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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예수 (I)성서와 UFO 2018. 5. 23. 06:37
구약성서 '창세기'의 이삭과 야곱, '사사기'의 삼손, 신약성서 '누가복음'의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 이들 다섯 명의 인물에게는 탄생상의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아비 없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의 모친에 대한 남편은 있었으되 유성생식(有性生殖)에 의한 탄생은 아니었던 바, 내가 늘 주장하는 대로 '체세포복제 방식에 의한 탄생'이라고 함이 타당할 듯하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니, 이삭의 경우에는 아브라함에게서 분리된 체세포를 사라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체세포 이식법으로 태어났고, 야곱의 경우에는 시험관 배양법(흔히 말하는 시험관 아기)으로 태어났음을 이미 강조했는데,('하나님이 장난친 도시 예루살렘 II'/'야곱이 목격한 거대한 비행선' 참조) 삼손, 요한, 예수에 있어서는 성령의 힘이 작용한다. 그 성령의 힘이란 외계의 힘을 말함이니 천상의 어떤 사람, 즉 성서에서 엘로힘이라 불린 외계인의 DNA가 공여되었음이다.(* '예수 승천 때 출현한 UFO의 모선' 참조)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에 있어서는 아비의 유전자적 성격이 지구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메카니즘과도 같은 유전적 특이성을 나타낸다.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는 지구상 인간(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전자가 이식되었으므로 지구 환경과의 별다른 마찰 없이 그대로 적응할 수 있었지만, 삼손, 요한, 예수에 있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적응할 때까지 일정 시간이 요구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이들은 DNA를 제공한 외계인의 특성과 임무에 따른 역할을 수행하니, 삼손은 타고난 괴력으로써 블레셋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데 기여하고(하지만 과정은 내내 불안했다),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야생 꿀 등을 먹으며 홀로 생활하다 메시아 예수의 앞길을 여는 데 기여한 후 허망하게 죽는데,(* '세례자 요한의 정체' 참조) 다만 예수는 그 막중한 임무 때문인지 태어날 때부터 천상의 보호를 받는다.(* '예수 탄생 때 출현한 베들레헴 상공의 UFO' 참조)
삼손의 장렬한 최후(사사기 16:23-30)
요한의 허망한 죽음(마가복음 6:21-29/마태복음 14:1-12)
예수 탄생 때 베들레헴 상공에 출현한 별(마태복음 2:1-10)
말한 바대로 이 가운데 예수는 보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태어난 자로서, 그 때문인지 자신의 정체성과 막대한 임무를 깨닫는 데까지 제법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이때의 행적을 보면 이 자가 과연 신의 아들이며 메시아로서 온 자가 맞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하다. 이른바 공생애라 불리는 후반 3년 중의 그 초기 행적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공생애는 요단강변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관복음서(마태·마가·누가)에 따르면 이후 그는 홀로 광야로 들어가(성령이 그를 광야로 몰아냈으므로/혹은 성령에 이끌리어) 40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던 듯 사탄의 시험을 이겨낸다. 이때 예수가 그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한 것을 보면 이때 예수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회복한 듯 보인다.(사탄의 정체는 일단 패스)
예수가 40일 간 머물렀던 광야는 사해 서쪽의 황무지로서, 위 사진은 광야의 실제 모습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후 예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갈릴리 지방을 거쳐 제 고향 나자렛의 회당(유대교 교회)에 가서 자신의 존재를 피력한 것인데, 이때 예수는 사람들 앞에서 구약성서 이사야서 16장의 한 대목을 읽고는 그것이 마치 제 임무인 양 목에 힘을 주어 묻는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냐?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서로에게 묻는다. "이 사람, 요셉의 아들 아냐? 그 요셉의 아들이 왜 갑자기 저러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서 생활했던 평범했던 목수 청년이(성서에는 예수가 직접적으로 목수생활을 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유대인의 전통은 장자가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했으므로 그렇게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갑자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를 자처하며 기적과 복음의 행위를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누가복음 4:16-22)
예수의 말에 사람들이 콧방귀를 꾸자 그는 다음과 같이 자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다 하더니 정말로 그러하구나."
