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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테크 기술을 지닌 오월(吳越)
    동양사에서 배우는 세상사는 법 2018. 6. 9. 23:58


    춘추시대의 다섯 명의 패자(覇者)를 말하는 춘추5패에 관한 정의는 아직도 확실한 것이 없다. 혹자는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을 지칭하고, 혹자는 오 합려, 월 구천 대신 진 목공이나 송 양공을 넣기도 하며, 혹자는 오 합려 대신 그의 아들 부차를 넣기도 한다. 또 혹자는 군웅할거의 춘추 시대에서 특별히 5명의 패자를 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래 그림의 정의가 가장 무난한 듯싶다. 



    춘추오패(그림 출처: 다음 '산여울'님의 블로그)



    그런데 위의 그림을 보면 마치 전국시대 7웅처럼 그 5명의 패자가 지역을 나눠가지며 군림한 것처럼 여겨지나 그렇지는 않고, 기원전 770~403년의 춘추시대 동안 크게 세력을 쥐었던 패자들을 지칭한다. 또 그림을 보면 오른쪽 아래의 오나라와 월나라도 그 위의 진, 제, 초나라와 비등한 국토와 세력을 가진 것처럼도 보이나, 오와 월은 당시로 보자면 중국의 맨 아래 쪽 끝에 위치한 매우 궁벽한 곳이니 당대의 판도를 나타낸 아래 지도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와 월의 위치(그림 출처: '다음백과') 



    그럼에도 이 지역 출신의 군주 세 사람(합려, 부차, 구천)이 천하를 호령한 패자의 명단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자못 의아하고 신기하니, 우선은 춘추시대 말기에 두 나라가 박 터지게 싸우며 만들어낸 각종 고사에서 각인된바가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오월동주, 와신상담, 절치부심, 동병상련, 회계지치, 효빈 등의 숱한 고사성어을 만들어낸 양국 간의 치열했던 싸움은 따로 '오월춘추'로 불리기도 한다)


    말한 바대로 의아한 것은 이와 같이 궁벽한 곳에 위치했던 두 나라가 어떻게 중원의 막강한 나라들을 아우른 패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우선 (월나라보다 앞서 형성된) 오나라를 보면 그 답이 있을 듯도 하다. 비록 궁벽한 곳에 위치했지만 역사에서 말하는 오나라는 주나라의 시조 고공단부(古公亶父)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아버지 고공단부가 셋째 아들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고 자기 세력들을 이끌고 멀리 양자강 하류까지 흘러와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나라의 선진 청동기 문명이 이곳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큰 바, 그 발달된 청동 무기로써 남만(南蠻) 계열의 오랑캐들이 세운 초나라를 제압했을 개연성이 있다.(오·월 민족에 대해서는 인도 갠지즈 문명권의 청동기 세력이 유입돼 세웠다는 해양민족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배제하기로 하겠다)


    어찌됐든 중원의 세력들에 비해 늦게 출발한 그들 오·월 민족이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그들의 발달된 무기가 한몫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복수심에 불타던 오자서가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결국 초나라를 무너뜨린 것이나, 손무('손자병법'의 저자라고 알려진)가 대국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도 기실 그들의 발달된 청동 무기 제조술에 기인한 바 컸을 것이다.(* 오자서에 대해서는 '백발 인물열전, 오자서 편' 참조)

     

    오·월의 제련 기술이 뛰어났음을 말해준 사례가 '십팔사략' 등에 등장하는 명검들이다. 즉 간장(干將), 막야(幕耶), 순균(純鈞), 용연(龍淵), 태아(太阿), 담로(湛盧), 어장(魚腸), 거궐(巨闕), 공포(工布), 성사(邪)와 같은 검으로서, 놀랍게도 그 검들은 지금까지 전해진다.(반면 이와 같은 명검은 중원 지방에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칼은 간장과 막야로서, 오왕 합려가 월나라에서 보내온 3자루의 명검에 자극받아 오나라 최고의 도장공(刀匠工)인 간장 막야 부부에게 만들게 했다는 칼이다. 이 칼은 3년 동안 온갖 정성을 쏟아 제작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해용산(海湧山) 합려의 무덤 깊숙히 묻였다 하여 훗날 진시황제가 이 칼을 얻기 위해 무덤을 도굴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검 찾기를 중단했다 하는데, 그 도굴로 인해 생긴 큰 구덩이에 물이 고여 검지(劍池)가 되었고 해용산은 호구(虎丘)로 불리게 되었다. 




    강소성 소주의 검지와 호구


    소주 호구공원의 시검석

    오왕 합려가 간장검을 시험하기 위해 잘랐다는 돌이다. 



    그러나 이 칼은 뜻밖에도 자객의 전설이 서린 여남의 의춘현(宜春県) 삼왕묘(三王墓)에서 발견되었는데, "오월춘추" '합려내편', "수신기(搜神記)" 등에 전하는 기록, 즉 '양검(陽劍)인 간장에는 거북등 무늬를 넣고 음검(陰劍)인 막야에는 불규칙한 무늬를 넣었다(陽曰干將, 陰曰莫邪. 陽作龜文, 陰作漫理)'는 기록에 따라 간장과 막야로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이름하여 천하제일검이다. 위의 기록은 "수신기"의 것으로, 막야의 이름이 야(耶)가 아닌 아(邪)로 기록돼 있다.* 


    * 위진남북조 시대 간보(干寶)라는 사람이 지었다. "수신기(搜神記)"는 말 그대로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수집한 기록'이란 뜻인데, 정설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부분도 없지 않다. 


