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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부활의 비밀(II) - 제자들은 왜 그를 알아보지 못했나?
    성서와 UFO 2019. 5. 22. 20:42
     

    예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사실과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한 설명을 마친 바 있다.(☞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II') 그런데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도 각 복음서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에서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고,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만 나타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 이어 갈릴리에서도 나타난다.(마가복음에서는 장소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혼란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는데,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답답함을 토로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린도전서 15:12-19)


    사실 바울은 예수를 생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거 다마스쿠스로 가는 거리 위에서 크게 한 방을 맞아 시력 상실의 위기까지 간 적이 있었던 바, 부활한 예수를 믿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전에 예수쟁이의 씨를 말리겠다 호언하던 그가 이후 예수의 특급 전도사로 변신을 한 것도 바로 이 사건 때문인데(사도행전 16:13-18/☞ 'UFO의 레이저 빛에 혼쭐이 난 사울' 참조) 까닭에 그는 예수 부활을 본 사람들을 일일히 열거하며, 게다가 자신을 칠삭동이로 낮춰가면서까지 예수의 부활을 믿게 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고린도전서 15:1-11)


    물론 부활한 예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떳다방 식 출현의 모양새도 헛소문의 형식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지만, 그 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가장 의심스럽게 만드는 일은 부활한 예수의 모습이 생전의 모습과 판이한 까닭이었다. 그 판이함은 3년 동안 같이 생활했던 제자들에게마저 그러했으니 가장 처음에 만난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가 그러했고, 혹시라도 로마군인들이 잡아갈까 함께 숨어 지내던 직계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도 그러했는데, 심지어는 무덤 앞에서 만난 막달라 마리아까지도 그를 몰라볼 지경이었다.



    예수를 쌩까는 제자들을 묘사한 지점토 공예품.(예수 역시 남감해 하고 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한복음 20:14-18)


    이 내용상으로는 예수는 분명 막달라 마리아의 등 뒤에서 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를 무덤 관리인 쯤으로 여겨 시신을 행방을 알려달라 하소연하고 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촉이 발달된 여자였는지 다행히도 곧 예수를 알아본다.(여기서 예수는 아직 여호와를 만나기 전인 듯 자신을 붙잡지 말라며 바쁜 척한다. 아니, 사실 바빴을 것이니, 부활한 예수는 베드로 앞에도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늦게 인지하기는 했으나 다른 제자들에게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현한 이후 곧바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지만 이들 역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바, 십자가에 박힐 때의 손의 상처와 로마 병정의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고 나서야 예수를 믿게 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없던 도마는 예수의 현현을 당연히 믿지 않았고 상처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다.(생김새가 아예 다른 사람을 예수로 믿었다는 게 정말로 믿어지지는 않지만, 사실 생전의 예수와 부활한 예수는 목소리와 생김새가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터, 이에 대한 설명은 곧 잇기로 하겠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19-28)        


    부활한 예수의 생전과 다른 모습에 제자들이 당황해 하는 가운데,


    급기야 제자 도마는 창에 찔린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한다. 그림은 카라바지오의 '의심하는 토마스'(1600년/107x140cm)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기독교계에서는 어떻게 답을 하고 있나 인터넷을 쭉 훑어보다 그중 가장 모법답안이라 생각되는 것을 하나 골라보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노파심에서 말이거니와 이 답안을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고 열거된 많은 답변 중에서는 그래도 가장 잘 쓴 답안인 듯해 전문을 퍼오게 되었다)


    * 요한복음의 저자의 말대로 이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몇 차례 만났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이 그때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그때에 해변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서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해변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긴 했지만, 주님께서 그 곳에 나타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셋째로 제자들이 탄 배와 주님이 계신 곳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못 알아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눅 24:16)에 기록된 것처럼,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거룩한 몸으로 변했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서 이동할 수도 있었으며, 제자들이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과 오랫 동안 이야기 하면서 걷기도 하고, 함께 음식을 들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남의 의견도 들었으니 그러면 이쯤에서 예수의 모습이 달라진 진짜 이유를 설명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으니, 내가 누차에 걸쳐 말한 임마누엘의 출현이었다.(☞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누구인가 II', '예수가 외계인의 자식이 아닐 경우 생겨날 문제점들 III') 덧붙이자면 그 자가 바로 본래의 예수로서, 33년전 나사렛 마을의 처녀 마리아의 몸에 DNA가 이식될 때 그 DNA를 공여한 자였다.(앞에서 생전의 예수와 부활한 예수는 목소리와 생김새가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거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니, 쉽게 말하자면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누구인가 I' )


