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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과 그의 아내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5. 08:02
젊은 시절, 주변에서 장가를 잘 갔다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그 부인의 품성 같은 것을 알 리 없을 터, 장가를 잘 갔다 함은 처가에 돈 푼이나 있다는 뜻일 게다. 오랫동안 안 나가던 동창회에 한번 참석했을 때 그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신수 좋은 얼굴로 '넌 요즘 몇 개나 때리냐?'며 보자마자 골프 얘기다. 하긴 십수년 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달리 할 말이 뭐 있겠는가만은.....
그 친구들 중의 한 명을 사심 없이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술이 좀 거나해서 '어디 가서 한잔 더 하자'는 말이 나올 때쯤 그 친구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앞뒤를 짚어보니 그만 놀고 들어오라는 마누라의 귀가 명령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집에 일이 있어 가봐야 겠다며 일어섰다. 이후 그 친구의 얼굴 볼 일은 없었다.
즈음해서 만난 사회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묵직하니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져 관계가 급진전했는데, 어느 날 그의 부인과도 동석하게 되었다. 그 초대면에서 내가 궁금했던 것이 '이 여자의 근거 없어뵈는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는데, 언젠가 그 친구가 늦은 '가출'을 감행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부인은 시골 갑부의 맏딸이었다.
그때 그녀가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결혼 전 남편이 너무 가난해 자신의 집에서 반대가 심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남자를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고, 결혼 후 자신의 집에서 아파트도 장만해주고 장사 밑천도 대줬다'는 얘기를 줄줄이 해댔다. 내가 남편을 그만큼 사랑하니 좀 찾아달라는 뜻일 터였다. 나의 별다른 노력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 친구는 얼마 후 시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출의 이유는 따로 물어볼 것도 없이 아내의 집착(사랑이 아닌)과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부터의 일탈일 것이었다. 이후 친구는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인 듯 과도하게 주식투자에 매달렸는데, 마지막에는 옵션까지 손댔다 결국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내의 관심은 잃지 않았으니 복 받은 사내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이 친구 역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아내의 귀가 독촉 전화가 걸려왔다. 혹간 의부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남편을 제 발 밑에 묶어두려는 일종의 갑질 같은 행위였다.(그걸 모르는 건지 모른 척 하는 건지, 아니면 만성이 되어서인지, 그 친구에게서 불편해 하는 기색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좋은 일자리는 아니지만 나는 그 친구를 위해 직장을 하나 구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한 달도 못버티고 안 좋게 그만둬버렸다. 워낙에 편하게 살던 친구라 힘든 일은 감당이 안 됐던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나와의 인연도 끝나고 말았는데, 어쩌면 그는 마누라의 핵우산 밑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마누라의 치마 속은 불편하지만 오랫동안의 안식처였던 바, 다시 처가의 재력이 깃든 그곳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주위에서는, 먹고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는 그는 행복한 사나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뒷모습은 한없이 처량하고 불쌍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감상일 뿐, 처가의 재력이 있으면 가장(家長) 행세는 어려울지라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니 결코 나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생의 모든 힘듦과 괴로움, 미움과 갈등 등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일이기에.....
그렇다면 과거의 인물들은 어땠을까? 천하의 현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Xanthippe)는 천하의 악처였다고 한다.(영어의 '악처' 젠티피 Xanthippe는 그 이름에서 유래됐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집에 들어오면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고, 그래도 성에 안 차면 물동이에 담긴 물을 머리에 쏟아부었는데, 그때 소크라테스가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게 마련이지"라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아내
사실 소크라테스로서도 아내에게 할 말이 없을 것이, 자신은 그저 허구허날 아테네 거리에서 설교나 할 뿐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의 유언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을 갚아주게"였겠는가. 말하자면 그는 살아생전 제 마누라에게 동네 치킨집에서 닭 한 마리 못 사줄 처지였다는 얘기다. 위대한 철학자고 뭐고 간에 이런 남편을 좋아할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반면 제갈량의 아내 황씨는 황승언이라고 하는 양양 지방 명사의 딸이었던 바, 제갈량은 어느 정도 처가 덕을 봤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유비의 삼고초려 고사이다. 그가 융중 땅 제갈량의 집에 찾아갔을 당시, 시기적으로 볼 때 가마니 같은 것을 짜거나 농사 준비에 한창이었어야 옳았을 텐데, 두 번은 외유 중이었고 한 번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부자는 아닐지라도 그저 먹고 살 만은 했다는 얘기다.
오늘 말하려고 하는 강태공, 즉 태공망 여상(呂尙)의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지러진 물은 되담을 수 없다)'의 고사는 그래서 좀 불편하다. 은나라 말기의 인물인 여상의 성은 강씨이며, 태공망(太公望)은 주나라 문왕(文王)이 붙여준 이름이다. 문왕이 서백(西伯)이던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태공(문왕의 아버지)이 대망(待望, 기다리고 바람)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던 바, 이후로도 그렇게 칭함으로써 얻어진 이름이다.