     

    삼왕묘 발굴 당시의 간장과 막야

    오왕 합려는 노나라 사신 계손이 방문했을 때 동맹의 의미로써 막야검을 선물로 주려 했으나, 계손이 칼집에서 칼을 뺐을 때 날이 망가진 것을 보고 오나라가 패자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은 망할 징조라 여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만 최고 명인이 복제한 간장과 막야검 


     안휘성 간장 막야 동상

     소주 출신으로 용연, 공포, 태아도 만들었다 전한다. 



    당대에 만들어진 칼로 더불어 이름 높은 것이 ‘순균(純鈞)’으로, 간장, 막야와 동시대 사람인 구야자(歐冶子)라는 명(名)도장공이 만들었다는 명검이다. 칼의 감정가로 이름을 떨친 설촉(薛燭)은 순균의 값어치가 큰 시장이 형성돼 있는 두 고을과 군마 1천 필, 혹은 1천 호의 도시 2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는 평가를 내렸다. 


     

    중국판 엑스칼리버의 전설이 서린 순균검 



    구야자가 만든 칼 중에서는 유명한 '어장(魚腸)'이라는 단검이 있다. 이 칼은 오자서가 공자 희광(姬光)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오왕 희요(姬僚)의 암살용으로 자객 전제(專諸)에게 내준 칼이다.(오자서는 희광이 준 천금으로 이 칼을 구입했다) 전제는 이 칼을 잉어의 뱃속에 집어 넣어 오왕 희요에게 다가간 후, 잉어 요리 속의 칼을 빼 왕을 살해했다. 이에 희요는 죽고 희광이 왕위에 오르니 이 자가 바로 합려다.(기원전 514년) 


    자객 전제는 하인으로 위장해 잉어 요리를 들고 오왕 희요에게 접근했다. 이때 오왕은 암살을 우려해 갑옷을 입었지만 칼은 명검답게 갑옷을 꿰뚫었다고 하며 이후 칼은 물고기 내장이란 의미의 '어장'으로 불리게 되었다.(본래 이름이 어장이었고 칼의 운명이 그 이름을 따랐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칼은 이후 암살용이라는 오명(?)에 명검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전한다. 


    아무튼 '어복장검(魚腹臟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테러리스트 전제의 이야기에는 남방 민족 특유의 에토스가 넘친다. 전제는 오직 오자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것이다. 물론 전제는 오왕의 살해 직후 현장에서 도륙되었다. 


    덕분에 왕이 된 희광(합려)은 오자서, 손무와 함께 강대국 초나라를 여러번 정벌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506년에는 당(唐), 채(蔡)나라와 연합하여 초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고 초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 틈을 이용해 본국에 월왕 구천이 쳐들어왔고 동생 부개의 쿠데타가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회군해야만 했는데, 10년 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다리에 화살을 맞고 파상풍으로 죽는다.(기원전 496년)

     

     

    왠지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는 '어장'


    구야자 동상

    월나라 사람인 구야자는 막야와 동기였다는 설과 스승이었다는 설이 양립한다. 그가 들고 있는 칼이 순균인데, 순균과 어장 외 거궐, 담로, 성사(승사)도 만들었다. 당대는 청동기 시대였음도 위의 칼 어장에는 철이 함유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바, 오와 월은 그와 같은 하이테크를 바탕으로 급성장한 듯 보이며, 이후 오와 월에 영향을 받은 이웃 초나라도 전국시대까지 이어지는 강국으로 군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 잡는 것은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오 부차의 창과 칼, 그리고 월 구천의 칼이다. 아버지 합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와신(臥薪, 섶 위에 잠을 잠)을 하며 복수의 칼을 간 부차 왕은 기원전 494년 월나라를 공격해 회개산에서 월왕 구천의 항복을 받는다. 이후 오자서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은 채 북벌에만 몰두하다 결국 오자서의 예언대로 구천의 역공을 당해 죽고 만다.(* '백발 인물열전, 오자서 편' 참조) 


    그 부차 왕의 창과 칼이 1976년 호북성에서 발견되었다. 



    '오왕부차 자작용모'의 명문이 새겨진 오왕 부차의 창 


    '오왕부차 자작용검'의 명문이 새겨진 오왕 부차의 칼


    발굴 당시의 사진



    월나라는 '백성들이 몸에 문신을 새기고 짧은머리를 풀어헤쳤으며 황무지를 개간해 마을을 세웠다(文身斷髮 草萊披邑)'고 기록돼 있는 바, 그 열악한 환경과 야만성은 오나라보다 훨씬 더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뛰어난 제련술은 침략 전쟁의 더없는 발판이 되었으니 월왕 구천은 당대의 패왕으로서 춘추시대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가 오왕 부차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오만 가지 고통을 감수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사서에 전하나, 다만 상담(嘗膽, 곰 쓸개를 맛봄)의 기록은 정사(正史)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칼이 1965년 호북성 강릉(江陵)에서 발견되었다. 



    '월왕구천 자작용검'의 명문이 새겨진 월왕 구천의 칼


    호북성 박물관에 전시된 월왕 구천의 칼


    월왕 구천의 이 청동검은 검격(몸 날과 손잡이 사이) 양쪽에 남색 유리와 공작석을 박아 넣고 몸 날에는 마름모꼴 꽃무늬를 새겼다. 2천4백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채가 빛나고 칼날이 예리해 세상을 올라게 했다. 

     


    이상 살펴보았듯 변방의 작은 나라 오와 월은 그들의 하이테크 기술을 바탕으로 춘추시대의 패자국으로 등극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이 두 나라가 가르쳐주고 있다. 특히 현대전은 병력의 수로써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호북성 형주 고고학회의 발굴현장


    상해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기 시대의 칼

    소주 옛 오·월 지역에서 발굴된 검으로 크롬 도금이 되어 있어 녹슬지 않는다. 요즘 기술로도 전기분해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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