그리고는 또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 과거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기근이 들었을 때, 온 이스라엘 땅에서 그를 믿는 자는 많지 않았으나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구원을 받은 자는 그들을 믿는 과부와 나병환자 뿐이었느니라.(누가복음 4:25-27)
요지인즉, 너희가 구원을 받으려면 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말에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회당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 야산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리려고 하나 요행히 위기를 벗어난다.(누가복음 4:28-30) 이상의 대목은 예수가 과연 신의 아들로서 이 땅에 강림했는가 하는 데 대한 의구심을 주기 충분한데, 요한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의 의구심이 등장한다.
예수를 떨어뜨리려 했던 나자렛의 언덕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어찌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한복음 6:42)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의 이같은 의구심이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마태복음 13:55-57)
이상 나자렛 사람들의 얘기인즉 예수가 그 전에는, 즉 서른 살쯤 전에는 이 같은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물기 전에는 그저 보통의 마을 사람, 그리고 위에 열거된 형제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다.(비범을 숨긴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아래 마가복음의 한 대목은 예수를 아예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예수 역시 이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바, 제 부모 형제를 외면할 뿐더러 그 존재까지 부정해 마지않는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마가복음 3:21)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내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1-35)
사실 예수는 외계인의 체세포 복제에 의해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인할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었든 체세포 복제로 잉태되었든 어미 마리아의 태를 빌렸음은 분명하고, 아무리 피가 다르다 한들 자신의 형제들과 오랜 기간 함께 먹고 자랐음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무척이나 냉정하며 나아가 싸가지마저 없다.(위 마가복음의 대목은 기독교 단체에서 악용할까 겁나기도 한 대목인데, 사실 종종 그러한 예가 없지 않았다)
예수에 대해 조금 더 타박하자면, 마음 가짐이 그래서였는지 이후 그는 장자의 도리를 전혀 하지 않는다.(전에는 어쨌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세례 이후로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니기 바쁘다. 여기서 가족들을 만난 것도 갈릴리에서 나와 전도를 위해 잠시 들렀을 때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고향에서 이런 싸가지 없는 자를 환대할 리 없을 터, 결국 제 고향 나자렛에서 환영받았다는 얘기는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는 앞 누가복음에서처럼 회당에서 내쫓기어 절벽으로 내몰릴 정도는 아니지만, 예수의 독백은 매우 시니컬하며 설명 또한 배타적이다.
(고향 사람에게 배척당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태복음 13:57-58)
나자렛의 위치와 전경
위의 그림은 1842년 화가 로버트가 그린 그림으로, 예수는 흔히 나자렛 예수라고 불려 우리의 귀에 익숙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도 없는 마을이었고 지금 역시 나자렛에서 예수의 흔적은 찾아볼 길 없다.
현재의 나자렛은 아랍계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인구 75,000명의 작은 시로서, 오른쪽 교회는 1730년도에 세워진 교회 자리에 1966년 재건축된 성 수태고지 교회이다. 이 교회는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 즉 임신을 고지받았다는 장소에 세웠진 것인데, 장소에 대한 진위는 물론 밝혀진 것이 없다.(나자렛 사진을 보면 어느 것이나 서울 한남동 언덕배기 동네와 흡사해 혼자 신기해 하고 있음^^)
한남동 뉴 타운 지역.(한남동은 정말로 예전과 하나도 안 변했다)
나자렛과 한남동 비교 사진 한장 더.(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하다는 생각에 그냥 재미로 올려 봤음)
위 나자렛 빌리지는 관광객들을 위해 최근에 건립한 건축물들로 말하자면 민속촌과 같은 곳이다.
이상을 따져보자면 결국 고향에서의 포교는 포기했다는 말이다. 이 역시 이해는 안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왜 예수는 갑자기 자신의 고향도 저버리고 나아가 제 부모 형제를 부정할 정도로 변해버린 것일까? 그 단서는 결국 40일 간의 광야 생활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그 전에는 세례를 받은 것 외에 달리 한 게 없으므로) 성서에 등장하는 그의 광야생활은 그저 금식과 사탄을 만난 것 뿐이다. 다만 성서의 다른 곳에서 그의 광야생활을 유추해볼 만한 대목이 등장하니, 구약성서 '열왕기'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경우이다.
구약성서 '열왕기' 상편은 예수가 광야에 40일 간 방황을 할 때 그에게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생생히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바, 다음 장에서는 아합 왕의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이긴 엘리야가 분노의 복수심에 불타는 왕비 이세벨에게 쫓겨 광야로 숨어든 일, 그리고 그곳에서 40일간 벌어졌던 놀라운 일을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 국내도서
- 저자 : 김기백
-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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