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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해녀 항일운동
    탐라의 재발견 2022. 11. 14. 08:48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은 1930년대 성산과 우도, 구좌의 해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생존권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운동이다. 제주의 동부 지역에서 해녀 항일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우선 이 지역에 해녀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로 생계를 영위하는 인구가 대부분이어서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물질을 배웠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서는 이곳 해녀들의 남다른 의식수준을 들 수 있을 것이니, 해녀들이 배움의 기회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지역의 지식인 청년들이 보통학교에 야학 강습소를 개설해 당시의 해녀들을 공부시킨 바 있었다.

     

     

    우도 천진항의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와 해녀상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뒤에 세워진 김찬흡 선생 송덕비 / 제주대 1회 졸업생인 김찬흡은 애월상고를 시작으로 평생을 가르침에 매달렸으며 구좌읍 연평중학교 교장 시절에서는 해녀들을 비롯한 지역주민의 교육에도 힘썼다.

     

    이들 해녀들은 한글과 우리 역사, 산수, 사회 등을 공부하며 청년 지식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전수받았다. 아울러 실질적인 지식도 습득하였던 바, 이를테면 저울 눈금 보는 법 같은 것이었다. 일본인 상인들로부터 채취한 해산물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받기 위한 공부였다. 당시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에 앞장선 부춘화 · 김옥련 · 부덕량 등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1기 졸업생들이었다.

     

     

    하도강습소 제1기 졸업기념 사진
    하도초등학교 야학강습소 터

     

    그럼에도 그들 해녀들은 일본인과 결탁한 해녀조합에 판판이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자 1930년 성산포에서 일어난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부당 매입에 하도리의 지식 청년들이 직접 나서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들이 모두 일본 경찰에 검거되자 마침내 지역 해녀들이 들고일어나 당국에 저항하였다. 이것이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발단이었다. 

     

    *  해녀조합(정식명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은 1920년 제주도 관내의 해녀들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해녀 조합이 하는 일은 채취물의 중개 및 공동판매, 자금 융통 등 선의의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바, 8천 명이 넘는 해녀들이 조합에 가입했고, 초기에는 실제로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1930년에 즈음해서는 변질되어 오히려 해녀들의 권익을 가로막는 기구가 되었으니 일본 상인 및 일본해조회사와 결탁해 해녀들을 수탈하였다.

     

    당시의 유통구조는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해녀조합을 통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조회사에 판매하게끔 되어 있었는데, 이때 수익의 절반을 회사가 수수료로 떼어갔고, 또 1/5을 해녀조합이 수수료로 떼어갔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해녀조합비, 거래상인 임금 등을 지불해야 했던 바, 해녀의 수입은 실제 물건가의 1/5에도 못 미치었다. 더불어 조합과 해조회사는 채취한 해산물에 대한 가격을 처음부터 시세의 반 정도로 지정해 제도적 폭리를 취했다.  

     

    이후 해녀들은 지역 단위로 해녀회를 조직해 해녀조합을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1년 6월 하도리 해녀들이 채취물에 대한 조합 측의 부당 매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예상치 못한 시위에 놀란 조합 측은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 뿐으로 몇 달이 지나도록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하도리 해녀들은 실력 행사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고 각 지역 해녀회에 하도리 해녀회의 의지를 전달했다.

     

     

    구좌 해도 어촌계의 해녀들 / 최근 사진임

     

    그리고 1931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들과 각 지역 대표들이 모여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제’ 등의 8개조 요구조건을 확정하고, 즉각 해녀조합 사무소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했다. 그들은 육로를 택할 경우 경찰들의 제지를 받을 것을 우려해 발동기선을 이용해 제주읍으로 향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제주읍에 닿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결국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1932년 1월 7일 하도리에 모인 해녀 3백여 명은 세화리 5일장 날 다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육로로 제주읍을 향해 나아갔는데 중도에서 지역민들과 회합을 가지며 그들의 뜻에 동조하는 해녀들로 점점 세가 불어나다. 그리하여 시위 행렬이 구좌면에 이르렀을 때는 시위대의 규모가 상당하였으니 이에 당황한 면장이 8개조 요구조건의 해결을 약속하고 나섰다. 해녀들은 이 약속을 믿고 다시 해산했다. 

     

     

    구좌면사무소 / 1960년 사진

     

    하지만 이 약속 역시 지켜지지 않았던 바, 분노한 해녀들은 낫과 빗창(해녀들의 채취도구)으로 무장을 하고 1932년 1월 12일 세화리 주재소 앞에 모여 초속 8미터가 넘는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날은 해녀조합의 강제 지정 판매지정가 행해지는 날인 데다가 마침 새로 부임한 제주도사 겸 해녀조합장인 타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세화리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해녀들은 타구치가 탄 차량을 포위하고 정상가 매입 등의 요구조건을 외쳤고, 이에 놀란 다구치는 급히 해녀대표와 담판한 뒤 그들의 요구조건을 5일 안에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물러났다.  

     

     

    구좌읍 상도리의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그러나 타구치(아래 사진)는 해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그들을 가르쳤던 지식 청년들을 배후로 몰아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이 검거되었는데, 이에 격분한 백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 주재소로 몰려들어 격렬히 항의했다.

     

     

    1932년 1월 12일 다쿠치 제주도사에게 항의시위를 벌였던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사 / 1. 16. 조선일보
    세화지서 옛터. 지금의 구좌파출소 / 제주투데이 사진
    세화리예술제 항쟁 재현 거리 행진 /  제주투데이 사진

     

    해녀들의 힘을 이기지 못한 주재소 순사들은 각지에 급보를 전했다. 이에 제주읍을 비롯한 각지의 무장경찰들이 출동하였고 그 자리에서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 명이 붙잡히며 시위는 해산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1월 27일에는 다시 해녀 100여 명이 몰려들어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들 100여 명은 모두 체포되었고, 이중 주동자로 분류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 김계석 등이 투옥되며 세가 꺾이고 말았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해녀 3인 / 왼쪽부터 김옥련(1910년 출생) 부춘화(1908년 출생) 부덕량(1911년 출생)

     

    그러나 이것으로 해녀들의 항일 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해녀들은 각  마을의 해녀회를 중심으로 다시 투쟁을 이어나갔으니 종달리, 세화리, 우도 연평리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는데, 이들 제주해녀들의 항일운동은 단순 생존권 투쟁을 넘어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도 천진항의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 우도 천진항 해녀항일투쟁기념비에는 우도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마을 지식인 청년이자 아나키스트계 독립운동가 강관순이 지었다는 '해녀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강관순에게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

     

     

    해녀의 노래 비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에 물결 우에 시달리던 이 내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주면서 저녁밥을 짓는다

    하루 종일 하였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근심으로 잠도 안 오네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코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 세고 물결 센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가요

     

    배움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은 착취기관 설치해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천진항에서 본 바다
    연평리에서 본 성산 일출봉
    천진항 등대
    성산포에서 본 한라산
    성산 일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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