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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5. 29. 08:44


    일본의 전국시대는 지역의 헤게모니(나와바리라는 속어가 이해 편할 듯)를 장악하기 위한 전국의 다이묘(영주)들이 발흥한 시기로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가량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군웅 할거의 시대는 잘 알려진 다음 3인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는 바, 오다 오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그들이다. 그들 3인은 지역 헤게모니가 아닌 전국 통일을 꿈꾼 자였다. 


    잠시 소설을 빌리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생을 그린 ‘대망(大望)’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풍운아’에의 두 사람은 시종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인물로 묘사되나, 오다 오부나가를 그린 ‘대명(大命)’ 등의 소설에서의 그의 유년은 조금 얼뜨고 천방지축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바, 오히려 나고야 성주이자 명장인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쪽이었다.



    오다 가문의 휘장



    하지만 그의 숨은 역량은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자 바로 빛을 발휘하니, 후계 자리를 놓고 동생 노부유키를 지지하던 일족들과의 싸움에서 나고야군 700명 군사를 직접 이끌고 나가 7천 명의 노부유키 군을 격파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직속군대를 조직하였는데, 기존의 병제(兵制)와는 다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대였다. 농사를 지으며 훈련을 받다 전투가 벌어지면 곧바로 투입되는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또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순수 용병부대를 꾸리기도 했던 바, 모두가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거의 기상천외한 발상들이었다.



    오다 노부나가(1534-1582)의 초상



    이 같은 그의 별난 행동은 늘 가신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우리 주군은 늘 일만 벌인다’는 불평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후 약 8년간 벌어진 중부 오와리 지방의 대소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여타의 불만을 잠재웠다. 이에 그는 1560년 오와리를 통일하는데, 그 과정의 정점은 그해 벌어진 오케하자마 전투였다.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침공한 스루가의 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5천의 병력으로 가볍게 격파시킨 것인데, 이로 인해 그는 바야흐로 전국구 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노부나가는 여세를 몰아 1568년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교토를 손에 넣었다. 그는 이때부터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다'는 '천하포무(天下布武)' 인장을 사용하며 자신의 목표가 천하통일에 있음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부나가의 행동은 당연히 주위 영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는 자신의 뜻에 대항하는 적들을 물리치며 야망에 한걸음씩 나아갔다. 아울러 그는 '라쿠이치 라쿠자(楽市楽座), 즉 문자 그대로의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상업진흥책을 펼쳤던 바, 활발한 무역과 시장거래는 든든한 경제력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 



    사가현 아즈치 성 고고박물관에 전시된 오다 노부나가의 '천하포무' 인(우리나라 500원 동전만 하다)



    아울러 그는 출신 성분과 관계 없이 인재를 등용했으며, 당시 강력한 불교세력이었던 엔랴쿠지와 혼간지 세력을 힘으로 굴복시킨 반면 외래 종교에서는 개방적이어서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천주교에도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Daum백과] 오다 노부나가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양은경,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넘기 힘든 거대한 산이 버티고 있었다. 풍림화산(風林火山) 전법으로 이름 높은 전국시대 무패의 장수 다케다 신겐(竹田信玄)이었다. 손자병법에서 비롯된 풍림화산은 '바람처럼 빠르게숲처럼 고요하게불길처럼 맹렬하게산처럼 묵직하게'라는 의미로서, 상황에 따라 군사를 적절하게 운용하는 다케다 신겐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전법이었다. 그 다케다 신겐은 1572년 겨울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을 거의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이 있었던 바, 천하의 노부나가로서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케다 신겐(1521-1573)의 초상

    첩보전과 기마전술에 능했던 전국시대 유일의 무패 장수로, '가이(지금의 야마나시현)의 호랑이',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등으로 불렸다. 그의 군대는 지금도 전국시대 최고의 전투부대로 평가받는다. 


    다케다 가문의 휘장



    게다가 당시 무로막치 막부(室町 幕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군의 미카타가하라에서의 패배를 기화로 () 오다군 결성, 다케다 신겐을 필두로 하는 아사쿠라아자이 연합세력을 이끌고 오다군을 포위하고 공격해들어왔다. 오다 노부나가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 1573년 자신의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병사하고 말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상대를 급습해 아사쿠라아자이군을 전멸시켰다. 노부나가는 다시 그 여세를 몰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폐위시키니 무로막치 막부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1336-1573) 바야흐로 노부나가의 1인 독주 시대가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다케다 신겐은 죽었지만 그의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가 이끄는 군대는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의 군대는 자타가 인정하는 전국 최강의 정예 기마병이었던 바, 오다 오부나가로서도 절대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때 다시 한번 운명의 여신이 노부나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1543년 규슈(九州)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의 선원으로부터 도주(島主) 토키다카가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서양의 철포가 오다 노부나가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우리에게는 조총으로 알려진 무기다)



