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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히 망한 조선을 예견한 이사벨 비숍과 일본공사 오이시 마사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25. 00:36

     
    창덕궁 흥복헌이 속한 대조전 일대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그 작은 전각을 보고 싶었던 것은 1910년(융희 4)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흥복헌의 마지막 조회를 끝으로 순종 황제는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조칙에 어보(御寶)를 찍었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위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여 대일본제국 통감 데라우치와 회동하여 상의 협정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은 짐이 뜻을 세운 바를 체득하여 봉행토록 하라.
     
    어보가 찍힌 조칙을 들고 이완용은 남산으로 갔다. 그리고 남산의 일본 통감부 데라우찌 마사다케 통감의 관저에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것으로 조선의 500년 사직이 막을 내렸다. 1392년 8월 13일 건국된 이래 정확히 518년 9일 만의 종언이었다. 순종은 이후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념하자는 일본의 제의 대로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망국기념 촬영을 했다. 순종은 그 아비 고종과 더불어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던 군주였던 것 같다. 
     
     

    경복궁 교태전&원길헌 / 창덕궁 대조전&흥복헌도 같은 구조다.
    남산 조선통감부가 있던 곳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조선통감부 통감관저 터
    창덕궁 인정전
    한일합병 기념사진 / 흰 한복을 입은 순종 황제 뒤로 이완용 총리대신의 얼굴이 보인다.

     
    이로써 일본은 총 한 발 쏘지 않은 채 조선을 거꾸러뜨렸다. 조선은 518년을 존속했던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장수 국가였다. (11세기 이후 500년 이상 지속된 왕조는 조선왕조가 유일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누란(累卵)의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결코 망하지 않았던 인구 1300만 명의 나라가 전쟁도 없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인데, 모르긴 해도 이렇게 무력하게, 그리고 희한하게 망한 나라는 세계사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멸망은 패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전쟁의 결과로써 패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결과를 당사국인 일본마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조선백성들의 반대시위에 대비해 일본 육군은 미리부터 대규모의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켰고, 그 가운데는 다수의 기병부대도 있었다. 일본군 제2사단 참모 요시다 겐지로(吉田源次郞)는 <한일합병시말(韓日合倂始末)>이란 책에서 기병부대를 소집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기병연대를 소집한 이유는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즉 기병대는 이 목적을 위해 가장 적당한 부대였다. 왜냐하면 미개한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지닌 보병보다도 오히려 겉보기에 위엄 있는 기병이 효과적이라 사려되었던 것이다. 
     
    그 책에서 요시다는 조선 사람을 '미개한 백성'으로 표현했으나 사실은 모두가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합병 당일, 조선헌병대 헌병들이 서울 거리를 순회하며 조선인 두 사람이 말을 건네도 심문하게 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일본인이 본 역사 속의 한국> 나카쓰카 아키라, 2003) 하지만 백성들은 아직은 뭐가 뭔지를 몰라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이후로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와 달리 의병들도 출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을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갔던 이위종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1907년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밀사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참석해 일본의 불법적인 대한제국 침탈을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위종은 회의장 앞에서 각국 기자들에게 일본을 지탄하는 일장 연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1896~1899년 주미공사였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은 어릴 때부터 영어에 능통하고 똑똑해 언어가 달리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그밖에도 프랑스어,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다)
     
    우리 조선인들은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었던지라 일본인들을 기대를 가지고 맞이했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우리 백성들은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백성에게 정의를 구현해 주리라고 믿었으나 일본은 그런 신뢰를 배반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조선을 불법적으로 병탄하려 하고 있다. 
     
     

    1907년 7월 5일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 사진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순이다.
    1907년 8월 22일 자 미국 '인디펜던트' 지에 실린 연설문 / 연설문 제목은 '한국을 위한 호소문'(A Plea for Korea)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지식인들의 시각이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이위종의 연설처럼 오히려 기대를 가지고 일본을 맞이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이사벨 비숍의 글은 당시 조선백성들이 얼마나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렸는가를 단적으로 증언한다. 
     
    "내가 본 조선의 양반들은 극도로 부도덕하였으니 솔선수범의 정신이나 국가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 끔찍이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조선 백성들은 무기력하고, 남자들은 모두가 풀죽어 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조선 사람들은 가난이 자신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과 그의 가족들에게 줄 음식과 옷 이외에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게 빼앗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부러 부자가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냉철한 눈으로 조선을 바라보았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 &amp;lt;한국과 그 이웃나라들&amp;gt;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하지만 그녀가 북간도 및 러시아 연해주에서 만난 조선인들은 달랐다. 연해주는 러시아 영토가 되기 전부터 조선인들이 건너가 전답을 일구며 산 지역으로, 이후 러시아의 행정력이 미친 후에도 러시아 당국에서는 조선인의 이주와 경작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일정량의 땅을 주어 황량한 시베리아 영토를 개간시켰다.
     
    그런데 같은 조선인인데도 북간도와 연해주 사람들은 늘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행동이 반듯하고 자립심도 강했다. 그들은 조선 땅의 조선인들과 달리 명랑·활달했고, 농토를 일구며 조선 농민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좋은 집에서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다른 것이 있다면 그곳에는 조선 관료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비숍은 그들에게 크게 놀라며 이곳에서 진정한 조선인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비숍 여사는 1894년에서 1897년까지 걸쳐 조선을 네 번 방문했다. 비슷한 시기인 1892년 일본공사로 부임했던 오이시 마사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은 이미 망한 나라이다. 그저 다른 나라가 아직 이 땅을 집어삼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조선은 이른바 국가를 조직하는 뼈대가 모두 무너져내려 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은 강대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국경에 방위할 군사를 단 1명도 배치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안에 군함이나 군항이 전혀 없을 정도로 국방력이 허약하니 아프리카 토인보다 못한 세계 최악의 지경이다. 아울러 관리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로 정부의 재정은 매우 궁핍하고 경제전반은 침체되었으며 근대식 교육마저 미비해 앞으로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 이러한 국가 위기를 인지하고 극복해 갈 인재마저 보이지 않는 바, 한국은 이미 망한 나라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그 나라를 중국 일본 러시아가 노렸다. 중국은 직접 지배가 아닌 영원한 식민지로 두려는 것이 달랐지만 사실 그게 그거였다. 결국 승자는 일본이었는데 그들은 거저 먹은 것이 아니라 다른 두 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무려 10만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그들의 피값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선에 큰돈을 풀었으니(러일전쟁에서 큰 전비를 치르고, 러시아로부터 배상금도 못 받아 재정 위기 상태였음에도) 우선 대한제국 황실에는 150만엔을 풀었다.
     
    고종은 이에 앞서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2만엔(현 시가 25억원)을 받았으며, 합병 후 각 관료들에게는 3000만엔의 은사금을 뿌렸다. 아울러 백성들도 돌아보았으니 백성들의 체납세액을 일괄 탕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간 너무도 힘들었던 백성들은 그 당근에 취했다. 그리하여 합병 당일에도, 그 이후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훗날 최린(3.1운동 민족대표 33인)은 1910년 8월 22의 풍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그날 남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 네거리까지 오는 동안 거리는 평안했으며, 각 상점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백년 왕국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이날에 이렇게도 평안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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