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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공망 여상과 육도삼략(六韜三略)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6. 08:04

     

    태공망이라는 호칭의 유래에 관해서는 앞서 '강태공과 그의 아내'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성은 강(姜)씨요, 이름은 여상(呂尙)이라 말하고, 강태공은 그 성과 호칭이 결합되어 훗날 낚시꾼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됐다는 설명을 마친 바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지적을 해주신 분이 있었다. 태공망의 이름은 여상이 아니라 상(尙)이요, 여(呂)는 씨족의 명칭이라는 것이다.


    거두절미히고 맞는 말씀이다. 옛 중국의 이름 체계는 현대와는 상이해 성씨(姓氏)에 있어서 성(姓)과 씨(氏)를 달리했다. 말하자면 여상은 이름이 아니라 여(呂)라고 하는 씨족 부락에 사는 상(尙)이라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그는 본래 강(姜)족 부락 출신의 상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후 여씨 부족으로 옮겨 오며 여 자(字)가 덧붙여졌을 뿐 이름은 원래 상(尙)이다.  


    이는 출신지가 훼밀리(Family Name)이나 미들 네임(Middle Name)이 된 서양의 인명과도 유사한 경우다. 이를테면 레오나르드 다 빈치는 빈치(Vinci) 지방, 혹은 빈치 가문 출신의 레오나르도란 뜻이니 그의 이름을 다빈치로 줄여 부르는 것은 오류라고 말하는 이치와도 같다. 그리고 또 이는 일본의 경우와도 유사하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덕천 가문의 출신의 이에야스다. 


    그 같은 귀족이나 무사들은 레벨이 업 그레이드되며 보다 나은 가문의 성씨로 편입되게 되는데, 따라서 일본 중세의 입지전적 소설 같은 것을 읽을 때는 아주 골치 아프다. 반면 근세에 동네의 특성에 따라 막 붙여진 다나카(田中, 밭 가운데), 나카무라(中村, 가운데 마을), 와타나베(渡邊, 나루터 주변), 기무라(木村, 나무 많은 마을), 시바다(柴田, 잡목 밭), 야마구치(山口, 산 어귀) 가와무라(川村, 강가 마을) 등의 성씨는 한없이 편하다. 


    다시 돌아와 말하면, 고대 중국에서 이름 앞에 씨족의 이름을 붙이던 관습은 정착사회로 들어오며 그 의미를 상실되게 되는 바, 태공망의 이름을 여상이라 불러도 특별히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차제에 덧붙여 말하자면 태공망을 영입한 문왕이나 무왕은 희(姬)라고 하는 여자 많은 지방의 귀족이었던 바, 그들의 성씨는 희씨였다.(문왕의 성명은 희창, 무왕의 성명은 희발이다)


    아무튼 여상은 서백(西伯, 서쪽 지방의 우두머리)인 희창(문왕)과 함께 돌아온 후 그의 군사(軍師)가 되어 은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하게 되는데, 도중에 문왕이 병으로 죽는다. 이에 그의 유업을 아들 희발(무왕)이 대신 잇게 되는데, 말하자면 희발은 아버지 희창의 죽음으로 엉겹결에 반란군의 영수가 된 셈인 바, 여러모로 걱정도 많도 한편으로는 의욕도 넘치는 마당이이었다. 그래서 태공망 여상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이것저것을 묻는데, 특히 병법에 관해 묻고 대답한 내용을 책으로 꾸민 것이 저 유명한 병법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이다. 




    서안에 있는 주 문왕릉과 표석

    '사기'에는 문왕이 서백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자 그가 죽기 10년 전부터 왕이라고 칭하고 이에 복종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육도삼략' 

    육도(六韜)의 '도'는 문자 그대로 감추는 기술이다. 병법이란 기본적으로 적을 속이는 데 있음을 말해준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 '육도삼략' 



    병법서 '육도삼략'은 그래서 무왕이 묻고 여상이 대답하는 대화체 형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본래 '육도'와 '삼략'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후세 사람들이 합본했다. 이 책의 편찬시기는 필시 희발이 주나라를 창업하여 제왕이 된 이후일 텐데, 아무튼 희발은 여상에 받은 병법 교육 등을 바탕으로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에 저 목야전투(牧野戰鬪)에서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은나라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수행한다. 


    이에 은나라 600년 왕조는 멸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지게 되는데, 이 '육도삼략'에는 바로 '소군(少軍)이 대군(大軍)을 이기는 법'이 실려 있어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군을 공격하고, 약한 군사력으로 강한 적을 공격해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군이 대군을 정면으로 공격할 경우 중과부적으로 반드시 패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반드시 야밤을 택해 수풀 우거진 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좁은 길목에서 적을 요격해야 합니다. 아울러 약한 군사력으로 강한 적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큰 나라의 협조와 이웃 나라의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희발은 목야전투에 임할 때 자군의 병력은 4만 5천 명이었지만, 기원전 1048년 맹진(盟津)에서 800여 명의 대소 제후들과 회맹을 갖고 40만의 우군을 확보한다. 이후 희발은 은의 수도인 조가(朝歌) 가까운 목야벌판에 진영을 갖추고 조가 성을 기습 공격하였는데, 이때 은나라의 군사들이 오히려 반란군의 편을 들었던 바, 싸움은 쉽게 끝나게 된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주왕은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 희발은 호경(鎬京, 서안 부근)에서 주나라를 세우니 그가 주나라의 1대 왕인 무왕이다.(기원전 1046년)



    목야전투 전황도

     는 무왕의 공격로,  는 제후군의 지원 경로


    맹진의 회맹 

    8백 제후가 맹진에 모인 사실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특정한 약속 없이 제후들이 스스로 몰려들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상이 날짜와 시간을 정해 동원령을 내린 후 시간을 어기는 자는 참(斬)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목야전투 상상도


    목야전투가 기록된 청동솥

    제기로 추정되는 이 청동솥에는 갑자일 오전에 주 무왕이 상(商=은나라)을 멸했다는 32자의 명문이 새개져 있다.