    혹자는, 그렇다면(같은 DNA를 공유했다면) 부활한 예수는 생전의 예수와 그 모습이 똑같아야 되지 않나 묻기도 하는데,(이 같은 질문을 자주 받아서) 이는 마리아의 X 염색체 활성화를 염두에 두지 않은 데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다.(여성의 두 개의 XX 염색체 중 하나는 반드시 발현되므로) 앞서도 누차에 걸쳐 말했지만 증식된 체세포가 직접 자궁에 이식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나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경우는 체세포 공여자의 Y 염색체만 발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지만, 주사 요법으로 임신이 된 마리아의 경우는 양친의 X Y 염색체가 모두 발현되었을 것이었다.(반면 시험관에서 길러진 아담의 경우는 남성의 Y 염색체만 100% 활성화되었다 ☞ '예수가 외계인임을 말해주는 성서의 족보')


    그렇다면 무덤 안에 있던 본래의 예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시신으로 폐기되었다. 물론 무덤에 나타난 천사들이 그랬을 터이다. 그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지니 예수의 본래 임무는 거기까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십자가가 위의 예수가 고통 속에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크게 부르짖은 것으로도 알 수가 있는데, 외전인 '베드로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바로 이때 하늘의 구름 속에서 '큰 빛을 업은 천사'(즉 UFO를 탄 외계인)의 환영(幻影)을 목격하기도 한다.


    ~ 좀 더 덧붙여 설명하자면,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염두에 둔 마당에(누구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곧 부활할 건데 굳이 자신을 버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자(사람의 아들) 예수는 자신이 그대로 죽는다는 사실을 고통 속에 깨달은 것이니, 아닌게 아니라 그대로 절명한다.(마태복음 27:50) 베드로복음의 내용을 존중하자면 죽기 직전의 예수가 본 것은 환영이 아니라 실제의 UFO였을 것이고, 그는 그 순간 자신이 죽어 되살아나지 못한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예수는 그 UFO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것이라 여겼을 가능성이 큰 바, 그와 같은 마지막 절규를 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자면 사람의 아들 예수는 정말로 비참하고 외롭게 죽은 셈이다)


    여기서 듬성듬성한 구멍을 메꾸자면, 부활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시공을 초월해 무시로 드나든 것은 UFO로써 이동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며, 아울러 불과 이틀 반 전에 문자 그대로의 피 땀을 흘리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못박혀 만신창이가 된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한 신체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위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빈사의 상태였던 예수가 겨우 2~3일만에 외상(外傷) 없이 깨끗히 회복될 수 있게 된 점, 또 그러면서도 굳이 손과 옆구리의 상처는 달고 다닌 점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나는 제자 도마가 손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했다는(그래서 부활한 예수임을 확인했다는) 설정을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지만,(그래서 과연 요한복음의 저자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임마누엘, 즉 부활한 예수는 사전에 그와 같은 의심에 대한 대비를 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하다. (하긴 얼굴도, 목소리도 다르고 게다가 외양까지 멀쩡한 마당이니 그만한 대책쯤은 세워놔야 했을 것도 같다)


    *그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은 상상도 못한 죽은 인간의 부활, 즉 나자로의 부활을 자신의 책에 적은 기막힌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여담이지만 일전에 알던 어느 젊은 목회자도(실명을 거론하기는 힘들 듯) 빈사 상태의 예수가 겨우 며칠 만에 외상 없이 깨끗히 회복돼 돌아다닐 수 있는가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답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더불어 그는 제자들이 잡혀갈까를 염려해 꽁꽁 걸어잠군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 나타난 일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었다.(요한복음 20: 19/26)


