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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양(豫襄)의 의리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5. 30. 06:54

     

    주(周)나라의 제후국들이 발호해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려 싸운 것이 춘추시대라면(BC 770-403) 이 춘추시대의 여러 제후국들이 7개의 나라로 고착되어 싸운 것이 전국시대라 할 수 있다.(BC 403- 221) 이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통일제국을 이룬 사람이 진나라의 정왕(政王, 시황제)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당대의 사람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라는 역사 책의 이름으로부터, 전국시대의 명칭은 전한(前漢) 때의 사람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책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전국책'은 전국시대에 활약한 모사(謀事)들의 책략과 일화를 모아 편찬한 33권의 책이다. 

     

    그렇다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어떻게 나뉜 걸까? 역사가들이 말하는 그 시대적 분기점은 삼진(三晉)의 분리이다. 춘추시대의 강국이었던 진(晉)나라가 한(韓), 위(衛), 조(趙)의 세 나라로 나뉜 것인데, 이로써 전국 7웅(雄), 즉 진(秦), 초(楚), 연(燕), 제(), 한, 위, 조의  일곱 나라가 형성되어 180년 동안 박 터지게 싸우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 말하려는 것은 3진의 분리 과정에서 벌어진 한 사건으로, 춘추 전국시대의 그 많은 전쟁과 사건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일이라 따로 소개하려 한다. 출전은 유향의 '전국책'과 사마천의 ‘자객열전’인데, 지금 소개하려는 인물은 ‘자객열전’의 많은 자객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며 멋진 자객이다.

     

     

    전국시대 지도 / 빨간색 선 안의 한, 위, 조, 세 나라는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에서 분리됐다.
     

    춘추시대의 진나라는 상당한 강국이었다. 흔히 춘추 5패라 부르는 다섯 명의 패자(覇者, 세상을 제패한 인물) 중에서 진의 문공(文公, BC 697-628)은 어느 분류를 막론하고 꼽히며,(패자로 꼽는 인물이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문공 이후로도 진나라는 계속 강국으로 행세하였다.

     

    그런데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하극상이 횡횡하여 귀족들이 저마다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제 영토를 넓히려 싸움질을 해댔는데, 특히 육경(六卿, 여섯 제후)이라 불리던 범씨, 중행씨, 지씨, 한씨, 조씨, 위씨의 세력이 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사람은 지씨 가문의 대표 지백(知伯)으로, 그는 먼저 범씨, 중행씨를 쓰러뜨렸다. 그 두 세력을 제거한 지씨는 이어 조씨에게 영토의 일부를 떼 달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조씨 가문의 조양자(趙襄子)는 이를 거절했던 바, 곧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지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조양자를 도와 한씨와 위씨가 원군으로 오면서부터 싸움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로써 지씨는 결국 망하고 말았고, 조씨, 한씨, 위씨는 지씨의 땅을 나눠 각각 독립을 하였던 바, 이것이 삼진의 분리였다. 

     

    ~ 앞서 말했듯 이 삼진 분리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나누는 기준이 됐는데, 그 제후국 진나라는 없어지고 셋으로 독립한 자들이 각각 왕을 칭한 것이 계기였다. 이에 나머지 나라들도 주황실에서 내린 제후의 작위를 버리고 왕을 칭하게 되었던 바,(그 전엔 주황실로부터 직접 작위를 받지 아니한 남방 오랑캐국 초나라만 왕을 칭했었다) 이제 주(周)왕실을 보호한다는 존왕양이의 낭만(?)은 사라지고 서로 대등한 왕으로써 오직 먹느냐 먹히느냐의 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밑줄 친 진양성 싸움에서
    한씨의 한호와 위씨의 위구가 조양자를 도움으로써
    지백의 가문은 절단나고, 진나라는 한, 위, 조의 3진으로 분리된다.

     

    이야기는 그때 죽은 지백의 가신 예양(豫襄)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양은 원래 지백의 가신이 아니라 범씨의 휘하에 있었다. 그렇지만 중용이 안 돼 중행씨에게 갔다가 중행씨가 지씨에게 정복되며 지백의 휘하에 들게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양은 유독 지백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여 그에 대한 복수를 하려 들었다. 그리하여 산 속에 숨어 무술을 연마하며 호시탐탐 조양자의 목숨을 노렸는데, 어느 날 그 기회를 만들었다. 죄수의 노역을 가장해 조양자의 집무소 건설 현장에 잡입한 그는 남 몰래 변소 속에 숨어들어 조양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점심 때 쯤 조양자가 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뛰고 온몸이 저려왔다. 섬뜩한 기운을 느낀 조양자는 안을 뒤져보라고 명령했고 곧 비수를 숨긴 예양이 발각되었다. 조양자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었던 바, 우선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물었다. 예양은 숨김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지백의 가신이었던 예양이란 사람이오. 주군의 복수를 위해 숨어 당신의 목숨을 노린 것이오." 

