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단 교회 장학생이 만든 먹거리 콘플레이크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2. 7. 21. 01:27

     

    어쩌다 보니 요즘 들어 아침식사를 '콘푸로스트'로 대신하게 됐다. 사실 나는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위를 가지고 있어 우유에 시리얼을 타 먹는 식사법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집안 냉장고 속에서 '콘푸로스트'와 그런 사람을 위한 락토프리 우유를 발견한 후 지금껏 별 탈 없이 먹고 있는데, 거의 한 달쯤 돼 가는 것 같다. 장점은 역시 '빠르다'로서 아침식사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단점인 '허하다'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어떤 날은 같은 시리얼인 '콘푸라이트'를 먹는 날도 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없으니 단지 그걸 사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시리얼의 연원이 궁금해졌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걸 먹게 되었나 해서..... 알아보니 시리얼의 역사는 놀랍게도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시리얼의 주된 재료인 밀의 소비는 그 기원이 17,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터키의 옆 나라 아르메니아는 인류 최초로 밀이 재배된 곳이다. 이곳에서 무려 기원전 12,000년경의 농경 암각화가 발견됐다.

    시리얼(cereal)이란 말은 로마신화 농업의 여신인 케레스(Ceres)에서 나왔다. 케레스는 인간에게 땅의 경작법과 곡물 재배법을 알려주고, 밀을 밀가루와 빵으로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시대에는 '케레스=곡물'의 의미로 쓰였는데, 그것이 영어화되며 시리얼로 변했다. 먹는 방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해  곡물 자체를 그대로 먹기보다는 음료나 물에 적셔 죽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먹었다.  

     

     

    농업의 여신 케레스 상(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
    이탈리아 파에스툼의 케레스 신전
    시카고 보드 앤 트레이드 빌딩의 알루미늄 세레스 상
    미국 조각가 죤 스토어(John H. Storrs, 1885 - 1956)의 작품이다.

    지금 우리가 즐겨먹는 콘플레이크는 뜻밖에도 종교적 산물이다. 콘플레이크라는 시리얼을 개발한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1852∼1943)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자로, 그가 콘플레이크를 개발한 이유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단체의 종교적 교리가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긴 이름으로 불려 외우기도 힘든 이 개신교 교단은 미국에서는 오히려 SDA (Seventh-day Adventist Church)라는 짧은 이름으로 통용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개신교 교단에서는 하도 밉상(이단)으로 몰아붙여 변방 교회처럼 여겨지지만 전 세계에서 4번째로 큰 단일 개신교회이다. 

     

    SDA가 이단으로 인식된 출발점은 아마도 칼뱅주의 신학자 안토니 A. 후크마가 SDA를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함께 '개신교 4대 이단'으로 분류하면서부터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SDA에서 강조하는 예수의 실제적이고 급박한 재림이 기존 개신교의 틀에서 벗어나는 이단적 발상이라고 보았다. (안토니 A. 후크마의 주장에는 선입견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주관적 서술이 많았으므로 현재 신학계에서는 더 이상 정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1950년대 미국 침례교 신학자이자 저명한 이단 연구단체 기독교리서치연구소(CRI) 대표인 월터 마틴은 SDA에 관한 7년간의 연구 이후, "분명히 독자적인 성경이해나 교리가 존재하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따른 보편적인 기독교의 본질에서 일탈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이후 개신교 교파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세계적인 견해가 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1776년 워싱톤 뉴 햄프셔에 세워진 최초의 재림교회

     

    존 켈로그는 전문인을 양성하겠다는 SDA 소속 지식인들의 지원 아래 그들의 장학금으로써 뉴욕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미시간주의 소도시 배틀크리크에 배틀크리크 새니테리엄(Battle Creek Sanitarium)이라는 요양병원을 설립해 운영했는데, 그때 그는 현대인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육류와 가공육 위주의 식사법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는 입맛을 자극하는 향신료를 뺀 아무런 맛이 없는 무미건조한 식사를 강조했던 바, '기름지고 강한 향신료의 식사는 호르몬의 분비를 왕성히 하고 그로 인해 성적, 도덕적 타락을 야기시킨다'는 SDA의 성서원리주의에 입각한 사고였다. (그 생각은 딴은 일리가 있다) 

     

     

    존 하비 켈로그 박사 (John Harvey Kellogg, 1852~1943)

    존 켈로그는 자신의 사고에 부합되는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어느날 롤러 압축기에 넣어둔 반죽된 밀가루가 자연 건조되어 얇게 부서진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그대로 오븐에 구워 환자들에게 아침 식사로 제공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어서 요양병원뿐 아니라 병원 외부에서도 주문을 할 정도였다. 이에 고무된 켈로그는 밀에 귀리, 옥수수 가루가 배합된  그야말로 건강식 시리얼을 발명해냈다. 

