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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드릭 하멜의 불운한 항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26. 03:06

     

    개인적으로 제주도 제1경으로 꼽는 서귀포시 안덕면의 용머리 해안은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1630~1692) 일행이 난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는 1653년 6월 14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64명이 상선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해 나가사키를 향했으나 목적지에 이를 무렵 태풍을 만나 표류했다. 배는 8월 16일 제주도 남쪽 해안으로 쓸려왔는데, 선원 64명 가운데 26명이 익사해 생존자는 36명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하멜은 그 생존자 가운데 1명이었다. 

     

     

    하멜 기념비
    하멜상선전시관 / 비짓제주 사진

     

    그곳 용머리 해안에는 이들의 도착을 기념해 건립한 '하멜 기념비'가 산방산을 배경으로 서 있고, 해안에는 하멜 일행이 타고 온 배를 재현한 전장 36.6m, 갑판 높이 11m의 하멜상선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그 배 안으로 들어가면 비교적 고증이 잘 된 내부와 폭풍우에 당황하는 하멜 일행의 모습도 볼 수 있다. (1층에는 히딩크 감독 관련 전시물도...? 같은 네덜란드 사람이라...;;)  그렇지만 과연 이곳이 하멜이 표류해 도착한 곳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아마도 아닐 것이니, 이곳을 하멜 일행의 표착지(漂着地)로 삼은 것은 산방산 및 용머리 해안 관광지와 연계시키기 위한 작업일 테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주목사 이익태(1633~1704)의 <지영록> 등에 근거, 대정읍 신도리 일대나 서건도 강정(江汀)을 표착지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지영록> 등에 '이곳이 그곳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은 아니라 단정 짓기는 어렵고, 다만 그들이 대정현에 붙잡혀 가 조사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대정읍 신도리에서 본 산방산
    대정현성
    대정현성 북문 옹성
    대정조점도 / 1702년(숙종 28) 11월 10일, 대정현성의 군대와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내 생각에는 하멜 일행이 표류한 곳은 가파도로 여겨진다. 그것은 이후 조선을 탈출한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에서 심문을 받은 때 자신이 좌초된 곳을 '켈파트'(Quelpaert)라고 증언했고, 자신이 쓴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하멜 표류기)에서도 처음 표류해 머문 곳이 '켈파트'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조선관리들이 주고 받는 대화에서 가파도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기에 그것이 제주도로 각인된 것이었다. 이를 테면,

     

    "저 서양인들을 어디서 잡아왔는가?"

    "가파도입니다. 가파도 어부들이 왠 이상한 놈들이 해안에 쓰러져 있다고 해서 대정현 군사들을 가파도로 보내 잡아온 겁니다."

     

    라는 식의 대화일 것인데, 하멜은 나가사키에서 신문을 받을 때도 가파도를 제주도로 증언했다. 

     

    "어디서 좌초되었나?"

    "조선의 켈파트라는 섬이다."

    "켈파트는 얼마나 크며 본국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15마일 정도의 둘레에 기름지고 인구가 많으며 본토에서 10~12마일 떨어진 남쪽에 있다."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에서)

     

     

    가파도와 대정현성의 위치(●)

     

    하멜 일행은 대정현에서 제주목으로 이송되어 전체 10개월간을 제주에서 지내다 이듬해 5월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종로 연지동 명인촌(明人村)에 살며 밥을 구하기 위해 매일 고관대작들의 집을 방문해 그 집 식솔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해야 했다. 이는 임금도 다르지 않았으니 그들을 처음 마주한 효종은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명색이 북벌을 주창한 효종임에도 그의 서양인 활용도는 고작 그 정도였다.

     

     

    연지동 삼양사 앞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508년이다. 하멜 일행이 연지동 명인촌에 살았을 때도 비슷한 크기의 이 나무를 보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효종실록>을 보면 "그들은 화포를 잘 다루었으므로 금려(禁旅, 화기도감)에 편입하였다"고 돼 있다. 그래서 예전 국사 교과서에는 효종이 북벌을 위해 하멜 일행을 화기도감에 배속시켜 업그레이드된 조총과 화포를  개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창작이다. 그들은 화기도감에 배속되었지만 한 일이라곤 코로 퉁소를 불고 춤을 추는 일뿐이었다. (<효종실록> 효종 4년 8월 6일 기사)
     
