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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날 때를 놓친 천하제일 지략가 한신(韓信)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1. 15:01
정말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뜻을 품었다면 당장의 어려움은 참고 견뎌내야 한다. 그 어려움이란 우선은 배고픔이 가장 클 것이고, 다음은 가난에 따르는 모욕감일 것이다. 그 모욕감은 때로는 배고픔보다 더 괴로울 수 있을 터인데, 이상의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고 입신양명한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도 한신(韓信, ?-BC 196)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한신은 진(秦)나라 말기에 활약한 인물로, 그의 고단한 청년기를 비롯한 파란만장의 일생은 "사기" '회음후열전'에 잘 그려져 있다. 회음후(淮陰侯)라는 명칭은 그가 말년에 회음 지방 일대의 제후에 봉해졌기 때문인데,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도 그곳이었다.(회음 지방은 지금의 강소성이다)
한신의 출신은 한(韓)나라 왕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신은 그 한나라가 진(秦)에 망하며 회음 지방으로 들었왔을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에 대해서는 '예양의 의리' 참조) 하지만 망한 나라의 왕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그저 회음 지방에 사는 유약한 가난뱅이에 불과한 뿐이었다.
강소성의 위치와 회음 시절의 한신
그가 메고 있는 칼은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고, 들고 있는 죽간(책)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튼 다 좋은데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거..... (이하 중국 드라마 '대장군 한신'에서 캡처)
한신은 어린 시절 양친을 잃어 가난했다. 장사할 밑천도 없었으며 품을 팔 힘도 없었던 바, 같은 한나라 출신의 기생에 얹혀 살며 밥을 먹었는데, 그마나 그 기생이 죽은 다음에는 정말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래서 하급 공무원인 친구 집에서 눈칫밥을 먹기도 하고, 낚시질로 잡은 고기로 배를 채우기도 했으며, 빨래터의 표모(漂母, 남의 집 빨래해주는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러한 그는 당연히 주위 사람들의 멸시의 대상이 됐다.
표모의 일반지은(一飯之恩, 밥 한끼의 은혜)
표모가 낚시질하는 한신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밥을 나눠준다. 이때 한신은 나중에 기회가 오면 크게 보답하겠다고 말했다가 오히려 된통 쪽을 당한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뭘 바래? 그냥 불쌍해서 밥 좀 나눠 준 거 뿐이거늘."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불량배들이 지나가는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쓰지도 못할 칼을 뭐하러 차고 다니냐? 네가 정말 남자라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는 것이 요구였다. 잠시 망설이던 한신은 결국 그 자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지나갔다. 이것이 유명한 과하지욕의 스토리인데, 이 일로 한신은 더욱 마을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한신의 과하지욕(胯下之辱, 사타구니 아래를 기는 치욕)
과하지욕 스토리 현장
한신이 개망신을 당한 강소성 회한현의 과하교는 지금도 시장통이다. 이후 한신은 한(漢)나라의 대장군으로서 전국을 통일시킨 뒤 초왕에 봉해져 이곳에 오게 되는데, 이때 그 양아치를 찾아 중위라는 작은 벼슬을 내려 주었다.
한신의 일반천금(一飯千金, 밥 한끼를 천금으로 갚다 )
아울러 자신에게 밥을 주었던 표모에게는 천 금으로 보상하였고, 눈칫밥을 먹인 친구의 아내에게는 백 금을 하사했다. 이를 한영수 교수께서는 그들에게 상을 준 것이 아니라 모욕을 준 것이라는 멋진 해석을 내렸는데, 다만 본인의 한끼 음식을 나눠 주었던 표모 만큼은 정말로 고마웠던 듯 그녀의 사후 무덤과 사당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 즈음( BC 209년)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필두로 각지에서 진나라의 폭정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갑질에 저항한 진승과 오광의 난' 참조) 그 중 세력이 가장 강했던 자는 과거 초나라 땅에서 조카 항우와 함께 군사를 일으킨 항량이었다. 이에 한신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항량을 찾아가지만 일개 창수(槍手, 창잡이)에 배치되고, 항량의 사후 항우의 휘하로 들어가지만 역시 집극랑(戟,극이란 긴 창을 쓰는 창잡이)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한신은 항우를 위해 수차례의 전략을 내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받아주지 않았던 바, 그는 항우의 군대를 떠나 당시 세력을 얻어가던 유방에게로 간다. 하지만 유방의 군대에서도 겨우 치속도위(治粟都尉, 군량미를 관리하는 하급군관)를 면치 못하자 결국 탈영을 결심하고 도망간다.
