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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엘에 관한 잡담(I) - 사울 왕의 안타까운 죽음
    성서와 UFO 2019. 6. 17. 19:01


    구약성서 사무엘기(記)의 내용은 이스라엘 왕국 건국에 관한 이야기로 초대 왕 사울과 그 다음 왕인 다윗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사무엘기는 지금은 상·하로 나뉘어져 있지만 70인역 성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70인역 성서')까지는 원래 한 권이던 책이었다. 그것이 상·하로 나뉜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 주인공이 유별(有別)한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사무엘상의 주인공은 사울 왕이요, 사무엘하의 주인공은 다윗 왕으로 그 구분이 확연하다.(시기적으로는 기원전 1105~970년 쯤이다)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무엘기의 주인공이 사무엘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무엘기의 타이틀은 그가 차지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니 그가 바로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마시아흐(mashiach/흔히 메시아로 불림)가 왜 왕을 칭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 세계에서 왕이 되려면 왜 기름을 뒤집어 써야 하는지, 그 까닭을 지금도 나는 모른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는 무슨 연유로 크리스트(마시아흐의 희랍어 역)라 불리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모른다.


    ~ 내가 모르는 이유는 성서에 그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이를 알 수 없을 텐데 사람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수를 그리스도(크리스트)라 부른다. 그 조상이 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바, 성서에서 굳이 그 근거를 찾자면 오직 다음의 대목뿐이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36-38)


    윗 글은 예수가 크리스트임을 명시한 성서의 거의 유일한 대목일 게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나님이 예수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없으니, 그저 그 능력을 기름 붓듯 했다는 비유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도 그나마 베드로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위 사도행전의 내용은 베드로가 코넬리우스라는 로마 장교를 만나 예수에 대해서 짧게 피력한 대목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사울과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던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사무엘 9:15-16)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사무엘 10: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사무엘 16:1)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사무엘 16:13)


    그런데 사무엘은 어떤 권한으로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일까? 그 권한에 대한 타당성이 사무엘기 첫 장에 실려 있다.(어떻고 저떻고 말은 많으나 역사상 실제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은 이 두 사람뿐이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 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사무엘 1:1-20)



    고대 실로(Shilo)의 자취
    이스라엘의 첫번 째 수도였던 실로는 지금은 웨스트 뱅크 내에 위치한다. 보이는 건물은 1900년 대의 발굴에서 수습된 토기 등을 전시한 유물 전시관이다.

    전시관 내부

    덴마크 발굴단(1926-1932)과 이스라엘 바르 일란 대학(1981-1984)의 발굴 유물이 전시돼 있다. 중기 청동기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대종으로 성서의 시기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한나가 기도한 실로의 성막 자리

    여호수와 때부터 사무엘 때까지 300년 간 이곳에 성막이 설치됐는데, 블레셋과의 에벤에셀 전투에서 성궤를 빼앗길 때 실로와 성막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사무엘 4-7장)



    흔히 사무엘을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게 바쳐진 자라 말한다. 그 말에는 사실 하자가 없다. 보다시피 그의 어미 한나가 여호와에게 그런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나는 그와 같은 약속으로 인해 불임에서 벗어나 임신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렇게 태어난 아기가 바로 사무엘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사무엘의 출생이 신약의 세례자 요한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사무엘과 요한의 아비는 제사장이나 그와 비슷한 위치였고, 어미는 모두 석녀였으나 여호와의 도움으로 임신과 출산을 하는 까닭이다. 즉, 나는 사무엘의 경우도 외계인 여호와의 힘으로 탄생한 자라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방황하는 예수 I'에서 남녀의 교합에 의해 탄생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 열거한 바 있다. 즉 이삭의 경우는 아브라함에게서 분리된 체세포를 사라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체세포 이식법으로 태어났고, 야곱의 경우에는 시험관 배양법(흔히 말하는 시험관 아기)으로 태어났음을 이미 강조했는데, 삼손, 요한, 예수에 있어서는 성령의 힘이 작용한다. 그 성령의 힘이란 외계의 힘을 말함이니 천상의 어떤 사람, 즉 성서에서 엘로힘이라 불린 외계인의 DNA가 공여되었음이다. 


    하지만 사무엘의 경우는 분류가 좀 애매하다. 그 어미 한나는 분명 임신이 불가능한 여자였지만 아비 엘가나는 임신 가능한 정자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그의 다른 아내 브닌나는 출산했으므로) 그러므로 한나의 임신이 리브가(야곱의 모친)와 마찬가지로 시험관 배양법 시술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성령의 힘이 직접 적용됐음도 완전 배제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의 출생이 범상치 않음은 분명하니, 훗날 요한이 성령에 의한 탄생이라는 자격 하나만으로 뭇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듯, 사무엘 역시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시대적 요구인 왕정 국가의 탄생을 견인할 만한 자격은 갖추었다 보겠다.


    ~ 여기서 한 가지 재미 있는 것은 당시 사사(士師, 임시 지도자)였던 사무엘은 정작 왕정에 반대했으며, 왕이 된 사울과는 죽을 때까지 사사건건 대립했는데, 더 재미 있는 것은 여호와까지도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해 한탄했다는 사실이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사무엘상 15:35)


    앞서 여러 챕터에 걸쳐 강조한 바 있지만, '후회하는 하나님' 역시 일종의 형용모순(adjective contradiction)*이다. 신이란 자체가 전지전능한 존재임을 전제하므로 논리학적 모순이 형성되어지는 것이지만, 나는 일찌기 성서의 하나님을 선진 문명의 외계인으로 간주하였던 바,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여기서는 그저 하나님이 왜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했을까 궁금할 뿐인데, 다행히도 사무엘기에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육성 고백으로 실려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에게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사무엘상 15:10-11)


    * 꾸며 주는 말의 내용이 꾸며지는 말의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일. ex) '뜨거운 아이스커피', '비 내리는 달밤', '쇠로 만든 유리창'....


