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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의 고인돌
    탐라의 재발견 2024. 4. 27. 06:15

     
    우리나라가 '고인돌 왕국'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로, 전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이 한반도에 위치한다. 전체적으로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을 비롯한 유럽과 서아프리카, 서아시아, 동아시아 등지에 8만여 기가 분포하는데, 특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남만주 지역과 일본의 규슈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밀집해 있다. 그중 남한에서 확인된 것만 3만 5000기가 넘는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돌멘(dolmen)
    아일랜드 버른 지방의 폴나브론 돌멘(Poulnabrone Dolmen) / '슬픔의 구멍'이라는 뜻을 지닌 이 고인돌은 우리나라 북방식 고인돌과 꼭 닮았다.

     
    대충 짚더라도 북으로는 휴전선 근방인 연천, 양구, 철원 등지에서 고인돌 무리를 찾을 수 있고, 강화, 인천, 용인 등지를 거쳐 전북 고창에서도 한 무리가 출현하며, 다시 광주와 대구, 전남 화순, 포항, 김해 등에서도 한 무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이한 돌은 바다를 건너 완도에서도 무리로 나타나고, 제주도에서도 여기저기 무리로, 또는 홀로 출현한다. '고인돌 왕국'이 아니라 '고인돌 제국(Dolmen Empire)'이라 불려야 마땅할 듯싶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그 지역을 관할하는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고인돌이라는 표현을 논문에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는 한흥수(1909~?)로, 일제강점기에 유럽으로 건너가 고고학을 전공한 국내 1호 고고학자이다. 그는 일본에서 사용하는 지석묘(支石墓) 대신 고인돌이라는 예쁜 우리말 용어를 만들어 냈던 바, 물어보나 마나 (큰) 돌이 (작은 돌에) 고여 있는 형태에서 착안하였을 것이다.
     
     

    중국 요녕성 개주시 석붕산 고인돌
    연천 고인돌공원의 탁자식 고인돌
    강화역사박물관 앞의 탁자식 고인돌

     
    그는 이미 죽었고, 또 죽기 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던지라 사실 물어볼 길은 없다. 아무튼 그 까닭에 북한에서는 진즉부터 고인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지석묘와 고인돌이 혼용된다. 한흥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수학한 후 스위스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함께 고인돌을 연구한 도유호(1905~1982)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수학 후 비엔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월북했다. 
     
    한국에서 고인돌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이유는 한흥수, 도유호와 함께 고인돌을 연구한 인문학자 손진태(1908~2005)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지석묘보다는 고인돌이 어감도 좋고 의미전달도 잘된다. 참고로 지석묘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표기다.  
     
     

    1966년 러시아어 잡지 <새조선> 9월호에 실린 도유호 / 한흥수는 진즉에 숙청되었으며, 도유호도 60년대 후반 함경북도 회령 탄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반드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앞서 말한 대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그 지역을 관할하는 유력자의 무덤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예전 서울 암사동의 암사선사유적지를 정비할 때, 그 입구에 고인돌 형태의 커다란 FRP 대문을 만들었다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철거해야 했다. "신석기시대 유적지에 웬 청동기시대 무덤이냐"라는 지적에 급작스레 철거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하려는 제주도의 고인돌은 이와 같은 시대 규정에서 벗어난다. 제주도의 고인돌은 만주나 한반도와 달리 청동기시대가 아닌 1~3세기 탐라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유산이다. 섬나라인 관계로 이 거석문화가 뒤늦게 도달했음인데, 제주도의 특질을 한껏 살려 바닷속에 만들어진 현무암 고인돌도 있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 조간대(潮間帶)의 고인돌이 그것으로, 세계 유일의 해중(海中) 고인돌로 알려진 휘귀한 놈이다.  
     
    또 다른 지역명을 따라 관전동 고인돌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놈은 조간대에 위치한 관계로 썰물 때만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 완전한 모습을 알현하기가 하루 3~4시간이 전부인 귀하신 몸이나 1997년 방송 촬영 중 우연히 발견된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안내판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자연석인지 진짜 선사시대의 것인지, 혹은 후대인이 만든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문화재적 가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인데, 지금도 그대로인지 (혹은 보호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더불어 애월읍 광령리의 밭 한가운데도 여러 기의 고인돌 무리가 존재하는데, 이놈들은 철책으로 잘 보존돼 있고 안내판도 서 있다. 1세기 초기 철기시대의 것이다. 
     

