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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선과 한(漢)의 쟁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28. 23:51

     
    앞서 '고조선과 연(燕)의 쟁투'에서 말했듯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국토의 서쪽 지방을 잃는다. 반면 연나라는 국경을 만번하(滿番汗)까지 전진시키니,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여러 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했다고 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사서의 기록이니만큼 별 이론(異論)이 없다. 
     
    이후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시황제 정(晸)은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북으로 흉노를 치게 해 하남 땅을 손에 넣고, 진 · 조 · 연의 장성을 연결시키게 하니 언필칭 만리의 장성이 요동에 이르게 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조>를 보면, 이때 조선은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친조하지는 않았다.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전국시대의 주요 장성 .

     
    그리고 이 무렵 조선은 부(否)가 으로 즉위했다. 준왕(準王, 재위 BC 210~192)의 아비되는 사람이다. 이후 진나라는 혼란이 일어나 2대를 채 넘기지 못하고 국운이 기운다. <위략(魏略)>을 참고하면, 진나라 통일 후 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며 천하가 어지러워졌고, 이에 괴로움을 겪던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차츰차츰 준왕에게 망명하니 준왕은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하였다. 이후 한나라가 들어서고 노관(盧綰)이 연왕이 되었을 때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접하게 되었다. (二十餘年 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여기서 노관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일등창업공신이다. 그래서 연왕에 봉해진 것이었으나 유방은 한신, 번쾌를 비롯해 자신을 도운 거의 모든 문무대신들을 제거하는데, 노관 역시 그 대상이 되었다. 노관은 선수를 쳐 한(漢)에 대항했으나 힘이 달려 흉노로 도망하였고 그의 밑에서 한 자리하던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상하장(上下障)이라는 곳에 정착한다.
     
    위만은 고조선으로 올 때 조선 복장에 상투를 틀었다고 하는 바, 아마도 진개가 고조선 서쪽 땅을 빼앗았을 때 그곳에 살던 조선인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굳이 상투에 조선복장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가 국호를 바꿈 없이 그대로 승계한 점, 그리고 왕위 찬탈이 일어났을 때 별다른 민심 이반이 없었던 점도 조선인이라는 증거가 된다. 
     
     

    왼쪽부터, 앞서 말한 청동기 거푸집 뒷면의 상투 튼 고조선인, 상투 머리의 부여인 인물상, 아래는 KBS에서 복원한 고조선인

     
    기원전 195년 위만은 박사(博士) 직위와 100리의 땅을 식읍으로 받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된다. 그러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망명해 온 연 · 제 · 조의 백성들과 반란을 일으켜 수도 왕험성(=왕검성)을 공격했다. <위략>에 따르면 위만은 한나라가 쳐들어온다며 군사를 모았고 수도 방어를 구실로 왕험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준왕은 위만의 공격에  맞서 싸웠으나 고려말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가 개경을 어렵잖게 함락시킨 것처럼 왕험성이 함락되었고, 준왕은 측근들과 함께 남쪽 한(韓)으로 도망 가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때가 중국 한나라  효혜제(惠帝)  1년(기원전 194년)으로, 이 또한 공인된 사서의 기록이니만큼 별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위만이 망명할 때 건너온 패수와 왕험성의 위치는 아직까지 정설이 마련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 왕험성이 지금의 평양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앞서 말한 대로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후한 응소(應邵)는 왕검성에 대해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인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왕험성에 대한 한대(漢代)의 거의 유일한 지적인데,(고조선은 한대에 존재했던 나라다) 북한의 고조선 전문가 리지린은 험독을 요동 해성으로 보았다. 혹자는 요녕성 조양(朝陽)을 왕험성으로 보기도 하지만, 조양이 됐든 해성이 됐든 왕험성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중국은 요령성 안산시 태안현을 왕험성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사기>에 주석을 달았던 서진의 신찬(臣瓚) 역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으며 이것이 (요동군) 험독현이다"라고 말했다. 즉 패수는 요서와 요동군의 경계에 있던 강(江)임을 알 수 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낙랑군이 평안남도에 있었다면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었다는 요동군 험독현은 대동강 동쪽의 함경도 함흥평야쯤이라는 해괴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볼 때 패수는 요하(遼河, 랴오허강)가 유력하다. 요하가 전통적으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경계를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지만,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東入于海)라고 기록된 중국의 고대 지리서 <수경(水經)>의 내용과도 부합된다. 
     