유방의 군대에서도 푸대접을 받은 한신
그러나 단 한 사람, 유방의 참모 소하만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소하는 원래 패현(沛縣, 유방의 고향)의 관리로서 유방이 무명이었을 때부터 그를 도와 성장시켰던 바, 훗날 한신, 장량과 함께 한초삼걸(漢初三杰)로 불리게 될 정도로 유방에게는 절대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신이 탈영을 하자 소하는 기를 쓰고 쫓아가 한신을 데려왔고 결국 그를 유방의 참모로 앉혔는데, 이떄 소하가 한신을 평해 한 말이 국토무쌍(國土無雙)의 인재라는 유명한 말이었다. 전국을 두루 찾아도 비할 사람이 없는 인재라는 뜻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후 한신은 그야말로 국토무쌍의 능력을 발휘하였으니, 일거에 대장군이 된 그는 몰래 진창(陳倉)으로 나아가 항우군의 장한이 지키고 있던 함곡관 서쪽의 땅 관중을 빼았아 유방을 파촉 땅에서 탈출시키고,(* 함곡관에 대해서는 '갑질에 저항한 진승과 오광의 난' 참조) 또 항우가 제나라를 공략하는 틈을 이용해 아예 초나라의 수도 팽성까지 함락시킨다. 이때 한신이 진창을 공격할 때 쓴 전법이 '암도진창(暗道陳倉)'이란 말로 알려지게 되었던 바, 이후 암도진창은 적을 정면으로 공격할 것처럼 위장한 뒤 후방에서 공격하는 계책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기원전 203년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나라는 형양과 성고를 사이에 두고 일전일퇴를 거듭하며 대치하게 된다.
형양 성고 전투 전황도. → 은 한나라, → 은 초나라의 진로
옛 형양성의 자취
그런데 아직까지는 초나라가 수적으로 우세하였으므로 한신은 배후를 공격하여 위기를 벗어나고자 군대의 일부를 빼 초나라의 우군인 위나라부터 공격했다. 위나라 왕 위표는 임진관(臨晉關)에서 도강하는 한신군을 막았으나, 한신은 강을 건너는 척 위장만을 한 후 몰래 군을 빼돌려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하였다. 이후 한신은 위표를 생포하여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음으로 기원전 204년, 한신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한신은 면만수(綿曼水) 강가에서 그 유명한 배수(背水)의 진을 쳤는데, 진을 설치함에 있어 강을 등지는 배수의 진은 병법의 기본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조나라 왕 조헐은 한신의 병법을 비웃었으나 한나라 군대는 결국 조나라를 격파하고 조헐을 사로 잡았다. 한신이 배수의 진을 친 이유는 자국의 군대가 잘 훈련된 군대가 아니라 일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등 뒤에 땅이 있다면 위급할 경우 모두 제 살 길을 찾아 도망가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신은 병법을 역으로 이용한 강수를 둔 것이었으니, 이후 '배수진(背水陣)'이란 말은 천고의 명언이 되었다.
한신은 그 여세를 몰아 다시 제나라를 공격했는데, 이 갑작스런 공격에 제나라 왕은 초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항우는 20만 대군을 보내 지원하였다. 한신은 초나라와 전투 중에 패해 달아나는 척하다가 초나라 군사들이 유수(濰水)에 이르렀을 때 미리 준비해둔 둑을 터트려 초·제 연합군을 대파하고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어 한신은 연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초·한전에서 유래된 장기
BC 204년경 초나라와 한나라의 세력 범위
한신이 배수진을 친 정형(빨간 밑줄)과 수공을 한 유수(파란 밑줄)
배수진을 친 후 총공격령을 내리는 한신
배수진의 장소인 하북성 정형현의 면만수
이로써 항우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한신은 기원전 202년 마침내 해하(垓河)에서 초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리고 한신은 군사들에게 슬픈 초나라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였던 바,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들은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고향 생각에 센티멘탈해져 사기가 상실됐고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항우는 결국 대패하여 오강(烏江)까지 후퇴한 후 그곳에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이후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라는 의미의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아무에게도 도움이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를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안휘성 영벽현의 사면초가 장소
오강의 위치
항우가 최후를 맞은 하북성 양자강 지류 오강
항우의 최후를 지켜보는 대장군 한신
이렇듯 한신은 숱한 고사성어를 만들어내며 신출귀몰한 지략과 전략으로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 공으로 초왕(楚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후 모반죄가 씌워져 체포되는데, 이때 한신은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을 탄생시킨다. '날쌘 토끼를 사로잡으면 사냥개는 잡아먹히고, 높이 나는 새를 잡으면 활은 곳간에 처박힌다'라는 말로서, 우리가 잘 아는 '토사구팽(兎死拘烹)'의 고사성어가 여기서 비롯됐다.