    ~ 이에 그는 예수의 영적 부활을 믿지 않은 자라 하여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영적 부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던 바, 별로 위축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너나 없이 맹목적인 믿음을 내세우고 또 그렇게 실천하는 기독교 세상에서 이같은 사람은 정말로 보기 힘든 케이스다.(많이 들어본 소리겠지만 기독교 교리는 '일단 무조건 믿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 알게 되다는 것인데, 그러한 어불성설이 통하는 현실이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와 같은 예수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퀀텀 텔레포테이션(Quantum teleportation)의 개념을 빌려야 할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 스타트랙의 '순간 원격 이동 시스템' 같은 것인데, 사실 이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영화에서는 이와 같은 순간 이동이 매우 쉽게 이루어지지만 이에 관련된 기사를 찾아 본 결과,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화 ‘스타트렉’ 처럼 ‘텔레포테이션’(teleportation)으로 인간을 멀리 떨어진 장소로 이동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

     

    최근 영국 레스터 대학교 물리학과 학생들이 이에 대한 재미있는 논문을 발표해 관심을 끌고있다. 이들 학생들의 연구주제는 만약 ‘텔레포테이션’ 기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인간을 다른 장소로 보내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냐는 것.

     

    학생들이 내린 결론은 우주의 나이로 추정되는 약 140억년 보다도 무려 35만 배는 더 길 것이라는 것. 결과적으로 ‘텔레포테이션’ 장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살 기계’인 셈이다.

     

    많은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텔레포테이션’은 과학계에서도 실제로 연구될 만큼 미래 유망 분야 중 하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텔레포테이션’으로 옮겨 진 대상이 이동 후에도 정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문제는 사람은 일반 물건과는 달리 세포 하나하나에도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분해한 후 다시 원래대로 ‘조립’하기 위해서는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데이비드 스타키는 “인간의 유전자 코드와 신경 정보 등을 데이터로 환산해 계산했다” 면서 “인간의 모든 정보는 2.6x1042비트이며 이를 보내는 시간은 29~30 GHz로 4.85x1015년 걸린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화처럼 2-3초 만에 인간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은 거짓말로, 현재의 데이터 전송기술로는 요원한 일”이라고 덧붙였다.(출처: 나우뉴스) http://nownews.seoul.co.kr/news



    예수가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등 뒤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것, 문이 잠긴 제자들의 은신처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기록 없이 두 번이나 실내에 나타난 것 등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선진기술의 외계인들이라도 이와 같은 시스템이 가능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힌다. 위 옮겨온 글의 내용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기에....



    이상 예수의 부활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기는 했지만 반응은 어떨는지....?. 하지만 단언하거니와 이것이 아니고는 정경의 4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달라진 예수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비록 외경이긴 하지만 도마복음(토마스 복음서)의 내용도 이와 같은 우주론적 해석이 아니면 해득이 불가능하니(앞서 말한 유다복음서처럼) 많은 학자들이 거의 파손 없는 완문(完文)의 도마복음에 희한한 해석을 내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말이지 우주론적 시각을 벗어나면 도마복음은 그 첫 장 첫 줄서부터 진실에서 빗겨갈 수밖에 없다. 그 복음서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는 살아 계신 예수께서 이르시고, 그의 쌍둥이 형제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의 말씀이다."


    ~ 도마복음은 1890년 일부가 발견됐고, 1945년 나그함마디 문서(☞ '고대의 엑스 파일, 유다복음서') 발견으로 그 전문(全文)이 확인됐는데, 이 첫 장, 첫 줄의 내용은 공히 동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와서 예수의 쌍둥이 형제를 찾아나서기도 딱한 노릇이다. 위의 부활론으로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 부활의 영어 단어 resurrection은 '부활'의 의미 외에 '도굴'이란 뜻도 있는데, 특히 유물이 아닌 시체의 도굴을 의미한다. 어원의 유래는 모르겠으나 나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다. 파생어인 resurrectionist는 더욱 재미있다. 


    ~ 끝으로 예전 라디오에서 들은 개그 한 토막을 소개하려 한다.

    어떤 미국인 부부가 늙으막에 세계일주 여행을 하던 중 남편이 그만 예루살렘에서 숙환으로 죽고 말았다. 부인은 이스라엘에서 간단히 장례를 치르고 유골을 가지고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비싼 운구 비용을 치러 가며 미국에서의 장례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부활할까봐.....' (정말이지 예수의 부활은 그저 개그 소재로서만 어울린다. 실제적으로 현실성이 전혀 없다는 예기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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