     

    그리고는 목을 늘였는데, 그의 목이 달아나려는 찰나 조양자가 예양을 구원했다. 

     

    "잠깐! 이 자를 죽이지 말라. 지백은 이미 죽었고 그 자손들도 멸절한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것을 보면 이 자는 참다운 의인이다. 이 자를 살려줘라."

     

    예양은 이렇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조양자를 향한 복수의 칼은 거두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복수의 칼을 더욱 열심히 갈았던 바, 숯을 삼켜 목소리를 바꾸고 옻을 발라 얼굴도 망가뜨렸다. 한번 발각됐던 까닭에 완전한 변신을 꾀한 것이었다. 우연히 그와 마주친 친구가 용케 알아보고 그렇게까지 하는 연유를 묻자 예양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뱉는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예양은 이후 다시 조양자를 노렸다. 하지만 그동안 조양자는 기존의 강주성을 떠나 거성(巨城)인 진양성으로 옮겨갔으므로 접근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데 기회가 왔던즉 조양자가 진양 분수(汾水)에 놓인 적교(赤橋)라는 다리 준공식에 참석하러 온다는 것이다. 기회를 잡은 예양은 칼을 품고 다리 밑에 숨었다. 조양자가 다리를 지나가면 곧바로 뛰어올라 벨 참이었다. 

     

    그런데 조양자가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그가 탄 말이 갑자기 멈춰 서면 움직이지 않았다.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측근들이 다리 밑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객이 숨어 있었다. 예양을 본 조양자가 이번에는 심히 꾸짖었다. 

     

    "나는 한번 너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도 고마움을 모르고 다시 나를 노리느냐?"

     

    예양이 답했다. 

     

    "그대가 나를 구해준 것은 소은(小恩)이요, 내가 지백에게 입은 것은 대은(大恩)이다. 나는 그 대은을 갚으려 한 것이오."

     

    조양자가 다시 물었다. 

      

    "일전에 알아보니 너는 지씨를 섬기기 전, 범씨와 중행씨도 섬겼었다. 그 범씨와 중행씨는 다름아닌 지백에게 죽었다. 그런데 너는 지백에게 복수하기는커녕 그를 위해 나를 노리고 있다. 이건 어불성설이 아니냐?"

     

    이에 예양이 다시 답했는데, 이 또한 천고에 남은 유명한 말이었다. 

     

    "그렇소. 나는 전에 범씨와 중행씨를 섬긴 일이 있소. 허나 그들은 나를 범부(凡夫, 평범한 사내)로 대했기에 나 역시 범부로서 행동했을 뿐이오. 하지만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 나라의 무사)로 대우했기에 나도 마땅히 국사의 예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國士遇之國士報之)" 

     

     

    조양자와 예양이 마주한 적교는 지금은 예양교로 이름이 바뀌었다.(이 다리가 정말로 2400년 전의 그 다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하북성 형태현 형태시의 예양교와 그 푯말

     

    그 말을 들은 조양자는 탄복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목숨을 거두려는 듯했다. 

     

    "너의 지백을 향한 충절은 이미 이루었다. 아울러 나 또한 너를 충분히 용서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살려줄 수가 없겠구나."

     

    그러자 예양이 감읍하며 답했다. 

     

    "당신은 이미 나를 관대히 용서했소. 필시 세상 사람 모두 당신의 어진 행동을 칭송할 것이오. 나 또한 죽어 마땅하나 다만 한 가지, 죽기 전 당신의 옷이라도 벨 수 있게 해주시오."

     

    조양자는 원래 통이 큰 사람이었던 바, 예양의 마지막 부탁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하늘로 날렸다. 이에 예양은 튀어오르며 그 옷을 세 번 베었는데 벤 곳마다 모두 피가 배어났다고 한다.(이것은 전설 상의 이야기지만 괜히 그럴듯하다)

     

    조양자의 옷을 벤 예양은 곧바로 자신의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형태시 예양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는
    이에 관한 그림과
    글이 새개져 있다.

     

    이 예양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따로 사설을 달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냥 그 자체로 멋질 뿐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나는 여기서 예양의 의리나 충절보다도 그가 모셨다는 지백의 인격을 주목하고 싶다. 아울러 우리가 살면서 지백 만큼의 은혜를 남에게 베푼 적이 있는가를 나 스스로를 포함해 한번 쯤 물어볼 일이다. 

     

    혹시 베풀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백이 예양에게 심어준 신뢰 이상의 신뢰와 인정을 베푼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때로는 오히려 그것이 화(禍)로 돌아와 크게 속상했을는지도 모른다.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며..... 하지만 혹간은 그것이 은혜로써 돌아올 때가 있다. 그것도 자신이 아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이에 다음 회에는 그와 같은 고사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제 환공, 진 문공에 이어, 춘추시대의 패자로 등극하게 되는 초장왕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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