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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가 행한 오병이어 기적의 진실
    성서와 UFO 2017. 5. 14. 19:36

       

    '예수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오천 명 청중의 먹을거리를 위해 물고기 2마리와 떡 2개로 그들이 먹고도 남을 먹을거리를 순식간에 만들었다.' 이것이 성서의 이른바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으로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돼 있다. 예수의 기적이 이처럼 4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예는 흔치 않은데, 그중 마가복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거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자리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마가복음 6:30-44)

     

     

    기적이 행하여진 장소와 숫자만이 다를 뿐 4대 복음서의 기록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위 마가복음의 내용처럼 예수가 모인 청중들의 식사를 위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이것은 젊은 시절, 내가 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품었던 의문이다. 그리고 이 의문은 "여호와=지구 식민지의 외계인 최고 책임자"이며 "예수=최고 책임자 아들의 복제인간"이라는 등식을 수립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며 뛰어난 과학의 외계인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기적에의 연출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예수는 왜 다른 곳에서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양식 창출의 기적을 베풀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과, 이러한 가공할만한 기적을 만들어내는 이 유대 청년을 당시의 위정자들이 과연 가만 두었겠는가, 그리고 이와 같은 능력자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이끌려는 민중들의 시도는 왜 보이지 않는가 하는 등의 답하기 힘든 일련의 질문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연출해낼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요한복음에 그 답이 실려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한복음 6:1-13)

     

     

    위 요한복음의 내용 역시 공관복음서와 대동소이하나 공관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세 사람이 등장하니, 제자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어린이다. 즉 이 세 사람이 기적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니, 위 상황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제자 빌립은 이 곤란한 상황의-모여든 군중들의 먹거리를 해결해야 할-타개 방안을 묻는 예수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아무리 조금씩 줘도 200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부족할 것입니다.” 

     

    1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하는 바, 환산하여 10만원이라고 한다면 200 데나리온은 2천 만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빌립의 대답은 한마디로, ‘사정이 이런 데 뭘 어찌 하겠느냐’는 항변조의 반문이었던 바, ‘빌립을 시험코자 했다는 구절은 이 문장의 대구(對句)로 볼 수 있다. 반면 안드레의 대답은 좀 더 실천적이다.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를 꺼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 대답에 예수가 자신감을 보인다.

     

    “이 사람들을 앉게 하라.”

     

    그리고는 떡을 가져다 축사한다. 말하자면 예수는 어린 아이가 내민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예의 일장 연설을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다음의 요지였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보시오. 이 어린이가 자신의 품에서 우리 모두들 위해 보리떡 다섯 개를 꺼냈소. 우리의 사정이 딱함을 보고 자신이 먹으려고 가져온 음식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오. 진실로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그대들이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오.”

     

    상황인즉 꼭 천국을 기대하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에서라도 자신의 도시락을 꺼내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을 터, 이에 양심 바른 몇 사람이 먼저 제 품에서 먹을거리를 꺼냈고, 이어진 예수의 연설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제 품의 먹을거리를 꺼내놓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빈손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많이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을 터, 모인 사람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가 된 것이었다.

     

    이어 성서에는 이를 유추해 볼만한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 중 마태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달려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8:2-6)

     

     

    물론 이를 기적이라 하면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주장인즉슨 이것을 종교적인 해석으로써 물리적 수의 증대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는 오히려 성서의 기적을 희화화시키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인즉, 필자가 전작(前作)에서 계고(戒告)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이는 물론 기독교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니, 그동안 성서의 합리적 해석을 갈구해온 일부 성서학자들로부터도 이에 대한 동류(同流)의 의견이 개진된 바 있고, 

     

     18-19세기를 살았던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신학자 H.E.G. 파울루스를 위시하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사실 수많은 군중이 몰래 자기 먹을 것을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어린애가 자기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군중심리

    분위기에 휩쓸려서 서로서로 광주리에 식량을 담기 시작해서 그런 기적(?)이 나왔다"는 해석을 했다. 나름대로 훈훈하면서도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장례미사에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추도사 중 하나로 나오기도 했다.(출전 : 나무위키) 

     

    한국의 한 작가 또한 ‘나눔의 기적’으로서 자신의 소설에 피력한 바 있다. 