    전지전능 같은 것을 떠나서 이 말은 일개인에 해당되더라도 웃긴 말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는 좋다고 기름을 들이붓더니 이제는 그 둘이 사울을 미워 죽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 내용을 보면 여호와가 사울을 미워한 이유는 자신을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 때문인데, 정작 그 저변에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감정이 깔려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거에 감정 있던 아멜락인들을 싸그리 죽여버리지 않은 까닭이니, 우선 그 전문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떄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떄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에게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사무엘상 15:1-11)


    즉 여호와는 구원(舊怨)으로 인해 아말렉인들을 전멸시키라 하면서, 남녀와 어린아이와 젖먹이, 그리고 소와 양, 낙타와 나귀까지 남김없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이와 같은 여호와의 잔인성은 앞서 '악마를 찾아서'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사울은 이와 같은 명령을 어기고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었던 바, 우선은 아말렉 성에 있는 겐(Kenites) 종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아말렉 성 공격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진멸시키지 않고 유용한 가축은 살려둔다.(여호와의 명령이니 그 대적 행위를 필설로 옮기긴 힘들었을 것이로되 이 정도의 이성이면 마구잡이식의 살육은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와 같은 행위에 여호와는 진노하고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였던 바, 똑 같은 심보인 사무엘은 사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지 않는 까닭을 다그쳐 묻는다. 이에 사울은 서둘러, 그중 좋은 가축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하려고 한 것일 뿐이니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지만 사무엘의 분노를 돌이키지 못한다. 사울은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 끝에 그를  따라가 겨우 여호와를 경배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사로잡혔던 아말렉의 왕 아각은 여호와 앞에 끌려와 큰 칼에 몸이 찍어 쪼개져 죽는다.


    (사울이)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사무엘상 15:25-34)


    그리고 또 이때 사무엘은 아각에게 '앞으로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저주도 퍼붓는 바, 사울은 아말렉 성을 함락시키면서 죽이라고 한 왕 아각을 생포하고 그 어미도 살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인간적인 처사를 여호와와 사무엘은 몹시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이다.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사무엘의 저주로 볼 때 아각의 모친도 이때 몸이 쪼개져 죽었음이 분명하다. 정리를 하자면, 아각이 자신의 죽음을 매우 담담히(오히려 즐거워 하며) 받아들이자 약이 바싹 오른 사무엘은 그의 어미를 보란 듯이 먼저 처지하고 그 다음에 아각을 찍어 죽인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이 모든 일은 여호와 앞에서 -혹은 여호와가 직접- 행해졌던 바, 그들이 얼마나 모진 심성을 지녔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이렇듯 미운 털이 박힌 사울을 대신하여 이새의 아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내용이 곧 16장에 소개된다.(이것을 보면 사울이 괜히 다윗을 죽이려 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여호와는 기름 부은 자, 즉 일국의 왕을 둘을 만들어 싸움을 붙인 셈이다) 그리고 결국 사울은 길보아 산 전투에서 블레셋의 대군에 포위되어 화살을 맞고 자살하게 되는데,(사무엘상 31장) 이때 여호와가 앞서 보여주었던 대포 한 방의 위력이라도 보여주었다면 사울은 능히 그 싸움에서 승리했으련만 이미 미운 털이 박힌 몸인지라 속절없이 가고 만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사무엘상 7:10-11/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블레셋인들과 싸울 때의 광경으로 아직 사울이 왕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이렇듯 나의 눈에는 외계인의 대포와 그들의 유한성과 편협성, 아울러 사울의 안타까운 죽음과 여호와의 잔인함 같은 것이 눈에 띄나, 믿음이 강한 사람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지 인터넷에서 발췌한 사무엘기에 대한 소감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앉은 사울은 스스로 교만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와 하나님을 버린 자의 결말이 각각 어떠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해야 합니다. 



    길보아 산 전투 전황도


    길보아 산과 이즈르엘 평원


    길보아 산과 사울이 죽은 곳(사진 아래 4번)

    사울은 이곳에서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죽는데, 여기서 맏아들 요나단의 죽음은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다. 그는 다윗의 절친으로 목숨까지 구해준 적이 있건만 여호와의 가호는 없었다.(역시 무써운 사람 ㅜㅜ;;)


    벳산(Beth Shan)의 가로

    사울과 그 아들들의 머리는 이곳 벳산 거리에 효수된다.(사진의 유적은 로마 시대의 것임)


    벳산 유적

    길보아 산 동쪽 8km 지점인 벳산에 의외로 거대한 로마 시대 유적이 존재한다. 사무엘 시대에도 벳산은 블레셋의 근거지로 은성했던 듯 사울의 목은 이곳의 다곤 신전에 매달리는데,(역대상 10:10) 그후 요나단의 것과 함께 거리에 효수된 것을 나중에 다윗이 몰래 수습한다.(사무엘하 21:12) 20세기 들어 이곳 제 5지층에서 당시의 다곤 신전과 아스다롯 신전이 발굴되었다. 벳산은 지금 베트 쉐안으로 불린다.



     *  '납량특집,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의 혼령'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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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