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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의 얼, 북두칠성(II)
    거꾸로 읽는 천문학개론 2018. 4. 28. 04:13


    이상 고구려 벽화의 북두칠성은 고려의 벽화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바, 이 별자리에 대한 공통된 인식의 전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고려시대 천문도 역시 현존하는 여러 고분 벽화를 통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현재까지 별자리 그림이 확인된 고려시대 고분으로는 정종의 안릉(安陵, 949), 문종의 경릉(景陵, 1083), 서삼동(西三洞) 고분(12세기 초), 신종의 양릉(陽陵, 1204), 원종의 소릉(韶陵, 1274), 충목왕의 명릉(明陵, 1349), 칠릉(七陵), 서곡리(瑞谷里) 벽화묘(1352), 공민왕의 현릉(玄陵, 1365) 등이 있다.


    위 대부분의 고분은 북한 개성 부근에 있다. 따라서 남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별자리 고분은 많지 않은데, 경상북도 안동 서삼동의 서삼동 고분과 경기도 파주의 서곡리 벽화 무덤이 전부다. 하지만 이 두 기의 무덤에서도 고구려의 천문 전통이 확실히 드러나는 바, 특히 서삼동 무덤에서는 북두칠성과 앞서 다카마츠 고분에서 나타난 28수(宿)의 별자리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서곡리 벽화묘에서는 북두칠성과, 더불어 드물게도 오리온 좌의 삼태성이 확인되었다.


    서삼동 고분 벽화는 청록색 천장 안쪽에 짙은 푸른색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붉은색으로 별을 그려 넣어 청록색과 붉은색의 강한 색조 대비가 눈에 띈다. 말한 대로 원의 한가운데에는 전통적 별자리인 북두칠성이, 그 양쪽에는 해와 달로 추정되는 큰 별이 한 개씩 그려져 있는 바, 이 역시 고구려의 표현 양식이 계승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100개가 넘는 많은 별이 둥그렇게 둘러져 있는 바, 고려의 천체 관측 확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안동시 서삼동 천문도. 가운데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다. 


    천문도가 발견된 서삼동 고분


    사신도 등도 함께 발견됐다.(출처: 안동대학교 발굴 보고서)


    북두칠성과 삼태성을 그린 서곡리 무덤(출처: 우리역사넷) 



    조선시대의 천문도에 관해서는 앞서 '천상열차분야지도'로서 그 우수성을 증명했는데, 여기서도 북두칠성 및 남두육성은 정확한 위치에 당연히 표시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던 바, 당시 활약한 천문학자 중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두 사람의 이름은 꼭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순지가 만든 천문도인 '천문의상(天文儀象)'과 관계 문헌인 '제가역상집' 4권 4책(1445년)은 당대 최고의 천문학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김담이 만든 천문도는 천재의 역작으로 불린다. 유명한 역법서(曆法書) '칠정산(七政散)'은 두 사람이 함께 편찬한 책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자세한 내용은 '인류 최초의 천문기록, 우리나라 고인돌참조)


    국립고궁박물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출처: KBS)


    세종대왕릉의 복제본(출처: 블로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정평공 이순지 영정(1406-1465)


    일본에서 방영된 KBS 드라마 '대왕세종' 속의 이순지  


    한양의 북극출지(위도)를 묻는 세종의 질문에 38도 4분 1초라고 답하고 있다. 이순지는 지동설도 주장하였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보다도 100년 앞선 일이었다.


    이순지의 '제가역상집'(출처: 서울 역사박물관)


    이순지의 '천문유초'(출처: 오마이뉴스)

    '천문유초'에 수록된 천문도. 북두칠성을 비롯, 북극을 중심으로 한 북반구의 별자리를 그렸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이순지 묘소(출처: 문화재청)


    김담의 천문도 


    김담과 이순지가 함께 편찬한 칠정산.

    내·외편이 있는데, 내편에는 태양과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7개 천체의 움직임, 즉 '칠정'을 기술했으며, 권말에는 1년을 365일 2,425분으로 규정한 천체력을 실었다.(출처: 우리역사넷) 


    문절공 김담의 영정 봉안식인 고유제 광경(출처: 한국일보)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로 상기해 볼 사람은 홍대용이다. 그는 실학 전성기의 독보적인 과학자로서 그의 천재성과 생의 기구함, 당대 사회상의 너절함을 본인의 필설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바, 어쩔 수없이 '다음 백과'에 소개된 이이화 선생의 글을 빌려왔다.('다음 백과'에 양해를 구하며, 이이화 선생님께서는 지역 선배로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쑵니다 ^^) 



    박지원은 홍대용의 빈소 앞에서 술이 곤드레가 되어 있었다. 통곡하다가도 술 사발을 당겨 마셔대곤 했다. 이런 그에게 상주는 망인의 묘지명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써갈겨댔다.


