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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여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 07:28

     
    기억하실 분은 거의 없겠지만 20년 전 오늘은 정순덕이 죽은 날이다. 제목대로 그는 최후의 빨치산이라 불리는 사람으로, 내가 여사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그저 그가 여자임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정순덕에 대해서는 "하동 사람은 아이들이 울면 '그러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간다'가 아니라 '정순덕이 와서 잡아간다'고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여자였던 것이다. 


     

    정순덕(鄭順德, 1933~2004) / 수감 생활 중 찍은 사진이다.

     
    앞서 '하동 쌍계사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에서 말한 바 같이 차일혁 대장이 이끄는 토벌대가 지리산 화개동천 빗점골에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했을 때가 1953년 9월이었다. 그런데 다시 토벌대가 산청군 내원리에서 최후의 빨치산 이홍희를 사살하고 정순덕을 생포했을 때가 1963년 11월 12일이었으니 빨치산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10년 동안이나 준동한 셈이다. 그리고 그 1963년은 내가 태어난 이후이니 사실 그리 멀리도 않은 일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중산관광단지 내에 건립된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에는 그가 붙잡힌 이른바 '구들장 아지트'가 재현 전시돼 있다. 그는 초가집 구들장 아래 굴을 파고 숨어 살다 체포됐고, 23년간 복역하다 출소했다. 이후로는 비전향 장기수의 살림집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생활하며 봉제공장에서 일했는데, 2000년 6·15 남북회담으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이 이루질 때 그도 북송을 요구했으나 전향서를 쓴 경력으로 인해 불발됐고, 2004년 인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 정순덕은 살아 있을 때, 당시 전향서를 쓴 이유는 정말로 전향해서가 아니라 다리 치료받으려고 쓴 거라며 억울해 했다.  


     

    정순덕이 체포된 집 / 지리산빨치산 토벌전시관

     
    "10년만 버티면 통일이 될 것이다." 정순덕은 이렇게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군경의 토벌작전 이후 1954년 단 세 명만이 살아남은 3인 부대로 쪼그라들었을 때도 '통일 과업'을 지속하였고, 1960년 경찰의 저격으로 한 명이 죽어 2인 부대가 되었어도 의지를 꺽지 않았다.
     
    정순덕과 홍명희는 1962년에는 자신들을 신고하려던 협력자(일명 '세포')와 그 가족들을 몰살시키며 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1962년 10월 10일, 그는 고향인 산청 안(內)내원골에서 형제사이인 정위주 부부와 정정수 부부를 살해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특히 정위주 아내는 만삭의 몸이어서 그 충격이 더 컸다.   
     

    * 재판에서 정순덕은 정정수 부부를 죽인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녀는 자신과 이홍희가 정정수 부부를 찾아가자 정정수가 이홍희의 카빈 총렬을 낚아채며 반항했고 이에 두 사람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동안 자신은 정정수의 다리만을 쏘았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홍희와 정정수가 몸싸움을 벌이자 살해목적으로 카빈소총을 발사했다 여겼고, 부엌에서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 정정수의 아내를 쏜 사람도 정순덕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이어 정정수의 이웃에 사는 형 정위주의 집을 찾아갔는데, 만삭의 정위주 아내는 마침 산고 중이었다. 그들은 먼저 무저항 상태의 정위주의 아내를 사살했다. (아기가 태어났다면 그들 부부가 그리던 아들일 뻔했다) 그리고 도망쳐 이웃집 헛간에 숨었던 정위주를 찾아내 마을 한가운데로 끌고 온 후,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또다시 우리를 신고하는 자는 이렇게 해주겠다"는 협박 연설을 하고 정위주를 공개 사살했다.

     

    정순덕은 첫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개새끼, 감형만 시켜봐라. (그러면) 가만 안 둔다, 이 썅놈아!"라고 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북한은 1964년 김일성의 지시로 정순덕을 주인공으로 한 <지리산 여장군>이란 영화를 만들어 '불굴의 무적 영웅'으로써 대대적으로 선전을 했으나 정순덕이 체포돼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북방송을 타자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영원히 사라졌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순덕은 이 사실을 전향한 남파간첩 김남식이 감옥 순회강연할 때 들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체포될 때의 사진 / 당시 29세
    시기를 알 수 없는 사진
    1985년 출감했을 때
    죽기 1년 전인 69세 때의 사진

     
    정순덕은 1933년 8월 11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안내원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에게 덕(德)에 순응하고 살라는 뜻에서 순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10대 후반의 나이에 성석근과 결혼했으나 곧 헤어져야 했다. 성석근이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부역했던지라 국군의 보복을 피해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혼 초에 생이별을 하게 된 셈인데, 이에 그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1951년 2월 겨울옷을 챙겨들고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산속을 헤맨 끝에 감격적인 재회를 하였다. 
     
    하지만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부부, 연인은 같은 부대에 배치하지 않는 빨치산 원칙에 따라 다른 부대로 배속됐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빨치산은 게릴라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파르티잔(партиза́н)'에서 유래된 말로, 원어보다는 '산(山)에서 싸우는 빨갱이'로써 유명해진 조선인민유격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인민유격대가 활동했던 지리산 빨치산(덕유산·회문산 빨치산 등도 있었다)은 통상 여순반란 때 군경을 피해 입산한 1차 빨치산과 한국전쟁 때 입산한 2차 빨치산으로 나뉘는데, 정순덕의 남편 성석근은 2차 빨치산인 셈이었다.  
     