     

    초창기의 콘플레이크

     

    콘플레이크 시리얼이 이렇듯 인기를 끌며 건강식으로 각광을 받자 그것을 사업화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동생인 윌 케이스(Will Keith Kellogg)였다. 케이스는 의사인 형 밑에서 일하면서 콘플레이크 개발의 실무를 담당했는데, 그는 자신이 진짜 콘플레이크 개발자임을 자처하며 배틀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를 세웠다. 이에 형 존 켈로그와는 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윌 케이스 켈로그(1860~1952)
    읠 케이스가 만들어낸 켈로그 콘플레이크

     

    형제가 이렇듯 분쟁을 하는 사이, 병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나섰다. 그중에 찰스 윌리엄 포스트(Charles William Post)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배틀크리크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였는데, 가난해서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고 병원 주방에서 일하는 것으로서 입원비를 대신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콘플레이크 제조법을 알고 있을 것은 분명할 터, 투자자를 모아 나름대로의 콘플레이크 회사를 세웠다. 바로 '포스트'라는 회사였다.

     

     

    C W 포스트 (1854~1914)
    포스트에서 만든 토스티스 콘플레이크

     

    이후 형제 간의 분쟁은 1906년 윌키스 켈로그라는 합자회사로서 정리되었고, 시리얼 시장은 켈로그와 포스트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레시피를 앞세워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던 바, 오늘날까지 그 경쟁구도가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켈로그의 것은 '콘푸레이크', 포스트의 것은 '콘후레이크'라는 같으면서도 다른 이름을 쓰는 재미있는 구도를 형성해왔는데, 실은 둘 다 표준 맞춤법에 어긋난다. (규범 표기는 ‘콘플레이크’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호랑이가 그려진 '콘푸로스트'와 사자의 '콘푸라이트'가 맞싸우고 있다.

     

    ~  켈로그 상품은 농심켈로그에서, 포스트 상품은 동서식품에서 생산된다. 그간 켈로그에서는 첵스초코, 그래놀라 등의 히트상품을 냈고, 포스트에서는 코코볼, 오레오오즈 등을 출시해 히트쳤는데, 시리얼을 비교하자면 콘푸로스트 쪽이 얇고 바삭한 편이다. 그래서 콘푸로스트가 더 달다는 느낌을 주지만 당 함유량은 콘푸이트 쪽이 더 많다는 반전 같은 스토리도 존재한다.  

     

    ~  참고로 창시자인 존 켈로그는 자신이 고안한 시리얼을 토대로 만들어진 케이스 켈로그와 C W 포스트의 제품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건강식을 표방한 자신의 레시피와는 달리 설탕을 입혀서 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 것은 몸에 해롭다'고 하는 의사로서, 그리고 신앙인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끝까지 견지한 셈이다.   

     

    영원한 맞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하 재림교회)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W R 스미스 목사가 들어온 1906년으로 1900년 들어온 러시아 정교회 다음이었다. 이는 1885년 들어온 개신교파인 장로교, 감리교에 비해 20년 이상 늦은 것인데, 다만 한국 최초의 재림교회 교인은 그보다 일찍 탄생해서 1904년 5월 이응현과 손흥조가 일본 고베에서 재림교회 전도사 쿠니야 히데(國谷秀)로부터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았다.

     

    재림교회의 한국 전래는 늦었지만 신실히 전도했으며, 특히 다른 기독교 교회와 달리 친일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은 안식일교 신도들의 독립의지에 감화받아 그 자신도 안식일교 신자가 되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개신교 1호 순교자가 된 최태현 목사도 재림교회 소속이었다. 이외에도 재림교회의 많은 청년들이 징집을 거부해 처벌받았다. 

     

    재림교회 선교사들은 입국 초기 찬송가 및 성경 편찬 작업에 참여하는 등 다른 개신교 전도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해갔다. 하지만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조선인 목사들은 재림교회를 이단으로 결의했는데, 교리적 이유보다는 재림교회로의 개종자 증가를 우려한 행정적 목적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로써 재림교회는 한국 최초의 이단 교회가 됐으나, 반면 조선예수교장로회 측은 신사참배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오히려 이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하고 국민들을 계몽시킴으로써 비상시국 하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홍택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나아가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5만 317원 50전을 걷어 국방 헌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이는 전투기 1대와 기관총 78정을 마련할 수 있는 거금으로서 일제는 실제로 이 돈으로 전투기를 만들어 '조선 장로호'라고 이름 붙였다. 경성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에서 '조선 장로호'의 명명식을 가질 때 초대받은 조선인 목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재림교회는 국내에서는 '삼육재단'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삼육(三育), 즉 신체적(체육), 정신적(지육), 영적(덕육) 성숙을 신앙의 모토로 삼기 때문이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삼육의료원, 삼육식품, 요양병원, 삼육외국어학원, 삼육대학 등도 이와 같은 모토로서 건립된 것이다. 청량리를 지날 때 거치게 되는 시조사 정거장은 시조사 출판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 역시 재림교회 운영하는 문화사업체이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