다행히 한신은 모반죄가 입증되지 않아 목숨을 건졌고 다만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된다. 이때 유방과 나눈 대화 중에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을 탄생시켰다. 유방이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군사의 수를 물었을 때, 한신은 10만이라 답했고, 자신의 역량은 다다익선이라 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었다. 이에 유방이 다시 '그런 네가 왜 내게 사로잡혔는가'를 묻자, '폐하는 장수를 다스리는 장수이기 때문'이라 했다는 대답 또한 더불어 유명하다.
한신은 모반죄에서 벗어났음에도 결국 천수를 다하지 못했으니,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에게 의해 진짜 '팽(烹)' 당해버리고 만다. 팽형(烹刑)은 끓는 물이나 기름 속에 빠뜨려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그는 어차피 살 길이 막혔음을 깨달았는지 목숨을 구걸함이 없이 스스로 기름솥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가솔들 또한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았다.
여태후에 의해 붙잡힌 뒤 최후를 예감하는 한신
고향 회음에 남은 흔적이라곤 그가 낚시하던 자리 뿐이다.
유방에 의해 토사구팽당한 자는 사실 한신 뿐만이 아니었으니 한나라 최고의 맹장이었던 경포와 팽월, 그밖에 장도와 진희도 죽었으며, 동서이자 홍문의 연회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번쾌마저 죽이려 했으나 붙잡혀 오는 도중 유방이 병사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 수 있었다. 이렇듯 유방의 측근은 모두 제거되었으나 오직 한 사람, 장량만은 일찌감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
장량이 숨은 장가계
한신을 제거한 유방의 부인 여태후는 군사들을 풀어 장량마저 잡으려 했다지만 이 깊은 산 속 어디서 그를 찾겠는가?
장량은 이곳에서 신선이 됐다는 전설이다. 이 심산유곡은 이후 장가의 세계, 즉 장가계로 불렸는데 신선까지는 모르겠으되 그가 천수를 누린 것은 아마도 젊어 읽은 '황석공 소서'의 덕분이 아닐런가 한다. 장량은 젊은 시절 황석공이라는 기인을 만나 '태공망 병법서'와 '소서'를 전수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소서(素書)는 비기(秘記)로 해석되어질 수 있으나, 읽어보니 처세술서 같은 것이었다.
'장량'이 죽은 500년 뒤 그의 무덤에서 도굴꾼에 의해 발굴돼졌다는 '황석공 소서'는 시중의 번역본도 꽤 많는데, 내용이 서로 달라 어느 것이 진본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병법을 다룬 내용과 '용마하도' 어쩌구하며 점치는 법이 실린 책은 다 가짜다. '황석공 소서'는 기본적으로 처세의 도를 다룬 처세법 책이다.
협서성에 있는 장량의 사당(장량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사기'에도 명확지 않다)
물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한신은 두뇌가 비상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그 죽음이 특히 안타깝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는 앞서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니 그 한번은 기원전 204년 그가 제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이고,(이때 한신의 참모 괴철은 한신에게 이곳에 눌러 앉아 유방,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해 다스리라는 '천하삼분지계'를 조언한다. 한신 또한 죽음에 앞서 괴철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또 한번은 그가 유방에게 모반죄로 붙잡혔다 풀려났을 때이다.
기원전 196년, 한신은 황제 유방이 거록(鋸鹿) 태수 진희의 반란을 평정했으니(진희는 유방에게 당할' 팽'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를 붙잡기 위해 유방이 직접 출정했다) 입궁해 여태후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리라는 전갈을 받는다. 여태후의 복심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다른 길이 없음에 포기하고 간 것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으나 좌우지간 한신은 입궁했다가 그대로 붙잡혀 죽고 마는데,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전에도 한번 유방에게 홍역을 치룬 경험이 있었다.
이후 한신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다가 여태후의 잔꾀에 당하게 된 것인데, 그때 장량은 이미 몸을 감춘 후였다. 처신에 있어서는 몇 수 위에 있었다 할까..... 그럼에도 한신은 괜히 미적거리다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미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몸이 아팠는지 그 또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는대로 분명한 건 그 전에 도망가려 했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씀드리거니와, 사표(辭表)를 써 품에 품고 다니는 분이나 직간접적으로 퇴사(退社)의 압박을 받은 분은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는 게 좋다. 본인 또한 공연히 미적거리다 추한 꼴을 당한 경우지만, 주변에서 사표를 썼다 되살아난 사람은 김성주 아나운서 한 사람밖에 못 봤다.
이것저것 눈치 보다 앉아서 피 보느니
나가서 용감히 달리는 게 낫다는 말씀!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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