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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도교 수운회관 앞을 지나며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2. 8. 9. 06:07

     

    천도교 교리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도덕 ·역사 교과서에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나아가 교조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조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에 대해서도 설명된다. 특정 종교의 교리를 이렇듯 공공연히 가르치는 경우는 드물다. 까닭에 민족종교 천도교에 대한 관심을 학생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질만하고, 그것이 교세의 흥왕으로 이어질 법한데 현실은 오히려 정 반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1916년 7월 천도교 측 통계에 의하면 교인 수가 무려 백만이 넘었다.(107만 3,408명 / 당시 인구 17,456,221명). 그것이 자체 통계라 해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니 1894년 10월 녹두장군 전봉준이 한양을 점령하겠다며 이끌고 북상한 전라도의 청장년 남성 동학교도만도 4만 명이나 되는데, 이때 이에 반대한 김개남 손화중 등의 동학 조직은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1893년 2월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사흘 밤낮을 행해졌던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한 상경(上京) 교인들만도 수 만 명이었다.(그 엄청난 쪽수에 외국 공사들이 크게 불안해한다)  

     

    이렇듯 민중의 폭발적 지지를 받았던 천도교는 3.1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으나, 해방 이후 신도가 급감하여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종교가 되었다. 반면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개신교·가톨릭 신자는 인구 1%에도 미치지 못했다.(천주교 88,553명 / 개신교 144.062명 / 당시 인구 17,731,977명) 하지만 이후 기독교 인구는 급격히 증가해 전체 인구의 약 26%에까지 이르렀다. (개신교 967만 명 / 가톨릭 389만 명 / 문체부 <2018년 한국의 종교현황>)

     

     

    탑골공원 내의 손병희 (孫秉熙, 1861~1922) 동상 / 천도교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서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기독교가 단 시간 내에 이와 같은 성세를 이룬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로 전세계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성공 사례, 희귀한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 반면 단일종교(천도교)가 단시간 내에 이처럼 쇠락한 경우도 보기 드문 예인데, 그 이유를 흔히 세인들은 교단의 내분에서 찾는다. (한때 뉴스에도 오를 내릴 정도로 시끄러웠으나 지금은 진정됐는지 조용하다)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시각에서는 교리의 변동이 더 큰 듯하다. 축약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동학)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만들어진 토착종교로서 유. 불. 선(孺佛仙) 3교의 교리를 종합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주창하며 창시되었다. 최제우는 당시 피폐한 사회상을 목도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구제를 위해 근심하는 가운데, 40세가 되던 해인 1860년 4월 5일 신비한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천주(天主=한울님=하느님=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자신이 천주로부터 받은 도를 전파하기 위한 종교를 창시했다. 그는 이 종교를 동학(東學)이라 하고, 하늘의 주인이자 만물의 주인인 천주를 마음에 성심껏 모시는 시천주(侍天主)가 바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천주로로부터 받은 도와 자신이 깨달은 도를 논리적으로 정립해,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대중을 위한 한글 가사체 형식의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완성했다. 

     

     

    천도교의 발상지 경주 용담정 / 수운이 도를 깨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운이 그 종교를 동학이라 한 것은 당시 창궐하던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다분히 민족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공격한 것은 서학이 아니라 유학자들이었으니, 전통 유생들의 배척을 받은 수운은 '바르지 못한 도로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1864년 대구에서 처형당해 효수되었다.

     

    하지만 동학은 이미 민중들에게 파급되었고,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1880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동경대전>을, 1881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며 합리적인 종교로써 더욱 민중에게 다가갔다. 그리하여 1869년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에 대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은 당시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맞물리며 전제 봉건주의 집권체제에 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으로 발전되어갔다.(이로 인해 1894년 교주 최시형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892년 동학교도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켜 전주성을 점령하고 1894년 10월 한양을 목표로 진격하였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연합한 일본군에 의해 대패하며 와해되었다. 이후 전라도에 남아 있던 김개남 손화중의 동학교도들도 각개 격파되고 전국적으로 소탕작업이 일어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 '전봉준과 서광범')

     

     

    서울 종로3가 구 단성사 극장 앞의 최시형 순교지 표석과 좌포도청 터 표석
    전봉준이 투옥돼 처형된 종로 2가 전옥서 터 표석과 영풍빌딩 앞의 전봉준 동상

     

    이후 동학은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을 바꾸며 명맥을 이었으나 1906년 김연국 이용구 등이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분립하며 약화되었다. 하지만 천도교는 손병희를 중심으로 중흥을 꾀하였고 3.1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종교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손병희가 1922년 사망한 후 다시 교단 분열이 일어나 신· 구파로 나뉘었으며, 또 그 틈에  자립한 천도교계의 각종 신흥종파들도 생겨나며 더욱 어지러운 양상으로 치달았다. 

