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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극한 인간관계의 표상 토포악발(吐哺握髮)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4. 06:50


    흔히 납량(納凉)특집이라 하면 그동안의 학습효과가 발휘되어 대부분 공포영화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문자 대로하면 서늘함을 드린다는 뜻이니 비단 ‘공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과거 여름방학 때면 늘 하는 일이 하루 종일 대청마루를 뒹굴며 ‘삼국지 연의’와 같은 소설이나,(그중에서는 요시가와 에이지 것이 최고였다) ‘사기열전’, ‘동주 열국지’ 같은 고전을 뒤적이는 일이었는데, 그런 책들을 읽으며 서늘함을 느낀 대목은 의외로 장렬함에 있지 않았다.



    "동주열국지" '송양지인'에 관한 삽화

    '드라큘라 백작의 억울한 누명' 참조

     


    앞서 말한 진승과 오광의 발악적 봉기, 예향의 의리, 초장왕 부하의 보은의 죽음, 한신의 비참한 최후 등에서 보이는 장렬함은 읽는 이에 따라서는 요즘 같은 한낮 무더위를 잠시 잊을 만한 청량감을 선사받기도 한다. 나 역시 감동적으로 여긴 부분이라 소개를 한 것이지만, 내가 가장 감동을 느낀 대목은 "사기"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나오는 토포악발(吐哺握髮)에 관한 일화였다.


    토포악발이라 하니 그 뉘앙스가 무척 사나운 감이 없지 않고, 같은 의미의 삼악삼토(三握三吐) 역시 그러하다. 문자의 해석도 그러해, 토포악발은 먹던 음식을 토해내고 머리카락을 움켜쥔다는 뜻이고, 삼악삼토(三握三吐)는 세 번 머리칼을 움켜쥐고 세 번 음식을 토한다는 것이다. 문자의 뜻만 놓고 보면 “윽! 토 나오려 한다”는 대사가 절로 튀어나오는 재수 없는 장면이 연상되거나, 머리끄덩이 잡고 사생결단 싸우는 장면이 생각날는지도 모르겠으나 오히려 뜻은 정반대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춘추시대(BC 770-403)보다 앞서는 주(周)나라 초기 시절이니 그야말로 옛날옛적이다. 당시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실정이 거듭되자 무왕(武王)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BC 1046) 이후 무왕이 죽자 아들 송(誦)이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성왕(成王)이다. 그런데 성왕은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이 무왕의 대신 섭정을 했다. 우리나라 조선의 예를 들자면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즉위를 했을 때 그 곁에 있던 숙부 수양대군과도 같은 존재였다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하는 장면을 그린 석각


    은 ·  시대의 지도


    주공이 성왕을 보필하는 장면을 그린 동판

     


    그때 조선에서는 그 숙부가 결국 정변(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데, 성왕 당시도 주변에서 그와 같은 염려가 팽배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오히려 왕위를 노리는 무경(武庚)과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의 반란을 평정하고,(BC 1038) 탕평의 치세를 통해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주공은 이후 성왕이 성장하자 섭정의 자리를 물러나 초야로 돌아갔다. 



    주공의 일생을 그린 석각  

    주공이 무왕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 장면, 정사를 돌보는 장면, 어린 성왕을 보필하는 장면, 반란을 진압하는 장면 등을 새겼다. 


    은 · 주 시대의  청동솥


    은 · 주 시대의 청동 대월(鉞)

    주공에게는 생사여탈권이 포함된 강력한 권한의 상징인 부월이 주어졌으나 이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이때는 통치체제가 봉건제도라 왕실의 친척들이 제후로서 자신들의 봉토를 다스렸던 바, 이에 따라 주공의 아들 백금(伯禽)도 노(魯)나라 땅의 제후로 봉해지게 되었다. 이때 주공은 임지로 떠나는 아들 백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나는 문왕(文王)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로 천하에서도 결코 비천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의 목욕 중에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한 번의 식사 중에 세 번이나 음식을 뱉으며 선비를 맞았다. 천하의 현인을 잃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들아, 노나라에 가거든 삼가 조심히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이니 결코 교만 따위를 지녀서는 안 된다"(周公戒伯禽曰, 我文王之子, 武王之弟, 成王之叔父, 我於天下亦不賤矣. 然我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子之魯, 愼勿以國驕人)


    자신은 그와 같은 높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누군가 찾아오면 귀천을 막론하고 바로 나가 맞았으니 한 번의 목욕 중에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갔고, 밥을 먹다가도 세 번이나 음식을 뱉고 나가 맞을 만큼 예(禮)를 갖추고 지극정성을 다했던 바, 그 결과로 많은 선비와 현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노나라에 가서도 나라의 주인이라고 거들먹대지 말고 늘 예를 다해 겸손히 사람들을 대해라는 것이었다



    "사기" '노주공세가'


    "사기" 번역본에 실린 삽화



    이를 두고 훗날 왕포(王褒)라는 학자는 자신의 저서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이렇게 썼다. 