     

    요하의 위치

     
    넓게 보면 요하뿐 아니라 아래의 난하, 대릉하도 포함된다. 난하, 대릉하도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반면 압록·청천·대동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따라서 압록·청천·대동강은 패수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조선은 앞서 말한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서쪽 영토를 상실한 바 있어 난하는 사실상 요하로 비정하기 어렵다.  
     

    요하, 난하, 대릉하의 위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위만은 이성계처럼 수도를 점령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성계처럼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조를 교체하지 않았고 왕험성을 점거한 후 그대로 조선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후세사람들은 위만 이후를 위만조선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 아닌 조선의 유민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가 중국인이었다면 아마도 국호를 후연(後燕)이나 동연(東燕)으로 삼고 친중국 정책을 꾀했을 것이다.  
     
    사실 위만은 중국과의 선린정책을 택해 주변 소국과 한(漢)의 교류를 막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고 성장했으나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 ?~BC 108) 때에 이르러서는 (위만의 아들에 대해선 기록이 없다)  강해진 힘을 믿고 중국과의 대립 노선을 택한다. 즉 한반도 북부와 요동을 완전 장악한 우거왕은 중국의 망명자들을 오는 대로 받아들였으며, 동쪽의 예(濊), 맥(貊) 및 남쪽의 군소국가들이 중국과의 직접 통교 및 조공하는 것을 막고 통관자에 대해 삥을 뜯었다.
     
    이에 한나라는 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동·남쪽 국가들의 통교를 원활히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된 섭하는 본국의 처벌이 두렵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론 열도 받아 국경까지 배웅 나온 비왕(裨王, 지방 장관) 장(長)을 찔러 죽였다. 섭하는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을 공격해 온 조선의 장수를 죽이고 왔노라 떠들었고, 이 일에 대한 포상을 받아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에 임명된다.  
     
    그러자 격분한 우거왕은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전사시키는데, 이 일로 기원전 109년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조·한전쟁이 벌어진다. 기원전 111년에 이미 남월(男越, 베트남)을 평정한 바 있는 한무제의 정복욕에 섭하의 죽음은 좋은 빌미가 된 셈이다. 한무제는 좌장군 양복(楊僕)과 누선장군 순체(荀彘)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수륙병진으로 고조선을 공격케 하였다. 한나라는 최정예 군사를 보냈지만 의외로 고전을 거듭해 연전연패한다.
     
    고조선의 군사력에 놀란 한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 우거왕과 평화화담을 모색했고 우거왕도 이에 응해 말 1만 필을 선물로 바치고 태자를 한나라에 볼모로 보낸다. 그런데 여기서 위산은 말 1만 필을 끌고 오는 군사 5천 명에 위험을 느껴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태자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껴 불응하여 되돌아오고, 빈손으로 돌아간 위선은 한무제에 의해 참수당한다. (이 이야기들은 사마천 <사기/조선열전>에 나오는 내용을 집약했다)
     
    그리고 즈음하여 한나라 장수 양복과 순체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으로 인한 내분이 벌어지는데, 이에 계남태수 공손수가 중재 역할로 파견되나 성공하지 못하고 내분이 격화된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긴 전쟁에서 오는 피로도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내분이 일어나 주전파와 주화파가 싸우게 되고 결국 니계상(尼谿相) 삼(參)이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암살한다.  
     
    삼, 한음, 양겸, 노인(路人) 등의 주화파는 즉시 한나라에 항복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상대권을 쥔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우거왕에 이어 결사항전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장격)과 재상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가 다시 성기를 암살함으로써 위만조선은 결국 멸망하고 만다. 사마천은 이때가 기원전 108년(원봉 4년/한무제 33년)이라고 정확히 기술했다. 
     
    그리고 조선의 옛 땅에 한의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썼으나, 그 4군의 위치는 물론이요 이름마저 명시하지 않았다. 대신 이후의 사서들에 띄엄띄엄 4군에 대한 기록이 출현하며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데, 한사군에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조선의 돈 명도전과 청동 수레장식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선 청동 창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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