    아, 슬프다. 덕보(德保, 홍대용의 자)는 툭 트이고 민첩하며 겸손하고 아담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며······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해 그의 학설이 오묘하고 깊었다.....

    이렇게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행적을 써내려갔는데, 이 글이 바로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이라는 글로 천하의 명문으로 꼽힌다. 평소의 지기에 대한 행적을 썼으니 심정에서 우러나온 글이 되었으리라. 박지원은 묘지명의 격식을 무시하고 에세이 쓰듯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박지원이 가장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홍대용의 과학사상 중에서도 지구의 자전설이다. 홍대용이 주장한 ‘지전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박지원이 그 설의 심오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여러 전적을 참고해 스스로 얻어낸 결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것이다. 이 설은 실로 그의 오랜 탐구와 관찰에서 나왔다. 그는 지구의 둘레는 9만 리인데 하루 12시간 동안 한 번 돈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 지구가 돌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보다 앞서 이익 등이 이것을 주장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765년 그는 작은아버지 홍억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 실무 책임자)으로 청나라에 갈 적에 자청해 자재군관이라는 무관의 직책으로 따라갔다. 그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북경에서 청나라의 과학자들을 만나 지구의 자전설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이론을 듣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리하여 홍대용의 ‘지전설’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홍대용이 1766년 중국 북경에 60여 일간 머물 때 사귄 중국인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

     

    홍대용이 방문하고 감격한 북경 천문대. 하지만 당시 지구의 자전을 생각한 중국이나 일본의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북경에서 그는 유리창(과학기재나 고서적 · 골동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들러 열심히 새로운 기구들을 관찰했다. 그가 이곳에 많은 흥미를 느끼며 관찰에 열중하자, 중국의 지식인들인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 같은 인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자연스레 어울려 필담을 주고받았고, 유리창 옆 전당에 있는 엄성의 집으로 몰려가 밤새는 줄 모르며 학문과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어도 홍대용이 북경에 머문 3개월 동안, 이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이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눌 적에는 어찌나 서로 정이 들었는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계 선교사인 할러슈타인[중국명 유송령(劉松齡)]을 만났다. 할러슈타인은 당시 청나라의 천문대인 흔천감정(欽天監正)으로 초빙되어 있었다. 이들은 필담으로 많은 질문과 토론을 벌였다. 이 만남은 홍대용의 천문학 지식은 물론 서양의 과학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박지원이 사신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갈 적에 홍대용은 박지원에게 이들을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었다. 이렇게 서로 친구들을 소개한 탓으로 이들 사이에는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이 이루어졌다. 엄성이 먼저 죽자 그의 친구 반정균은 조선에 있는 홍대용에게 부고를 했다. 홍대용이 죽자 박지원은 반정균에게 부고를 했다. 죽은 뒤에도 이렇게 나라를 넘나드는 우정은 끊어질 줄 몰랐다.

    그러면 이들의 우정은 어찌하여 이토록 돈독했던가? 바로 시대의 모순을 서로 겪으면서 개혁의지에 불타고 있던 지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 높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낙백한 삶을 살고 있었다.


    [Daum백과] 홍대용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경에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대용이 북경에 와보지도 않고 지전설을 주장했으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에는 박지원 같은 지기들이나 귀를 기울이고 알아주었을 뿐 조정 대신들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지구가 돌면 어쨌다는 거냐?”라거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설)은 만고의 진리인데 한낱 괴담을 늘어놓는다”고 나무라면서 욕질만 했을 뿐이다. 진리를 찾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외로운 법이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세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학탐구에 생애를 바쳤다.



    [Daum백과] 홍대용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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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의 처지는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홍대용은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부모의 권유로 몇 번 과거를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도통 과거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과학 서적만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대로 갖지 않아 무척이나 가난했다. 어머니는 일흔이 되었는데 조석 끼니조차 제대로 봉양하지 못할 처지였다.