    '옛날 주공이 몸소 밥을 뱉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감옥이 텅 비는 융성함이 있었던 것이다.(昔周公躬吐握之勞, 故有圄空之隆)' 

    "고문진보"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 성군이 어진 신하를 얻음을 칭송하는 글)'


    고관대작이 이를 행하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 없겠거니와, 사사로운 인간 관계 있어서도 이와 같이 행한다면 적어도 잃을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른 듯하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때조차도 있다. 나중에 물어보면 답이 가관이다. 


    "난 저녁에 전화 안 받아. 받아봐야 술 먹자는 놈밖에 더 있어?"

    "주말에는 전화 안 받잖아. 몰랐어?"

    "난 작업 중엔 안 받아."(이 사람은 늘 작업 중인 바쁜 사람이다)


    이렇게 답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사회적 위치가 별 볼일 없는데, 아마도 그들의 위치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유선전화 시절이면 혹 그 같은 배짱이 통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발신자를 알 수 있는 핸드폰 시대가 아니던가? 이 경우 상대방은 틀림없이 모욕감을 느낄 것이요, 사람에 따라서는 앙갚음의 강점도 지니게 될 것이다.


    (꼭 앙갚음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일단 전화 걸기 어려운 상태가 되면 그 당사자는 때가 되면 반드시 떠나간다. 사람이 사는 것은 소통을 위한 것인데, 어떤 식으로라도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다면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됨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고관대작일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내가 아쉬워서 참지만 언젠가는 받은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생각을 아니 가질 수 없을 터인데, 경험으로 보자면 이와 같은 일은 상대가 조금 득세(得勢)한 경우에 왕왕 나타난다. 


    정말로 그것은 상대가 그야말로 아주 조금 득세한 경우이니, 예전 어느 기업 컨설턴트에게 들은 일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과거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 같은 재벌 모임에 나가서 보면 모이는 순서가 그 기업의 서열과 일치한다고 했다. 일찍 오는 사람일수록 재벌의 서열이 앞선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는 것이다. 앞서 말한 주공의 경우와 같이 예를 갖추고 사람을 대할 때만이 사람도 얻고 인재도 얻는 것이다. 오죽하면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하던 공자도 자신이 노쇠해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지 오래임(久矣吾不復夢見周公)을 한탄했겠는가? 다시 말하거니와 예를 다하면 인재는 자연히 모일 것이요, 예를 무시하면 언제가는 반드시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주공의 석상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이이물리(利而勿利)의 고사이다. 이것은 주공의 아들 백금이 임지인 노라나로 떠나기 직전 아버지에게 치세(治世)의 도를 물은 데서 유래되었는데, 이에 대한 주공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지요?"

      "이롭더라도 이익을 보려 하지 마라.(利而勿利也)"


    아들 백금의 임지 노나라는 원래 무왕이 주공 단(旦, 주공의 이름)에게 내려준 봉토였다. 하지만 무왕이 죽고 그 아들 송(성왕)을 보필하는 바람에 자신의 임지로 가지 못하고 아들 백금이 가게 된 것이었는데, 이때 한 말이 '이롭더라도 이익을 보려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전한다. 


    이로울 때 이익을 취하지 않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기업을 하는 사람은 특정 상품이나 주변 여건의 변화 등으로 이익을 보게 되었을 경우, '때는 이때다' 싶어 과도한 이익을 취하려들지만, 진정한 기업인은 이때 고객만족을 먼저 생각한다고 한다. 언젠가는 그 이익이 사라질 될 터, 그때를 대비해 이익과 손해를 함께 셈해본다는 것이다. 이를 '손자병법'에서는 '지자지려 필잡우이해(智者之慮必雜于利害, 지혜로운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계산한다)'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팀장의 경우, 자신의 팀이 회사에 이익을 냈을 때 그것을 자신의 공인 양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 수 있다. 하지만 현명한 팀장은 이때 그 공을 부하들에게 돌린다. 이롭더라도 이익을 보려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더 큰 이익을 구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공을 나눠주었을 경우, 부하들은 당연히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된다) 반면 자신의 이익만을 취했을 경우, 그 팀장은 차츰 부하들의 신뢰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주공의 석상(중국에는 주공의 상이 공자 상 만큼이나 많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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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