    <효종실록>의 "새로운 체제의 조총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하멜 일행에게 얻은 조총을 훈련도감에서 모방해 만든 것을 말함이다. 효종과 조정 대신들의 기회 활용도는 역시 그 정도였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난파된 스페르베르 호에는 대포 30문이 장착돼 있었고 하멜의 직책은 포수(砲手)였다. 그리고 나머지 35명의 사람도 있었다. 만일 조선관료 중 누구라도 화포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다면 충분히 우수한 화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테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이 청군이 쏘아대는 대포였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신남성에 7~8문의 홍이포를 끌고 올라와 남한산성 행궁을 조준 포격함으로써 성내를 공포에 떨게 했고, 결국 항복을 이끌어냈다. 이 홍이포가 바로 네덜란드 기술로 만든 컬버린이라는 대포로서, 홍이(紅夷)는 붉은 머리의 오랑캐, 즉 네덜란드인을 뜻했다. 

     

     

    신남성의 위치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홍이포와 포탄

     

    그렇게 광대로 살던 그들 하멜 일행은 다시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이후 8명이 탈출해 목적지인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표류한 지 13년째 되는 1666년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는데, 11명은 이미 죽었고 다른 곳에 배치된 일행들에게는 알릴 방도가 없어 나머지 8명만 탈출했다. 그중에 헨드릭 하멜이 보험금을 타기 위해 유명한 표류기를 썼는데, 여기에는 나가사키의 일본 심문관이 배 안에 실렸던 포의 행방에 주목해 물은 내용이 나온다. 

     

    "스페르베르 호에 있던 대포와 짐은 어찌 되었는가?"

    "포의 일부는 건질 수 있었지만 바닷물로 심하게 손상되었다. 실려 있는 짐도 일부만 구할 수 있었다. 지금 그 물건들은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이후 일본 심문관은 그들의 간첩 혐의에 대해 조사했고 조선정부와의 무관함이 밝혀진 후 풀려났다. 하지만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666년 10월 23일 나가사키를 벗어나 바타비아로 향했는데, 그때까지 하멜 일행이 머물던 곳이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였다.

     

    당시 일본도 쇄국을 했지만 네덜란드와의 무역 통로 하나는 열어놓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 섬 데지마였다. 그런데 이웃나라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에 옭죄어 널빤지 하나라도 바다에 흘려보내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었고 이후로도 해금정책은 오랫동안 철저히 이행되었다.

     

     

    데지마(화살표)와 주변의 네덜란드 상선들

     

    까닭에 조선은 해외에 관심도 두지 않았으니 하멜 일행이 13년이나 조선 땅에 있었어도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조선관리들에게 있어 그들 서양인은 그저 푸른 눈에 붉은 피부(面鐵)를 지닌 희한한 광대일 뿐이었다. 혹자는 이들 네덜란드인이 조선술, 무기 제작, 축성, 천문학, 의술 등에 일가견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말하며, 이들이 조선에 머문 13년 세월은 한국과 서양이 처음 만난 역사적 시간이었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 시기가 우리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고 말했지만, 가히 언감생심이다. 이후로도 조선이 서양에 눈을 뜬 것은 200년이 훨씬 지나서였으니, 양화진 절두산에 세워진 아래의 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후 건립한 것이다. 

     

     

    절두산 척화비

     

    하멜은 1667년 11월 28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하멜 일행은 13년 이상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했으나 회사는난색을 표하며 표류에 대한 증거를 내놓으라 요구했다. 결국 하멜이 대표로 표류기를 쓰게 되었으니, 탈고 후 제목을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로 하였다. 그런데 이미 네덜란드에서는 비슷한 내용의 조선 표류기가  출판사를 달리하며 출간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원인은 바타비아에서 먼저 귀국한 하멜 일행이 가지고 있던 비슷한 내용의 표류기를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의 출판사에서 각각 간행했기 때문이었다. 원본은 하멜이 데지마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제출한 보고서였고, 출간 된 책은 하멜 일행이 가지고 귀국한 보고서 필사본에 살을 붙인 것이었다. 이후 하멜은 <조선왕국기가 첨부된, 겔파트 섬에 난파한 네덜란드 선박 이야기>라는 제목의 원고를 다시 써 출판사에 넘겼는데, 앞서 쓴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와 버무려진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하멜 표류기>이다.  

     

     <하멜 표류기>는 네덜란드를 넘어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중간(重刊)을 거듭하는 초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붐에 편승해 하멜 일행은 그간 밀렸던 15년치 봉금을 모두 받아낼 수 있었다. 이후로도 <하멜 표류기>는 계속 간행되었는데, 가장 일반적인 버전이 아래의 <1653년 바타비아 발 일본행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이다.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 초간본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 / 국립제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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