     


    이렇게 보면 언뜻 무왕의 승리가 운에 편승한 듯도 여겨지지만 '육도삼략'에 실린 승리에의 비결은 자못 엄격하다. 


    먼저 희발이 묻는다.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할 때 그들이 앞다투어 성벽을 오르고, 들판에서 싸울 때 앞다투어 달려가고, 물러나라는 징소리를 들으면 화를 내고, 나아가라는 북소리를 들으면 기뻐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에 여상은 '승리하는 장수가 되는 세 가지 길'을 언급한다. 


    "장수는 추운 겨울철에도 따뜻한 털가죽 옷을 입지 않아야 되고, 무더운 여름철에도 부채를 잡으면 안 되며, 비가 내려도 혼자만 우산을 써서는 아니 됩니다. 이러한 장수를 예의 있는 장수라고 합니다. 장수가 예를 갖추지 않으면 부하들이 따르지 않으며, 또한 병사들이 얼마나 춥고 더운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사진출처: 서울신문



    "좁고 험한 길이나 진흙탕을 행군할 때 장수는 반드시 말이나 수레에서 내려 몸소 걸어야 합니다. 이러한 장수를 노력하는 장수라 합니다. 장수가 노력하지 않으면 병사들의 수고를 모르게 됩니다."


    "들판에서 야영을 할 때 장수는 무릇 모든 병사가 누운 뒤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며, 밥을 먹을 때는 모든 병사들이 먹을 때 같이 먹어야 합니다. 병사들이 불을 피우지 않을 때 혼자만 불을  피워서도 아니 되는데, 이러한 장수를 절제 있는 장수라고 합니다. 장수가 절제를 하지 않으면 병사들의 배고픔과 추위를 알 수 없습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장수가 병사들과 함께 추위와 더위, 수고로움과 괴로움,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 한다면 병사들은 진격의 북소리에 기뻐 날뛰고, 후퇴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벌컥 화를 냅니다. 이리 하면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로 둘러싸인 험준한 성을 공격할 때 적들의 화살과 돌맹이가 빗발쳐도 병사들은 성벽을 오르는데 서로 먼저 오르겠다 다투게 되며, 들판에서 적과 마주쳐 수많은 칼날이 교차하더라도 병사들은 주저함이 없이 뛰어들어 적에게 달려들게 됩니다."


    "병사들이 이렇듯 전투에 몸을 기꺼이 바치는 이유는 그들이 죽기를 좋아하고 다치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오직 장수가 자신들의 허기와 배고픔, 추위와 무더위,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모두 알아주며 차근차근 모든 것을 살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도삼략'에는 다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적혀 있다.  


    "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치할 때 누군가가 시원한 탁주 한 통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장수는 술을 모두 강물에 부은 후 병사들과 함께 엎드려 마셨습니다. 단지 한 통의 술을 흐르는 강물에 부었으니 그 물에서 술맛이 날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그 전투에서 앞다투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습니다. 그 술이 자기들에게까지 마쳤다는 사실에 감격했던 까닭입니다."


    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에서 남보다 앞서려면 남과 같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그 남과 같지 않음을 제 이익에만 두는 사람은 곧 남보다 못하게 된다. 반면 남보다 앞서간 사람은 위와 비슷한 자기 희생과 절제가 있었을 터인데, 아마도 그 어려웠던 시절의 창업 1세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도 춥고 배고팠기에 타인의 추위와 배고픔을 알았을 것이고, 이에 그들의 어려움을 면케 해주기 위한 눈물나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 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창업 2, 3세들은 그와 같은 어려움과 배고픔을 알 길 없다. 그들이 남과 다른 것은 그와 같은 부모를 둔 것 뿐이거늘 그저 자신들이 잘나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줄 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지녔던 헝그리 정신,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같은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의 침체는 어쩌면 우리 부모 세대가 가졌던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데 대한 뼈 아픈 보상일는지도 모른다. 



    외신(CNN News)까지 탄 '갑질(Gap Gil)'. 사진출처: 아리랑 TV


    이 양반도 아버지 조중훈 회장에게 교육을 잘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더 어이없었던 그의 부인 이명희 


    거 참, 온 가족이 이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사진출처: JTBC 뉴스룸)





    서안에 있는 주 무왕의 능묘와 동상


    서안사건 역사의 현장

    주 무왕릉 앞의 장개석(왼쪽에서 두 번째)과 송미령. 가운데 모자 벗은 사내가 장학량으로,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은 서안을 방문한 국민당 총통 장개석을 구금한 뒤 모택동의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고 국공합작으로 일본군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이에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됐던 바, 빈사상태의 중국 공산당은 기사회생한다. 이 사진은 서안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의 사진으로 여겨진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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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