     

     

    이문열 作 <호모 엑세쿠탄스>. 전 3권으로, 1권 228~229쪽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인간의 존재와, 삶과, 구원에 관한 문제를 그린,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의 속편 같은 소설인데 , 전작에의 느낌이 워낙에 강렬해서인지 전작 대비, 재미와 무게감은 많이 떨어진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처형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많은 사람을 먹이다'라는 의미의 'Feeding the multitude'로 표현되는데, 'The Boy's Lunch'라는 제목이 붙은 위 성화의 작가가 주목하는 것 역시 어린이의 점심이다.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고는 앞서 언급한 ‘기적 후의 평온’이나 ‘제자들의 불신’ 등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막연하다는 점이다. 정말로 예수가 신통력을 통해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였다면 그 이후에 기재돼 있는 성경의 평온한 기록과, 이후로도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스승의 신성을 의심하였다는 기록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 의심에의 기록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은 이 엄청난 물리적 수의 증가를 경험한 장소에의 기록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흔히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라 일컫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요한복음 2:1-11)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 같은 것임에도 그 지명과 상황적 설명이 명확하다. 그것이 주정(酒精)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능히 연출해냈을 법한 기적 아닌 기적임이었음에도 말이다.

     

    흔히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을 갈릴리호 북쪽 연안 마을 타브가(Tabgha)로 믿고 있다. 실제로 그곳에는 이른바 ‘오병이어 교회’라 불리는 오래된 교회가 있고, 과거 그곳에서 발굴된 중세기의 모자이크화를 볼 수 있다. 근자의 엽서나 접시 등의 관광기념품에 단골 디자인으로써 등장하는 바로 그 유명한 모자이크다. 하지만 타브가를 비롯한 갈릴리 호수 인근의 유적들은 당대의 것이 아니요, 모두가 13세기 비잔틴 시대 이후의 흔적들이므로 신빙성을 두기는 힘들다. 

     

     

    타브가 '오병이어 교회'의 모자이크화

     

    한마디로 말해 그곳에 무엇이 있다 하여 그것이 예수 시대의 흔적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특히 예수의 고향이라는 나사렛이라는 곳에 남겨진 흔적들은 더욱 그러하다. 지금도 성지 순례의 단골 코스이지만,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을 한번 가보자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아주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이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때문에 부랴부랴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니, 나사렛 마을의 언덕에 자리한 수태고지 교회-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수태(受胎)를 알린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교회-는 역사성 박약한 유구(遺構) 위에 지어진 지난 1969년의 건축물이며, 예수 당대의 마을이라고 하는 유적 비슷한 건물들도 모두 순례객과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최근의 재현품들에 지나지 않는다.

     

     

    나사렛 전경. 나사렛은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고향이지만 정작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드니, 한국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의 평범한 현대식 도시에 불과하다. 가운데의 큰 건물이 수태고지 교회이다. 

     

