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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사(三舍)를 후퇴한 진문공(晉文公)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8. 23:58


    제 환공 다음으로 중원의 패자가 된 사람은 진(晉)나라의 문공(BC 697-628)이었다. 앞서 제 환공이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일을 설명한바 있는데, 어렵게 왕위에 오른 사실로 말하자면 진문공은 제환공보다 열 배는 더 힘들었을 터, 그 드라마틱했던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진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친족인 희씨(姬氏)가 봉토를 하사받아 다스리게 된 땅이었는데, 처음에는 제나라와 똑같이 별 볼일이 없다가 기원전 650년경 헌공(獻公) 때에 이르러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헌공은 즉위 5년에 여융(驪戎)을 멸망시키고 이어 곽(霍)·경(耿)·위(衛)·우(虞)·괵(虢) 등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시켰다.


    ~ 진나라는 희씨 계통의 왕족이 아니라 동성혼을 일삼던 태원(太原) 지방의 오랑캐 북적(北狄)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고, 희씨의 족보는 그들이 훗날 제 조상의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갖다 붙였다는 학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배제하기로 하겠다. 


    헌공은 여융을 정벌할 때 빼어난 미모의 여인을 얻어 첩으로 삼았다. 헌공은 이후 이 여인을 끼고 살았는데, 이 여희(驪姬)에게서 아들인 해제(奚齊)를 보았다.(기원전 665) 이것이 사태의 출발점이었으니, 문제는 무엇보다 이미 헌공에게는 태자로 정한 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 드라마 '중이전(傳)'에 나오는 여희



    첫째 아들은 신생(申生)이었는데, 헌공이 제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제강(齊姜, 제 환공의 딸)을 취해 낳은 아들이었다. 제강은 뛰어난 미인이었던 듯 헌공은 제 아버지가 죽자마자 부왕의 부인이었던 제강을 제 마누라로 삼았으니,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신생이었던 것이다.(이에 태자 신생은 평생 제 친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중국 드라마 속의 제강



    뿐만 아니라 헌공에게는 그 외에도 다른 아들들이 있었으니, 적(狄)족의 자매에게서 얻은 중이(重耳)와 이오(夷吾)였다. 그런데 다시 해제가 태어났고, 헌공은 이미 해제의 어미 여희에게 푹 빠져 있었던 바, 앞으로의 왕위 승계가 순탄치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여희는 미색뿐만 아니라 두뇌도 비상했던 듯  티 내지 않는 정중동(靜中動)의 작전으로 제 아들 해제의 왕위 계승을 획책했고,(아들의 왕위 계승에 욕심이 없는 듯하면서 은근히 밀어붙였다) 결국 이 작전에 말려든 헌공은 마침내 태자 신생을 곡옥(曲沃)에, 중이를 포(蒲)에, 이오를 굴(屈)로 보내 변방의 수비를 보게 했다. 사실상 궁에서 퇴출시킨 것이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됐던 여희는 태자 신생을 죽일 계략을 짰던 바, 신생이 왕궁에 왔을 때 머리에 꿀을 잔뜩 바르고 궁궐의 후원에서 신생을 만났다. 이에 벌들이 자연히 여희에게 달려들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신생은 벌을 쫓았는데, 마침 그 광경을 목격한 헌공에게는 그것이 마치 신생이 여희를 희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외에도 여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생을 흠집 내었고, 마침내 헌공은 신생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아들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는데, 그렇잖아도 삶에 의욕이 없던 신생은 소환 명령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희의 다음 타깃은 중이와 이오였을 터, 머잖아 그들에게도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심약했던 신생과 달리 이오는 아버지와의 대결을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굴성(屈城)은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갔는데, 반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중이는 제 어미의 나라인 적(狄) 땅으로 36계 줄행랑을 놓았다.


    이오는 아버지 헌공의 군대와 한참을 싸웠으나 그 역시 결국 진(秦)나라로 망명을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얼마 후 헌공이 죽고 마침내 혜제가 왕위에 올랐지만, 곧 친(親) 중이파 이극(李克)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에 혜제는 살해되고 그 어미 여희는 연못에 뛰어들어 못된 삶을 마감했다. 이상이 일명 ‘여희의 화(禍)'라 부르는 사건이다.



    여희는 춘추시대 7대 미인으로 일컬어지는데, 드라마에서는 한국배우 한채영이 열연했다. 



