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생각 외로 오래가지 못했다. 1627년 종기에 시달리던 천계제가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급사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위충현의 삶도 그것으로 끝이 났으니 새로운 황제(숭정제)가 즉위하자 스스로 목을 매었다. 붙잡혀 능지처참형(조금씩 살을 발라 죽이는 형벌)형 같은 것을 당하느니 목을 매는 편이 훨씬 낫다 여긴 것이었다. 그는 시체는 걸형(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지만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 터, 죽을 때까지 잔머리는 빛났다 할까.....
아울러, 기울어가던 명나라도 그로부터 17년 후 결국 멸망하고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역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안덕해와 이연영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뒤로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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