은나라 말기의 귀족 태공(太公)과 그의 아들 서백(西伯) 창(문왕)은 주왕(紂王)과 같은 왕들의 실정을 겪으며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은나라를 전복시킬 생각으로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줄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유비가 제갈량과 같은 인재를 찾았듯) 서백이 우연히 낚시질하던 강호의 인물 여상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 은나라 주왕 시절 몇몇의 제후들이 쿠데타 모의를 하지만, 이것이 사전에 발각돼 붙잡히고 제후들은 젓갈에 절여진다. 서백 창은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주왕의 의심을 사서 노예가 되었는데, 나아가 주왕은 은의 인질이었던 서백 창의 장남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죽으로 만들어서 서백 창에게 먹인다. 서백 창의 가신이 주왕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서야 서백 창은 혐의를 풀고 풀려났지만, 그는 아들을 죽인 은 왕조에 복수할 결심을 굳힌다.('위키백과' 참조)
서백은 당대의 관례대로 사냥을 나가기 전 길흉을 알아보는 점을 쳤는데, 점괘에 이르기를, '오늘 잡을 것은 범이나 곰이 아니라 패왕(覇王)을 보좌할 큰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사냥은 정말로 별 볼 일 없었고, 사냥을 접고 돌아가는 길에 위수(渭水) 강변에서 낚시질하고 있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뭔가 끌림이 있었던 서백이 낚시가 끝나는 황혼 무렵까지 남자의 뒤에 서서 내내 기다렸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은나라 갑골문자
은나라 유적 은허(墟) 발굴의 기원이 된 갑골문은 본래 점을 치는 도구였다.
상해 홍교에 있는 태공망 역사관의 기념물
태공망 여상의 성이 강씨였으므로 여상은 강태공으로도 불리게 되는데, 이후 강태공은 낚시꾼의 대명사가 되었다.
남자의 낚시가 끝나갈 즈음 서백이 예를 갖추고 이것저것을 물어보니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바, 비로서 자신이 본 점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백은 다시 예를 갖추며 우러렀다.
"나의 선친이 태공이었을 때 머잖아 주(周) 땅에서 성인이 나타나 세상을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소. 당신이 바로 그 분임에 틀림없소."
이후 서백은 여상을 스승으로 모시며 은(殷)나라의 전복을 기도하였으나 중도에 병으로 죽고 만다. 이에 여상은 그의 아들 발(무왕)을 도와 마침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주(周)나라를 세우게 된다.(BC 1046) 그리하여 여상은 그 공으로 제(齊)나라의 제후에 봉해지는데, 문제는 이때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 마씨(馬氏)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부부가 가난했던 시절, 무능한 남편 여상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아내였다. 아내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다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제가 그때 집을 나간 건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해서 잠시 친정에 가 있었던 거예요. 함께 지냈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저를 받아주세요."
그때 여상이 그릇에 담긴 물을 땅에 부으며 말했다.
"이 물을 도로 담아보시오. 그러면 당신의 청을 들어주겠소."
마씨는 허겁지겁 물을 담아보려 했으나 될 리 만무했다.
"아니, 엎어진 물을 어떻게 도로 담아요?"
여상이 울상이 되어 대답하는 마씨에게 다시 말했다.
"그렇소. 한번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듯, 한번 헤어진 사람과도 도로 합칠 수가 없는 것이오.(若能離更合 覆水定難收)"
양(梁)나라 소기(蕭綺)가 쓴 '습유기(拾遺記)'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고 있기는 하나, 버전이 다양해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버겁다. 또 '습유기' 자체가 '주워서 전하는 기록'이라는 뜻이니 제목부터 신뢰감이 떨어지고, 게다가 여기 실린 기담괴설들은 거의가 정사(正史)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에 관해서는 태공망 여상을 다룬 이야기 어느 버전에서나 등장하고 태공망 여상은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내내 거론되는 비중있는 인물이라 대놓고 무시하기도 어렵다.
'습유기'에 실린 삽화
이야기를 사실로 보자면 여상은 '복수불반분'을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제 품은 뜻이 중하다 해도 삶에 있어 처자식의 생계보다 우선할 과제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태공망 여상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다른 버전에서 등장하는 바, 그가 위수 강변에서 낚시를 할 때 곧은 낚시바늘(直鉤)을 썼다거나, 혹은 태공의 낚시바늘이 수면 위에서 세 치나 떨어져 있었다(太公釣魚 離水三寸)는 말이 그것이다.
이는 여상이 '물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은 것이다'는 의미로써 쓰였는데, 이는 지금도 낚시꾼들의 나름대로의 은유로 널리 사용된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여상은 먹고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만일 그가 생계에 급급했던 사람이라면 세월이고 뭐고 훗날의 한신처럼 우선은 배를 채울 고기를 낚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러날 때를 놓친 천하제일 지략가 한신' 참조)
이를 유추해보면 여상의 '복수불반분'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성립된다. 호의호식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먹고 살 만한 처지임에도 남편을 버리고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여자를 받아들이기란 사실 힘들다.(여상은 제나라로 가서 새 장가를 갔는지 이후 그의 후손인 강씨들이 제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앞서 서두에서 남편을 쪼는, 제법 가진 여러 여자들의 행태를 비근한 사례로서 들었지만 이와 같은 아내의 행위는 정말로 남편을 바보로, 혹은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일 뿐더러 종국에는 남편의 사회성까지 떨어뜨리게 만드는 심각한 행위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수십 년을 버틸 수 있었던 여상은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뜻이 있다면 버텨야 한다는 말씀!)
여상이 낚시를 했다는 서안 근방의 위수
위수 풍경
여상이 낚시를 했다는 곳에 세워진 조어대 표석
근방의 조형물.
여상이 문왕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모습을 조형했다.(그 앞을 걷는 아저씨가 왠지 초라해보인다. 그 역시 때를 기다리는 사람일까....)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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