    관전동 해중 고인돌 / 미디어제주 사진

     
    제주시의 고인돌은 용담동과 외동에도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군집이 있어 관심 있는 사람에게 한해 제주 여행의 보너스를 선사한다. 마음먹고 찾으면 20개 이상 발견할 수 있다. 앞서도 소개한 바 있는 제주 삼양동유적전시관 마당의 남방형 고인돌도 주변의 선사유적과 함께 주목할만하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아니면 옮겨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제주공항 마당에 있는 2기의 넓데데한 고인돌도 찾아봄직하다.  
     
     

    용담동 2631-1의 바다거북 형태의 고인돌 / 미디어제주 사진
    아슬아슬한 형태의 외도동 2호 고인돌
    외도동 선사인류의 생활터전이 되었을 외도천
    제주 삼양동유적전시관 마당의 남방형 고인돌/ 도련동 689번지 밭에 있던 것을 2005년 옮겨왔다. 장축 323cm, 단축 296cm, 두께 40~80cm이다.
    전시관 마당에 재현된 움집과 당대 사람들
    삼양동 선사인류가 사용했던 구리거울, 옥팔찌, 구리검(파편)
    삼양동 선사인류가 사용했던 간돌검 / 기원전 1세기 초기 철기시대의 것이다.
    삼양동 선사인류의 생활터전이 되었을 삼양동 앞바다

     
    제주도에서 가장 남쪽인 색달동과 예래동에도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다. 서귀포시 색달동 1호 고인돌은 대로변에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으나 색달동 2호 고인돌은 예래동 앞바다에서부터 색달동 실탄사격장까지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막연히 헤맸던 것은 아니고 예래동 비탈이 끝나는 상부 지점에 있는 낡은 표지판을 보고 간 것인데, 결국 찾지 못했다. 중간에 어느 슈퍼에 들러 커피를 사며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늙은이 초입에 들어선 엄청 불친절한 주인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서귀포시 색달동 1호 고인돌 / 크기는 장축 315cm, 단축 275cm, 두께 35~75cm로 큰 편이다.

     
    상예동 1호 고인돌은 상예동 1514번지 난이머들(지명) 귤밭 가운데에서 확인했으나 찾기는 역시 쉽지 않다. 타인의 귤밭을 무단으로 지나가야 하니 눈치도 보인다. 하지만 3기가 1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삼각 형태로 놓여져 있어 1타3피의 행운을 누릴 수 있다. 4호는 찾지 못했고, 5호는 예래동 주택가 골목길에서 우연찮게 발견했는데, 돌담 모서리돌로 쓰여 쉽게 식별이 안 되지만, 그 앞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발견이 가능했다. 안내판의 글자가 거의 지워져 있었으나, 그나마 이것이 있어 찾았지 지나칠 뻔했다.  
     
     

    상예동 1호 고인돌 / 장축 310cm, 단축 235cm, 두께 105cm이다.
    덮개돌에 5~6개의 성혈이 있다. / 고인돌 내부에서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상예동 5호 고인돌
    이상 사진과 크기 설명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도움을 받았는데, 상예동 5호 고인돌에 대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다.

     
    신기하게도 우도에도 고인돌이 있다. 우도의 지배자 무덤이었을 우도 고인돌은 단 1기로 성산 일출봉이 내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천진항에서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약 450m 지점에 있는 고인돌은 1986년 발견 당시는 해안 비탈면에 있었으나 이후 해안도로가 확장되며 지금은 도로 한가운데 놓였다. 그래서 위치가 어정쩡해졌는데 그래도 원래를 자리가 고수되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축조시기는 탐라시대 전기(AD 1세기)로 추정되며 규모는 우도에 걸맞게 그리 크지 않다.(장축 200cm, 단축 150cm, 두께 60cm 내외) 발견 당시  동쪽 언덕서도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  2기가 추가로 발견되었으나 관전동 고인돌처럼 문화재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탓에 방치돼 있다.
     
     

    우도 고인돌
    부근의 후해석벽
    멀리 보이는 성산 일출봉
    부근의 한반도여(礖) / 물이 빠지면 한반도 형태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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