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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랑천 송계교(월릉교)에 얽힌 슬픈 사연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4. 7. 18. 22:00

     
    '어쩌면 비가 저리 쉬지도 않고 내릴까? 이러면 수해가 나는 건 필연이다' 생각하면서 흙탕물 넘실대는 중랑천을 건넌다. 그러면서 해마다 반복되는 중랑천 수해는 어쩌면 조선시대 한 여인의 원통한 죽음과 관련이 있을는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떠올린다. 조선초 중랑천 송계다리 공사에 동원됐던 어떤 민초에 관한 이야기다. 
     
    앞서 말한 대로 중랑천의 발원지는 임꺽정의 근거지였다는 양주 불곡산이다. 연봉(連峰)으로 이루어진 불곡산의 최고봉은 투구봉(468.7m)이며 그 외 암봉, 상투봉, 임꺽정봉 등이 늘어서 있는데, 상투봉과 임꺽정봉 사이의 ‘불곡샘'이 중랑천의 최고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이 물은 이후 18개 지류를 만나며 45.3㎞를 흐르다 서울 왕십리·금호동 부근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불곡산 임꺽정봉(449.5m)
    양주 대모산성 발굴현장에서 본 불곡산 연봉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 / 용비교 두모교 동호대교가 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중랑천의 이름이 본래는 '중량(中梁)'이었으나 1911년 일제가 경성부지도를 만들면서 중량교(中梁橋)를 중랑교(中浪橋)로 잘못 표기하며 '중랑'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중량천(中梁川)보다도 중랑포(中浪浦)라는 지명이 더 많이 등장하는 바, 옳다고 하기 어렵다. 다만 혼용해서 사용됐을 것은 같다. 
     
    민간에서는 '중랑'의 어원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것이 자못 슬프다.  또 조선시대의 전설이 대부분 그러하듯 '관'(官)의 횡포와 관련이 있다. 그 '관'의 횡포는 우선 태조 이성계의 무덤 건원릉이 양주에 자리한 데서 기원한다. 이후 조선의 역대 왕들은 해마다 건원릉 참배를 위해 중랑천을 건너야 했는데, 당대의 기록을 보면 이때 송계원(松溪院)과 가까운 곳의 다리를 이용한 듯하다. 일례로 <태종실록>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임금이 건원릉에 나아가서 제사를 행하고, 또 법회를 보려고 하였으니, 소상(小祥,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가(御駕)가 흥인문 밖에 이르니, 후자(候者, 망보는 사람)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송계원(松溪院) 서천(西川)의 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습니다."
     
     

    구리시 건원릉
    동구릉 금천교 / 장마철이라 금천의 물도 크게 불었다.

     
    송계원은 지금의 중랑구 묵동 330 일대에 있던 역원(驛院)을 말함인데, 부근에 송계다리가 있었다. 이 송계교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다리로 개경과 남경의 동남부 지역을 잇는 교통로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들어서도 그 역할이 이어진 중요 교통로였으나 문제는 툭하면 범람하거나 유실되어 건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옛 송계교 자리에 지어진 중랑구 월릉교 / 송계교 석재가 월릉교 강물 밑에 있다고들 한다.
    다리 아래의 큰물
    다리 위에서 본 북한산 운무

     
    이에 태종은 1408년(태종8) 기존의 목교를 석교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건원릉 행차 및 후대의 왕들의 행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인데, 이 대역사에 양주에 사는 모든 장정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그 부역자 가운데 중이(仲伊)라는 홀아비가 있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의학적 판단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던 바, 꼼짝없이 부역에 동원돼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러자 아비를 걱정한 그의 16살 먹은 딸이 아비를 대신해 나섰다. 그는 자신이 중이의 유일한 혈육임을 강조하며 아비를 대신해 부역을 맡겠노라 청했다.
     
    양주 현감은 처음에는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중이 딸의 거듭된 청에 결국 허락을 하였다. 다만 남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어차피 부역자의 숫자는 채워야 했고, 또 남장을 하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중이 딸은 이번에는 거듭된 절로 고마움을 표한 후 돌다리 건설의 노역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남자로써 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을 나르고 쌓는 일은 사실 남자로서도 힘든 일이었는데,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소변의 경우 남녀의 배뇨 방법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니, 이에 중이의 딸은 소변 횟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물도 거의 마시지 않은 채 일했고 결국은 탈수현상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서 전설은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해피엔딩으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왕이 그들 부녀를 부역에서 제외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반면 언해피엔딩도 있다. 쓰러진 중이의 딸이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는 것인데, 이후 사람들이 그를 중이의 딸이라는 의미의 중낭자(仲娘子)라 부르며 추모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가 다리를 놓았던 송계천은 중랑천이라 불려졌다는 것인데, 기승전결의 아귀를 따지자면 후자의 해피엔딩 버전이 더 그럴싸하다. 행복한 예감은 맞지 않아도 불행한 예감은 잘 맞는다는 속설이 지배하는 나라라서 일까, 우리나라는 전설의 경우도 대부분 불행한 쪽이 지배한다.
     
     

    폭우로 월릉교 아래의 도로와 보행로가 모두 통제됐다.
    불어난 물이 북부간선도로 교각 수표 14m까지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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