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0일 개통된 지하철 별내선을 이용해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면 팔야리에 다녀왔다. 별내면과 진접면은 인접해 있으나 지하철은 별내가 종점인지라 그곳에서 경춘선으로 갈아타고 사릉역에서 내린 후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내가 이렇듯 어렵사리 팔야리를 찾아간 것은 소싯적 보았던 400년 된 느티나무를 별내선 개통을 기회 삼아 다시 보고자 함이었다.
아. 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밑동 둘레 4.5m, 높이 25m의, 거칠 것 없이 푸르름을 뿜는 노거수.... 하지만 주변은 많이 변했으니, 멀리 보이는 철마산과 주금산, 그리고 황량한 밭 외에 아무것도 없던 고즈넉하던 벌판에는 총 21만㎡ 규모의 산업시설인 광릉테크노밸리가 들어서 있었다.
까닭에 나무를 힘들게 찾았는데, 뜻밖에도 이곳 산업시설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도움을 주었다. 광릉테크노밸리 내에서 만난 사람은 모두 외국인 근로자였다. 별 수 없이 그들에게 바디 랭귀지를 곁들여 '큰 나무'의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주저 없이 뒤쪽 비탈길을 지목하는 것이 아닌가.
이 보호수 느티나무는 그들에게도 인상적인 나무였음이다. 그러한즉 620년 전의 이성계도 이것을 보았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이 느티나무의 추정 수령은 최고 400년이므로 이성계가 보았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왜 이 대목에서 태조 이성계가 들먹여질까?
바로 이 동네의 이름이 팔야리(八夜里)이기 때문이다. 왕자의 난 이후 함경도 함흥에서 칩거해 온 나온 이성계가 함흥에서 내려와 이곳 들판에서 8일 밤을 머물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포천시 내촌면에서 발원, 이곳 진접면을 경유해 구리시 토평동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왕숙천(王宿川) 역시 이성계가 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함흥의 이성계가 이곳에 오긴 온 것 같은데, 이에 관한 전설을 채록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저 유명한 함흥차사의 고사를 낳은 함흥을 벗어나 이곳 팔야리까지 오게 된 사연은 아들 이방원의 '형제의 난'과 관련이 깊다. 왕세자였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이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등이 정원군 이방원에 살해된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에 대해서는 앞서 '삼봉 정도전의 집터와 무덤 터'에서 말한 바 있다.
학을 뗀 이성계는 한양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리고, 이에 이방원은 사자를 보내 부친이 돌아오도록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이때 탄생한 고사가 저 유명한 '함흥차사'다. 활의 명사수였던 이성계가 자신을 회유하러 오는 차사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던 바, '함흥차사'는 심부름 등을 가서 소식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중 박순(朴淳, ? ~ 1402)의 이야기는 가장 가슴 아프다. 사자들이 가면 돌아오지 않자 이방원은 태조의 친구이자 위화도 회군의 동지였던 전(前) 상장군 박순을 보냈다. 이때 박순은 머리를 써 망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이방원의 사자가 아닌 척 이성계와 술잔을 기울였는데, 문 밖에 매어놓은 망아지가 슬피 울었다. 신경이 쓰인 이성계가 물었다. "자네가 타고 온 망아지가 왜 저리 울어대는가?" "급히 오느라 아직 어린 망아지를 타고 와서 그런 모양이외다. 어미와 떨어진 새끼가 어미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듣자니 정원군(이방원)도 매일 밤, 제 부모가 그리워 운다 하더군요." "이제 보니 박순, 자네도 이방원의 차사였군." 이성계가 불쾌히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문득 가슴이 짠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바, 박순에게 조만간 돌아겠다는 말을 전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박순은 이튿날 아침 한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부하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인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 ~ 1402)는 그를 돌려보낼 마음이 없었다. "저자를 살려 보내면 정원군이 딴마음을 먹을는지 모릅니다. 박순도 죽여 전하의 의지를 보여주소서." 정원군의 딴마음이란 2대 왕인 정종을 몰아내고 그가 왕위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결국은 그렇게 되었지만) 이에 이성계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친구인 박순을 죽일 수는 없는 일..... 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성계는 조사의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만일 그자가 용흥강을 건넜거든 더 이상 추격하지 말고 살려 보내고, 아직 동북면에 머물러 있거든 베어라." 용흥강은 동북면의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서, 이성계는 이 시각쯤이면 충분히 동북면을 벗어났으리라 생각에 그와 같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박순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죽었다. 여행 중에 물을 갈아먹어서일까? 그는 용흥강을 건너기 전 곽란을 일으켜 용흥강 뱃사공의 집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배를 타려는 순간, 뒤쫓아 온 조사의 부하의 칼을 맞고 말았다. 이성계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으려던 조사의는 그해(1402년) 11월 이른바 '조사의의 난'을 일으켰으나 이방원의 군사에 진압되었다.
이상 함흥차사에 관해 전해지는 전설을 옮겨보았는데, 그렇다면 이성계는 어떻게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을까? 바로 그 대목을 설명하는 것이 팔야리의 전설이다. 박순마저 소식이 없자 이방원은 다시 남재(南在, 1351~1419)를 사자로 보냈다. 남재 역시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한 장수로서 그로 인해 개국일등공신에 오른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성계와는 호형호제하던 막역한 사이였던 바, 어쩌면 차사로서는 마지막 인물일는지 몰랐다. 남재는 박순마저 죽었음을 감지하고 다른 다른 꾀를 썼다. 매사냥에 천착했던 이성계의 취미를 이용해 그를 끌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남재 또한 사자가 아닌 척 이성계를 찾았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매사냥으로 소일하고 있는데, 우연히 매 사냥패를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낚시로 말하자면 밑밥을 뿌린 것이었다.
워낙에 매사냥을 좋아하던 이성계는 쉽게 낚였다. 이에 태조는 남재와 함께 사냥에 나섰고 매를 쫓아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다 지금의 팔야리 근방에서 여덟 밤이나 지나게 되었는데, 혹 호랑이 사냥에 푹 빠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팔야리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아작'하고 잡아먹었다는 아작고개가 있고, 세조가 진접면 내각리의 이궁(離宮) 풍양궁에 머물며 사냥을 할 때 호환(虎患)을 당한 백성 두 사람에게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해 주고 쌀과 술을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근방에 서식하는 호랑이 사냥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이성계의 눈에 문득 삼각산이 들어왔다. 그는 비로소 남재의 꾀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한양과 팔야리는 그야말로 지척이라 결국 환궁하기로 마음먹고 왕숙천 부근에서 일박을 한 후 도성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하지만 이상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청에 의해 돌아온 것으로 돼 있고, 박순이 죽은 것도 함흥차사로 갔던 때가 아니라 조사의의 난 때 토포사로서 반란군을 설득하다 반란군 장수 박만의 칼에 횡사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는 함흥차사로 죽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