    그는 아버지가 목사를 지내고 할아버지 홍용조가 대사간을 지낸 후광에 힘입어 음직(蔭職, 높은 벼슬아치의 자손에게 과거를 거치지 않고 내리는 벼슬자리)으로 하찮은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을 얻었고 이 무렵 동궁을 가르치는 시직(侍直)이라는 벼슬이 내려지자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의 심경을 뒷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태인현감과 영천군수 같은 고을 원이 되어 일선행정을 몸소 시행해보았다. 그는 현실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나라는 본래 명분을 중히 여기어 양반붙이는 빌어먹게 되어도 팔짱끼고 편안히 앉아서 보삽조차 잡지 아니하며, 더러 실(實)에 힘써 부지런히 일하거나 비천한 일 따위를 달게 하는 자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모두 비웃고 천대해 종처럼 본다. 이 까닭에 놀고먹는 자가 많고 생산하는 자는 적다. 마땅히 법을 엄하게 세워 사민에 속하지 않고 놀며 입고 놀며 먹는 자는 관에서 형벌로 다스려야 하며 재주 있고 학문이 있으면 농사꾼이나 장사치의 자식이 벼슬자리에 앉아도 참람함이 없고, 재주 없고 학문이 없으면 높은 벼슬아치의 자식을 하인으로 돌리더라도 한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임하경륜》

    이러한 견해를 가진 그는 고을 원 노릇을 하면서 실천에 옮겨보려 했지만 일개 지방관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는 현실에 부딪치면서 실망만을 거듭했다. 한때 그가 가르치던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권신 홍국영의 발호도 목격했다. 그는 어머니의 병을 핑계로 벼슬살이에서 물러나왔다. 10여 년 남짓 외도를 한 셈이다.

    홍대용은 새로운 마음으로 고향 청주로 돌아와 못다 한 과학기술의 저술에 몰두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현실개혁에 대한 방안도 정리했다. 그의 개혁책은 여러 방면에 걸쳐 있으나 여기서는 대표적인 한 가지만을 살펴보자. 그는 토지의 고른 분배를 위해 균전법(均田法)을 주장했다. 기혼 남자에게 각각 토지 2결을 주고 농사를 짓게 하되 팔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으나 하늘은 그에게 수명을 더 주지 않았다. 벼슬살이에서 물러난 지 1년도 못 되어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유언 한 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이상 '다음백과')


    나라가 이런 꼴이었던 바, 결국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이유는 과학, 즉 실사구시를 멀리 하고 허례허식을 가까이 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망국의 길목에서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출현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으니 바로 안중근(1879-1910)이었다. 그는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선진교육을 등한시한 때문이라 여겨 1906년 평안도 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천주교 계열인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였으나, 그것이 너무 늦다는 생각에 결국 무장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1907년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8년 특파독립대장 겸 러시아 지구군사령관으로서,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시켰다. 이어 1909년 만주 하얼빈에 잠입,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다지기 위해 러시아 내무부 장관 코코프체프를 만나러 온 이또 히로부미를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였다. 그 역사적 쾌거를 이룬 안중근 의사의 아명(兒名)과 자(字)가 응칠(應七)이다. 태어날 때 배에 7개의 점이 있었으므로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난 아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견강부회라 할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저 북두칠성의 민족적 정기를 이어받아 이룬 쾌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여순 감옥에 수감된 그 해 12월 13일부터 이듬해인 1910년 3월 15일까지 자서전격인 옥중 수기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를 쓰고 그해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과거 오만원권 발행이 예정돼 있을 때 그 화폐 인물로서 가장 많이 거론됐던 인물이 안중근 의사였다. 하지만 일본의 눈치를 봐서였는지 신사임당으로 결정이 났는데,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위의 도안이 제격이다. 더불어 신사임당의 그림 초충도가 그려진 앞면 자리에는 민족의 얼이 담긴 북두칠성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뒷면은 당연히 독도다.


    당시 드라마 '대장금'이 있기였는지라 이런 당황스런 패러디도.....



    2004년 일본의 1000엔권 인물은 근세 세균학자인 노구치 히데요로 바뀌었으나 그전에는 전범 이또 히로부미를 버젓이 내세웠다. 허나 새로 바뀐 노구치 히데요도 문제적 인물로서, 그의 업적은 대부분 '허위', '날조'이며 자신이 만든 매독항체 세균 '스피로헤타'를 고아와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던 부도덕한 인물이다. 



    * '고구려 천문도와 일본 기토라 고분 천문도'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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