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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목사 이원진과 하멜 일행의 대화가 담긴 재미있는 장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31. 00:16

     

    1653년 8월 16일 가파도에서 체포된 36명 하멜 일행은 대정현에서 일차 조사를 받고  8월 21일 제주목으로 이송되었다. 그렇다고 묶여 끌려간 것은 아니고 조랑말이 제공되었으며 부상자들은 들것에 실려 이송됐다. 하멜은 이튿날 오후 Mocxo가 있는 Moggan에 도착했다고 썼는데, 여기서 Mocxo가 제주 목사(牧師)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Moggan에 대해서는 제주목아를 가리키는 '목관'(牧館)이라는 해석과 제주 목의 안[內]을 가리키는 '목안'이라는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여기서 흔히 Moggan은 목관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목사의 관사 혹은 목아가 목관으로 불린 용례가 없기 때문이다. 하멜이 한자를 알고 있다면 그렇게 단어를 만들어 쓸 수는 있겠지만 그럴 리는 만무하다. 대신 목안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말하자면 한양 도성 안이 '문안'[門內]으로 불린 것이나 마찬가지 용례로서, 지금도 제주시 토박이들은 제주 시내를 목안으로 칭한다.  

     

     

    제주관아 입구인 진해루
    제주관아 내삼문
    목사의 관사인 홍화각
    관아 내의 망경루와 귤림당

     

    하멜 일행은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1594~1665) 앞에 4명씩 불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하멜은 목사가 '사리 판단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일지에 썼다. 한마디로 똑똑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기와 달리) 자신들의 의사를 해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였다. 이원진은 그저 대화만 통하지 않았다 뿐 하멜 일행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하였던 바,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정확한 내용이 담겨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사슴가죽)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국화과 약초) 94포(包), 용뇌(龍腦, 남방산 약재)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이원진은 일본어 통역을 통해 우선 '서양의 크리스챤'이냐고 물었다. 이원진이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일견 신통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그는 앞서 인조 임금 때 동래부사를 지낸 적이 있어 외국의 사정에 비교적 밝았다. 동래 왜관(倭館)을 감독하며 그곳 왜인들로부터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하멜 일행이 반색하며 '야, 야'(Yes, Yes)를 외쳤다.(화란어 Ja는 영어의 Yes다) 아마도 그들은 그 물음에 무척이나 반가웠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Korea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일본에 대해서는 오질도(吾叱島)라고 답했다. 오질도는 아마도 나가사키 앞바다의 다섯개 섬인 고도열도(五島列島)를 지칭했을 것이다. 앞서 '헨드릭 하멜의 불운한 항해'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은 1백 여 척의 배로 일본과 교역하였지만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나가사키 앞바다의 작은 섬 데지마(出島)에 국한되었던 바, 섬에 대해서 물으니 오질도라 답한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는 오해가 있었으니 이원진은 본도(本島), 즉 제주도에 대해 물은 것이나 무언가 잘못 이해한 그들은 일본의 고도열도로 응답했다. 아마도 제대로 이해했다면 필시 켈파트(Quelpaert, 가파도)라 답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하멜 일행은 처음에 자신들이 난파된 가파도가 각인되어 제주도를 끝까지 켈파트라 지칭했다) 그렇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대명, 혹은 대방(큰 나라)이라고 정확히 말했고,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 혹은 나가사키라 했으며, 대륙의 서북쪽은 타타르라고 언급했다. 

     

    목적지 역시 낭가사키(=나가사키)라고 분명히 답했다. 이것은 어느 한쪽이 잘못 말했거나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인이 쓰는 단어를 그대로 말했고, 또 정확히 알아들은 것이니  <스페르베르 호의 불운한 항해일지>(=하멜 표류기)에도 나가사키는 낭가사키(Nangasackij)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하멜 일행의 시작은 뭔가 순탄해 보였다. 그래서 잘하면 조선으로부터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들의 대부분은 조선 땅에서 죽었고 헨드릭 하멜을 포함한 겨우 8명만이 13년만에 조선 땅을 벗어나 나가사키로 탈출하게 된다. 나머지 이야기는 차후 또 소개하기로 하겠다.  

     

     

    하멜 일행의 이동 경로

     

    ▼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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