    동양사를 바꾼 무기, 일본에 흘러든 포르투갈의 철포 2정


    철포가 전래된 규슈 남단의 섬 다네가시마



    이 철포와 함께 전국의 패권도 오다 노부나가에게 넘어왔다. 그 2정의 철포를 역설계해 대량생산된 철포로써 무장한 노부나가의 군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케다 카츠요리의 기마군단을 쓸어버렸다. 그와 같은 철포의 공격에 다케다군의 기마병은 무기력하게 쓰러져나갔으니, 그로부터 17년 후인 1592년 조선의 충주 탄금대 벌판에서 신립 장군의 8천 기마병이 무참히 박살난 그 비극의 전주곡이 먼저 나가시노 벌판에서 울려퍼졌다.


    (1만5천 명의 케다 기마군은 3000명의 조총부대 앞에 8시간 만에 전부 궤멸당했던 바, 케다 카츠요리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병사는 단 6명뿐이었다고 한다. 이 날의 나가시노 전투는 이후 전투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과정에 있어서의 주요 전투 

    (그림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059&cid=42998&categoryId=42998)

     

     

    15823, 덴모쿠산 전투에서 다케다 가문의 잔존 세력까지 완전 진압한 오다 노부나가는 나머지 세력을 일소해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한 공격에 나섰다. 그 나머지 세력이란 아래 지도 오른쪽 노란색 지역의 호조 가문, 파란색 지역의 우에스기 가문, 그리고 왼쪽 보라색 지역의 모리 가문 뿐이었다.(오른쪽 분홍색의 다케다 가문은 이미 멸망된 상태였고, 맨 아래 고동색의 도쿠가와 가문은 우군이었다) 노부나가는 그중 가장 비우호적인 모리 가문을 정벌하기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냈다.

     


    전국시대 말기 지도와 혼노지의 위치



    사실 이  정벌은 시간의 문제였으니, 이 무렵 탄생한 그들의 속담대로 모리군은 철포(뎃뽀)를 갖추지 못한 거의 무뎃뽀(むでっぽう)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모리군의 저항은 의외로 강했던 바, 정벌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오히려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급히 SOS를 청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이끌어 구원하게 하고는 자신도 지원을 위해 가는 도중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그날 6월 2일 밤 또 하나의 속담이 탄생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것이었으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케치 미쓰히데는 그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급습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불더미 속에서 이들과 맹렬히 맞서 싸웠으나 그의 병력은 호위병으로 데려온 100명 정도가 전부였던 바, 결국은 궁지에 몰려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가 그때 남긴 아래의 말, 즉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한 마디는 '적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의 속담이 되었다.  



    "적은 호노지에 있다"


    교토 혼노지 입구. 오다 노부나가의 사당 푯말이 서 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왜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했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다.(아케치 미쓰히데는 13일 오다군과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싸우다 죽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은 그가 천하를 통일하지만 다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 일본의 주인이 된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노부나가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라고 표현했지만, 21세기 들어 노부나가의 난세 경영이 일본 재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CEO 오다 노부나가의 경영 10법칙'과, '오다 노부나가의 카리스마 경영'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후자의 저자는 독일인이다. 



    앞서 보았듯 천하 통일 직전까지 이룬 그의 난세 경영은 그야말로 충줄한 것이었다. 이에 비록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가고 말았지만 그가 다시 주목을 받을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너무도 중요한 한 마디를 남기고 죽었다. 적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농담으로 '같이 술 마시다 화장실 못 간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껏 술 안주 삼아 남을 씹었으니 내가 화장실에 가는 순간 나도 술 안주에 오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스개 소리지만 언중유골임은 분명한데, 만일 정말로 무언가가 두렵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뒷담화가 아니라 앞서 내가 지껄였던 어느 사람에게 대한 뒷담화가 되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나의 뒷통수를 정확히 때릴 수도 있음이다. 특히 그 안주거리가 된 상대가 상사였을 때는(대부분 그러하지만) 더욱 골치 아픈 사태가 발생한다. 


    사실 술 한잔을 곁들인 남의 뒷담화는 그 재미가 쏠쏠하다. 따지고 보자면 회사 내에서 하루 종일 쌓인 스트레스의 해소에 있어 친한 직장 동료와 나누는 술자리 뒷담화만한 명약도 없다. 하지만 나의 가장 가까운 직장 동료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경쟁상대임을 잊어선 안 된다. 적은 혼노지에 있으므로.





    불길 속에서 자결을 택하는 오다 노부나가(사진출처: NHK)


    아케치 미쓰히데(1528?-1582)의 초상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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