    이렇듯 변란이 일어나자 이오는 5년간 망명 생활을 하던 진나라의 군대를 빌려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니, 곧 진 혜공(惠公)이었다. 이오는 왕위에 오르자 크게 피바람을 일으켜 여희의 세력을 일소하고 친 중이파인 이극마저 제거하였다. 아울러 떠돌이가 된 제 형 중이마저 없애려 북적 땅으로 자객을 파견했다.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모든 화근을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이는 자신을 따라나선 신하들과 함께 다시 달아나야 했으니 노나라와 위나라를 거쳐 제나라로 갔는데, 오랜 떠돌이 생활로 이미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던 바, 위나라의 오록(五鹿) 땅에서는 구걸을 한 농민들로부터 흙으로 만든 도시락을 건네받는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나라에서는 그들을 국빈으로 받아주어 그간의 어려움과 배고픔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제나라 효공은 중이에게 새 장가까지 보내주었던 바, 중이는 오랜만에 살판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안주를 염려한 신하들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제나라를 떠나야만 했다. 이에 다시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나라를 떠돌아야 했는데, 이 당시 초나라의 성왕(成王)과 나눈 '퇴피삼사(退避三舍)'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당시 초나라 성왕이 '당신이 순조롭게 돌아가 군주에 오른다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겠느냐'고 묻자 중이가 '만약 당신의 군대와 싸우게 된다면 퇴피삼사, 즉 3사를 물려주겠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舍)'란 군대가 하루 행군하는 거리를 말하는 것이었으니 대략 60km 쯤을 후퇴해 싸우겠다는 것으로서 그만큼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에 성왕의 측근이었던 자옥(子玉)은 떠돌이 망명객 주제에 그 대답이 너무 건방지다며 중이를 죽이려 했으나 성왕의 만류로 이루지 못하였는데, 훗날 성복(城僕)이란 곳에서 벌어진 큰 싸움에서 그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즈음하여 모국 진(晉)나라에서는 혜공이 죽고 아들 어(圉)가 뒤를 이어 회공(懷公)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진나라 왕 목공(穆公)은 혜공과 회공 부자에 대한 나쁜 감정이 극도로 팽배해 있었던 터,(과거 흉년이 들었을 때 침공했던 일과, 볼모였던 어가 제멋대로 탈출하여 왕위에 오른 일 등으로 인해) 중이에게 자군의 군대를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중이는 진나라의 대군과 함께 당당하게 수도 강성(絳城)으로 향했고, 그 기세에 놀란 회공은 그대로 도망갔다. 이리하여 중이는 비로소 진나라의 옥좌에 앉게 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무려 62세, 천하를 떠돈 지 19년 만이었다.(기원전 636년) 정말로 길고도 고생스러웠던 왕의 길이었다. 



    진문공의 일러스트레이션


    문공의 유랑로



    강도(絳都)에 입성한 중이는 우선 그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고생을 한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다. 이후 은밀히 자객을 보내 도망간 회왕을 처치하고 천자의 나라 주나라에서 일어난 쿠데타에 개입해 이를 진압시켰다. 아울러 방랑 기간 중 자신에게 무례를 저질렀던 조나라와, 흙밥 도시락을 주었던 오록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원전 632년, 초나라는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북상하고 진나라는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했는데, 두 나라의 군사는 황하 근방 성복이란 곳에서 마주친다. 훗날 성복대전(城僕大戰)이라 불린 이 큰 싸움에서 공교롭게도 중이는 초나라의 대장 자옥과 마주치는데, 그는 앞서 자신이 한 약속대로 3사, 즉 60km를 물러난다. 


    하지만 그러고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바, 이 성복대전은 여러모로 진문공의 성가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진문공은 천토(踐土)라는 곳에서 각 나라 제후들을 불러 모은 회맹을 갖고 천하 패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니, 명실공히 춘추시대 제 2대 패자로서 군림하게 된다.  



    성복대전 전황도 ( 는 진,  는 초나라의 진로.  '퇴피삼사'의 방향 )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가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옛날 미생이라는 하급 관리가 기생과 어떤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기생은 약속을 가벼이 여겨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미생은 약속을 지키려 한참을 기다렸는데 그동안 장마로 물이 불었고 그럼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다가 결국 다리기둥을 붙잡고 죽었다는 얘기다.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 ‘장자(莊子)’, ‘회남자(淮南子)’ 등에 두루 실려 있고, 또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蘇秦)이 연왕(燕王)을 설득할 때 쓰이기도 하였다.(‘사기열전’) 


    자고로 약속에는 경중(輕重)이 없다. 작은 약속이든 큰 약속이든, 일단 입 밖으로 나온 것이라면 모두 지켜야 한다. 그것이 결국 사람을 키우는 것이니, 과거 진 혜공은 눈 앞의 이익만을 좇는 식언(食言)으로써 자신을 망쳤지만, 문공 중이는 약속을 지켰고(크게 신세 진 것이 없으니 지키지 않아도 무방했음에도) 또 그로 인해 결국 패자가 된 것이다. 





    하남성 형양시의 천토회맹 장소와 진문공의 동상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가 62세, 천하의 패자가 된 때는 66세였다. 이걸 보면 인생에 따로 '때'가 있는 것은 아닌 듯......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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