     

    결과는 거의 공멸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천도교는 민족종교로서의 성세를 잃고 유명무실해졌는데, 여기에는 교단의 분열 외 앞서 말한 교리의 부정립(不定立)도 한몫한다.

     

    교조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문자 그대로 천주(天主), 곧 하늘에 계신 유일신 하나님을 받들자는 뜻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본래부터 전래되던  민족 고유의 신 하나님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서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I)-게일이 말한 조선의 하나님',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II)-언더우드가 말한 고구려의 신' 등 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박인로(1561~1642)의 <노계집>에 나오는 하나님

    時時(때때)로 머리 들어 北辰(북쪽 별)을 바라보고 남 모르는 눈물을 天一方(하늘 한쪽)에 떨어뜨리는도다. 一生(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니다. 하나님이시여. 山平海渴토록(바다와 산이 마르고 닮도록) 우리 聖主萬歲소서.(우리 성군을 만세토록 지켜주소서)  

     

     

    즉 최제우는 전래의 초월적 '천주'를 인간이 숭배대상으로 모셔야 하는 인격적 존재로 보고 이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시천주'의 종지(宗旨)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이 최시형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천주'(養天主)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 사상에서 나타나듯 다분히 내재적이고 비인격적인 성격으로 전환했다. 즉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여 있으므로 인간이 잘 길러야 하는 존재('양천주')로서 나타나거나 '사인여천'에서처럼 '천주'의 '주'자(字)가 탈락되어지게 된 것이었다. 

     

    천도교로 개편된 손병희시대에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사실 이는 종교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철학적 개념에 가깝다. 이에 어느 현자께서는 '인내천'에서는 천주의 개념이 더 극단적으로 추상화되고 내재화되어, 이때의 하느님(혹은 하나님)은 상당히 비인격적 형태를 띤 '천'으로서 성리학에서의 '천' 개념과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후 교리가인 이돈화(李敦化)와 백세명(白世明) 단계에 이르러서는 하느님이 '한울님'으로 개칭되면서 범신론적인 형태를 취하는데, (여기서의 한울님은 우주 자체를 지칭하며 변화·발전하는 생명체로 인식된다) 이렇게 사변화(思辨化)된 '천'의 개념은 민중의 이해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한 자성인지 현재 천도교 교단에서는 최제우가 내세웠던 초월적인 하느님 사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옛 개벽사 터와 천도교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 앞을 지내며 (이상은 한 곳에 있다) 떠오르는 단상들을 예전에 읽은 글과 연계해 간략히 써 보았다. 모름지기 종교는 초월자에 의지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초월자가 인간과 동격이라면 그 종교를 신봉하기는 좀 어렵지 않은가 하는, 그와 같은 의문스러움에.....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의 건물을 왜 일본인이 지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손병희는 신도들로부터 30만 원을 모금해 22만 원으로 중앙대교당을 짓고(1918. 12. 1~1921. 2. 28) 나머지는 3.1 만세운동의 자금으로 썼다.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시내 3대 건축물의 하나였던 이 교당은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1880~1963)가 설계했다.

     

     

    개벽사 터 푯말 / <개벽>, <별건곤>, <어린이> 등을 발행한 개벽사에 대한 안내 동판이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수훈회관 대문 기둥에 붙어 있다.
    대지 1,215평 위에 건평 280.68평으로 이루어진 중앙대교당 건물은 일본인 나카무라(中村興資平)의 설계 위에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고 일본인 후루타니(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완성했다. 아마도 당시에는 이와 같은 대역사를 수행할 조선인이 부재했을 것인데, 본시 건립을 반대했던 총독부의 허락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건축양식은 당시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등지에서 유행하던 세제션(Secession) 양식이다.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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