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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왕(楚莊王)의 리더십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5. 31. 05:50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한 사람인 초나라 장왕(재위 BC 613-591)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에는 좋은 이야기도 있고 나쁜 이야기도 있는데, 어찌됐건 그가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허나 처음 즉위해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듯 3년 동안이나 술독에 빠져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간(幹)하는 자는 참(斬)하겠다는 엄명까지 내렸다.


    참다못한 그의 신하 오거(伍擧)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돌려 간했다.


      “전하. 언덕 위에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 새가 있습니다.(三年不蜚又不鳴) 그 새가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장왕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알고 있소. 그 새가 3년 동안 날개를 접고 날지도 울지도 않고 있지만, 한번 날았다 하면 반드시 하늘을 찌르고, 한번 울었다 하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三年不翅不飛不鳴必飛沖天一鳴驚人)"


    장왕은 생각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기원전 613년 아버지 목왕(穆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국정이 심히 문란했었다. 이에 3년 간 궐내의 추이를 살피며 충신과 간신을 가려냈던 것이니, 그동안 충신 오거와 소종(蘇從) 등을 얻고 이후 간신 수백 명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초장왕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오거



    그로부터 수년간 내치를 공고히 한 장왕은 용(庸)나라 공격을 시작으로 대규모 북벌에 들어가 승승장구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06년에는 오랑캐 땅인 서융(西戎)을 정복한 후,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 낙양 근방까지 올라가 대규모 열병식을 가졌다. 그 품이 여차하면 천자의 나라까지 점령하겠다는 기세였는지라 주의 정왕(定王)은 중신인 왕만손을 보내 장왕을 달랬다.   


    왕만손과 몇 마디 나누던 장왕은 문득 화제를 돌려 주나라 왕실의 전래 보물인 세발 청동솥에 관해 물었다. 


      "듣자니 왕실에 유명한 정(鼎, 세발솥)이 있다던데, 크기가 어느 정도고, 무게는 얼마나 되오?"


    뜬금 없는 장왕의 질문인즉, 주나라는 이제 그 솥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으니 자신이 대신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세발솥은 자고이래로 천자의 상징이자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었다. 기실 다른 제후국들이 모두 공(公)을 칭할 때 그가 홀로 왕(王)을 칭함도 천자와 맞먹겠다는 수작에 다름 아니었다. 이를 눈치챈 왕만손이 짐짓 꾸짖었다. 


      "정(鼎)의 중요함은 크기와 무게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덕(德)의 유무입니다. 정은 덕의 유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니, 덕이 없으면 솥이 아무리 작아도 무거워서 옮기기 힘들 것이며 덕이 있으면 솥이 아무리 커도 가벼울 것입니다. 지금 주나라가 비록 쇠(衰)하기는 했으나 천명(天命)이 바뀌지 않았던 바, 아직은 정의 무게에 대해 논할 때가 아닌줄 압니다."


    왕만손의 대답인즉, 네가 그 솥을 갖고 싶다면 덕을 키우고 민심을 얻을 일이지 왜 경거망동하게시리 무력시위나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초장왕은 다음 날 아침 모든 진을 거둬 초나라로 돌아갔다. 자신의 잘못은 흔쾌히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후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뜻의 문정경중(問鼎輕重⇐問鼎之大小輕重)은 왕좌를 노리거나 상대방의 실력을 떠보는 마음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주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순화대정(鼎)

    중국 협서성 순화현 박물관에 전시 중인 대형 청동솥으로(높이 122cm, 구경 83cm, 무게 226kg) 초장왕이 물어본 솥이 아마도 이와 유사했으리라 여겨진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무게가 천균(3만근)이라 했으나 과장일 듯하며, 나중에 진시황이 함양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이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초장왕의 동상과 청동솥

    초장왕이 주 왕실의 청동솥에 관해 물었다는 얘기는 너무 유명한지라 예의 청동솥이 함께 조형됐다. 




    이외에도 초장왕에 관한 고사는 무척 많다. 하지만 그 백미는 아무래도 '절영지연(絶纓之宴)에 관한 일일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장왕은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신하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주연(酒宴)을 가졌다. 그런데 해가 저물고 모두들 술이 거나할 쯤 강한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졌다. 이때 누군가가 장왕의 애첩 허희(許姬)를 껴안았는데, 이때 허희는 기지를 발휘해 재빨리 상대 관모의 끈을 낚아채 끊었다. 그리고는 곧장 왕에게로 가 고했다. 


      "전하. 방금 전 어떤 자가 야음을 틈타 저를 추행했습니다. 제가 그 자의 관끈을 끊어 가졌사오니 어서 불을 밝혀 그 치한을 잡아주세요."


    이 말을 들은 장왕이 잠시 생각하다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요. 헌데 분위기가 너무 무거운 것 같소. 그러니 이제부터 모두들 관끈을 끊어 모자를 벗고 격식 없이 즐기도록 하시오. 오늘 과인과 함께 술을 마시는 데 있어 관끈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이 자리를 기쁘게 생각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겠소.(今日與寡人飮, 不絶冠纓者不歡)"


    (보통 사람 같았으면 바로 뚜껑이 열려 "어떤 새끼야? 당장 자수해!" 했을 텐데...... 아무튼 왕은 그날 밤 크게 삐진 허희를 한참 달랬다고 한다) 


    이에 신하들은 관끈을 풀거나 끊었고 이후 불은 다시 밝혀졌다. 그리고 3년 뒤 초나라는 진(晉)나라와 한판 붙었는데, 이번에는 크게 패했고 장왕 역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장왕이 절망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 홀로 진나라 군사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왕을 구해 탈출했다. 


    포위망을 벗어난 장왕이 그때 비로서 살펴보니 이름도 모르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장수였다. 장왕이 의아히 여겨 만신창이의 장수에게 물었다. 


      "과인이 그대에게 특별히 잘해준 기억도 없는데, 그대는 어쩐 일로 이리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

      "연유를 물으시니 말씀드리겠읍니다. 소인이 그날 밤 주연에서 관끈 떨어진 바로 그 치한이기 때문입니다."

    장수는 그 말을 마친 후 곧 절명했다. 


    이 일화가 실려 있는 사서는 많은데, 어떤 책에서는 장웅(蔣雄)이라고 장수의 이름을 밝힌 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보다는 그저 용감한 장수라는 의미 같다.(그는 여러모로 용감한 장수임에 틀림없다)


    이후 관끈이 끊어진 연화라는 뜻의 '절영지연', 혹은 '절영지회(絶纓之會)'는 '남에게 너그러운 덕을 베푸는 행위'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해석도 좋지만 이 절영지연은 시사하는 바가 정말로 큰 이야기다. 덕을 베풀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뿐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그 보답이 돌아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덕은 베풀기 힘들기에 그 보상이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보상을 위해 덕을 베풀라라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베풀면 좋다. 덕을 베푼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덕을 베풀 수 있었음에도 베풀지 못했을 경우 반드시 후회가 따른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보니 과거를 돌이켜 가장 후회되고 아쉬운 경우가 덕을 베풀지 못한 일이다. 내가 그때 왜 상대를 용서하지 못했을까, 내가 그때 왜 상대의 허물을 눈감아 주지 못했을까,(상대를 용서하고 허물을 눈 감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후회는 새록새록하지만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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