    그래도 나사렛은 예수의 고향이라는 성서적 근거라도 있다. 하지만 타브가는 그 어떤 근거조차 찾아보니 힘드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라는 여타의 성서적 전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성서의 지리적 설명에 있어서도 각 복음서의 내용이 상이하다.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물론이요 요한복음에도 실려 있는 공통된 사건에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마태복음을 보자면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다만 갈릴리 호숫가의 ‘빈 들(solitary place)’이며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한적한 곳(quiet place)’이라 기록돼 있다. 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장소에의 기록이 그저 ‘빈 들’며 ‘한적한 곳’으로 돼 있을 뿐이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그 장소가 벳세다라고 명시돼 있어 신빙성을 주는 듯하지만 이는 마가복음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기적을 향한 후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낸 곳이 건너편의 벳세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역시 기적의 장소는 애매하여 그저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일 뿐이며, 그곳에서 이동하여 간 곳은 바다 건너 가버나움이다. 그 역사성은 차지하고서라도 장소마저 뒤죽박죽으로 갈리리 호수 인근의 주요 고을이 죄 들먹여지고 있다. 한마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벌어진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이니 훗날, 성서에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는 타브가가 기적의 장소로서 지명된 것은 역설적으로 일언반구가 없던 호숫가의 주요 고을이라는 점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비단 그 장소뿐만이 아니니, 그곳에 모였다는 5,000명이라는 군중의 숫자도 주목할 만하다(성서에는 이 5,000명에 여자는 제외돼 있어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에릭 마이어스(Eric M. Myers)를 비롯한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당시 갈릴리 호수 인근의 도시들은 수도인 티베리아(디베랴)가 24,000명 정도였고, 성서에 나오는 그밖에 도시들의 인구는 모두 3,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5,000명이라면 두 도시의 거의 모든 인구가 집결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들이 정말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다면 인근에 있는 수도 티베리아는 아마도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저 위대한 신의 아들을 따르자거나 아니면 저 위험한 자를 죽이자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생각해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먹거리를 구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세상 모든 정권의 존재 이유와도 상통한다. 따라서 오병이어의 그것이 진실이라면 민중보다도 위정자인 헤롯 안티파스가 먼저 움직였어야 옳다. 예수는 앞서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보다도 훨씬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장소에 주목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다 일컬어지는 타브가는 수도 티베리아와는 10km 내외의 거리에 위치한 고을로, 누구든 마음먹고 기적의 급보를 전해고자 했다면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성서에서 기적의 장소로서 거론된 가장 먼 지역인 벳세다를 지목해 보아도 20km 내외의 거리이며 또 호수 전체의 거리라 해봐야 53km에 불과하다. 적어도 예수와 그 제자들을 잡으려 했다는 소동 정도는 기록돼 있어야 옳다는 것이다(그 다음은 따로 설명이 없더라도 예수가 혼자 산으로 떠나고 제자들은 서둘러 배를 타고 떠났다는 성서의 기록으로 합리화될 수 있으므로). 

     

    이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별다른 동향은 없었고, 오히려 예수 제자들의 동요만이 눈에 띈다. 제자들의 동요란 앞서 설명한 바 있는 스승에 대한 불신으로, 이 또한 앞서 말했듯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자에게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공통적으로 믿음이 흔들리는 제자들이 묘사돼 있고, 이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장소미상의 곳에서 신체장애자와 시각장애자를 비롯한 여러 장애인의 장애를 고친 후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 이상을 배불리 먹이는 놀라운 기적을 다시 한 번 연출했음에도 유대교 각 계파 사람들이 나와 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표적을 요구하고 있다.(마태복음 16:1-4)

     

    그간 기독교에서는 이와 같은 불합리를 어떻게 무마했는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하는데, 만일 5천명의 군중과 4천명의 군중이 그와 같은 기적을 연속해 경험했다면 예수는 그 이후 따로 힘들게 전도 여행을 다닐 필요도 없을 것이며, 나아가 예루살렘까지 찾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고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결론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쯤 되면 예수의 일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 했음이 옳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직 예수의 세 치 혀가 만들어낸 작품이며, 그 장소가 불분명한 이유 역시 실제로는 그러한 물리적 수의 증가를 이뤄낸 기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무엇보다 이 같은 놀라운 사건이 역사서에 단 한 줄도 기록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를 테면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 같은 책에) 이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의 허구를 증명한다. 단언하거니와, 그와 같은 기적이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정 기적이다.

     

     

    갈릴리 호수 지도. 기적의 장소라는 타브가와 수도 티베리아가 그리 멀리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오병이어 기적을 희화한 외국 만화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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