     

    파르티잔의 이미지


    훗날 정충제가 정순덕의 구술에 기초해 쓴 <실록 정순덕>에 의하면 성석근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북한군이 마을을 점령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된 경우였다. 그리고 국군이 수복을 하자 또 어쩔 수 없이 입산을 하게 된 것이나, 그럼에도 국군은 수시로 정순덕을 찾아와 남편을 찾아내라고 닦달을 해댔다. 하루는 정순덕을 뒷산 비석에 묶어놓고 "아침까지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해 보고 답하라"고 말한 뒤 돌아갔는데, 밤새 추위에 떨다 간신히 손을 비틀어 결박에서 벗어났고 그 길로 겨울옷을 챙겨 들고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정순덕은 그렇게 남편과 재회를 했지만 얼굴을 본 것은 겨우 며칠에 불과했다. 재회 후 20일 지난 어느 날, 해동(解凍)과 함께 시작된 빨치산토벌대의 공격에 성석근이 사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입산 후 취사와 간호 일을 하던 정순덕은 이후 무기를 지급받고 전사가 됐다. 아울러 한글과 한문을 배우며 의식화교육을 받았는데, 훗날 정순덕을 만난 정충제는 당연히 일자무식이리라 생각했던 정순덕이 한자로 쓰인 국군충혼비를 거침없이 읽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 같은 술회를 보자면 정순덕은 두뇌가 꽤 총명했던 듯하다.

     

     

    남원 지리산 뱀사골
    빨치산 소식지 및 사상교육 자료를 인쇄했던 일명 '삐라방'이 이곳에 있었다.
    '삐라방'으로 불린 석실 동굴 / '전북의 소리' 사진
    남원 뱀사골 인근 석실 동굴에서 제작된 빨치산보(報)


    그리고 몸도 꽤 날래서 국군 및 토벌대와의 전투에서 쏘고 달리기(히트 엔드 런)를 잘 했으며,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분소장으로 승진하고 조선공산당 입당도 허가됐다고 했다. 1953년 종전협정이 체결됐지만 남부군(한국전쟁 동안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은 "빨치산에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투쟁을 계속했다. 이에 정순덕은 이후로도 10년 동안 활동하며 이홍희와 더불어 '최후의 빨치산'이 되었으나, 입산 13년만인 1963년 11월 18일 새벽에 고향인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농가에서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산청의 한 농가에 빨치산이 숨어 있다는 제보를 입수한 산청경찰서는 주위에 숨어 두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구들장 밑 아지트에서 나온 이홍희를 향해 김영국 경사와 박기수 순경이 총을 쏘았고 이홍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이때 정순덕은 두 발의 총을 맞고 체포되었는데, 총알이 허벅지에서 골반 뼈로 관통해 결국 한쪽 다리 전체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정순덕이 숨어 지냈던 집과 지하 아지트가 지리산빨치산 토벌전시관에 재현됐다. / 아궁이의 솥단지를 들어내 구들장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방식이어서 수차례의 검색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체포된 곳의 실제 사진
    사살된 이홍희의 실제 사진

     

    정순덕은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하다 1985년 8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후 영세공장을 전전하다 1995년 8월 비전향 장기수 공동체인 서울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정착해 살았으나 99년 3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수술을 받고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숨졌다. 아래 사진은 그가 죽을 때까지 품에 지녔던 가족사진이라고 한다.

     

     

    정순덕의 언니와 동생 사진

     

    내가 학교 다닐 때 일시 빨치산 열풍(?)이 불었다. 나 역시 관심을 기울여 작가 이병주(1921~1992)의 <지리산>, 빨치산 출신의 작가 이태(1922~1997)가 쓴 <남부군>을 모두 읽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안성기 주연의 영화 <남부군>과 박진성 주연의 TV 드라마 <지리산>을 한 회도 빠짐없이 모두 보았다. 나아가 나름대로의 자료도 모으고 남원·순창·산청·하동·벌교 등지를 탐방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때 찍은 빛 바랜 사진들이다.

     

     

    지리산 노고단 방면에서 찍은 천왕봉과 반야봉

     

    이후 한가지 결론을 내린 게 있다. <지리산>과 <남부군>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거나 창작된 걸작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역사적 사실을 좌편향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없었던 일을 사실인 양 날조한 최고의 졸작이라는 것이다. 조정래는 자신의 육성으로 "<태백산맥>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 중에(200여 명이라고 말한 걸로 기억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자랑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랑거리도 못 되거니와 오히려 사실적이지 못하다.

     

    성은 다르더라도 친구 중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적어도 두어 명이 되는 것이 대다수의 현실임에도 그는 오히려 초현실을 자랑했는데, 이와 같은 작가의 편향된 사고는 <태백산맥> 전편에서 난무한다. 그래서 군인이나 경찰들은 죄 악독하고 폭력적이며, 빨갱이 사상을 가진 자들은 죄 착하고 인간적이다. 또 그래서, 과연 인간이란 동물이 사상에 의해 그렇듯 이분법적 선·악으로 나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전혀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태백산맥> 속 인물들은 왜 그렇까? 그 답을 조정래 작가의 한 인터뷰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수집했으나 반공적 자료는 뒤집어 읽기를 했으며, 역사는 힘 있는 자의 기록이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민중의 시각에서 소설을 서술했다."

     

    즉 그는 우리의 현대사를 객관적 사고에 의지해 판단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사고에 의해 뒤집어 읽기를 했다고 스스로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태백산맥>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쓴 소설이라며 자화자찬 떠들어댔던 바, 뻔뻔스럽기가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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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