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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동 정양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2. 5. 22:22
서울 성동구 금호동은 지금은 유명 연예인이 많이 거주하는 부촌이 됐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서울의 내로라는 빈촌의 하나였다. 특히 인구밀도가 엄청났다. 이유는 분명 있었다. 이른바 문안(사대문 안)이라 불리는 서울의 중심지와 가까웠고 그에 반면 지가는 헐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까닭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거주지가 되었고,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맞물리며 필연적으로 판자촌 달동네가 생겨났다.
도심에 가까운 편임에도 지가가 헐한 이유는 주택지의 대부분이 산기슭에 의지해 형성되었던 까닭으로, 금호동에 가기 위해서는 약수동으로부터 가파른 금호동 고개를 넘거나, 왕십리로부터 논골 고개를 넘거나, 한남동 고개를 넘어야 했다. 넓게는 남산 자락, 좁게는 해병대산 · 대현산(수도국산) · 매봉산 · 응봉의 영향으로 만만치 않은 고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 바로 금호동이었다.
1960년대 초 금호동 고개 / 왼쪽의 해병대산과 오른쪽의 대현산 사이를 관통해 만든 도로다. 위 위치를 찍은 사진 / 눈이 많이 오면 버스가 이 고개를 넘지 못해 주민들은 약수동 신당동까지 걸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금호동 일대는 수철리(水鐵里, 순우리말로는 무수막)이라 불렸으나 인가가 거의 없는 공동묘지였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당시 금호·옥수동 일대는 확인된 무덤만 3만2천 기가 있던 공동묘지 군(群)이었는데, 특히 금호초등학교 일대에 무덤이 밀집되었다. 그 무덤들을 관리하는 관리인(묘지기) 사택이 금호동 2가 672번지에 있었다는 얘기를 '서울의 공동묘지 변천사와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한 적이 있다.
1922년 <경성도> 속의 수철리(금호동) 공동묘지
위 금호동 고개는 해방 후 우리의 힘으로 뚫은 도로로서 금호동의 관문 같은 곳인데, 일제강점기에는 길 뚫기를 포기하고 현 금호여자중학교 부근에서 금호동 로터리를 연결하는 터널을 만들었다. 터널을 만드는 것이 산자락을 뚫어 도로를 만드는 일보다 용이했기에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니, 과거에는 그만큼 산세가 험했다는 소리다. 한국전쟁 때 방공호로 쓰이기도 했던 이 터널은 금호동 고개가 뚫린 후 방치되다 매립되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땅굴 같던 터널이 있던 자리
금호동 고개를 넘으면 금호동 1, 2가가 나타났고, 고 신영균 배우가 경영하던 금호극장과 그 아래의 현대극장을 지나면 옥수동으로 연결되는 3, 4가가 나타나는데, 이곳부터가 본격적인 달동네요 산동네였다. 금호동 3, 4가는 1985년 강남으로 연결되는 동호대교와 옥수·금호터널이 만들어지며 진입이 쉬어졌지만, 그렇다고 환경이 개선되지는 않았으니 사진작가 임인식의 아들 임정의 작가가 찍은 아래 사진은 1989년 사진임에도 길가 주변으로는 판자촌 수준의 집이 가득 들어찬 파노라마와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1989년 임정의가 금호터널 오른쪽 산동네를 찍은 3장의 사진을 이어붙여 만든 사진이다. 금호터널 쪽 사진 지금은 이렇게 변했다. / 동호로에서 본 금호터널
달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녔던 금호초등학교(당시는 금호국민학교)는 당연히 과밀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내가 애독하던 <마당>이란 월간지(1981년 9월 창간-1986년 10월 폐간)에서 1960년대 초 금호초등학교의 교사를 하다 월계초등학교로 전근을 간 한 여교사의 수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녀는 자신의 전근 이유를 "서울에서 유일하게 3부제 수업이 행해지던 금호국민학교에서는 도무지 교사로서의 교육관을 펼칠 수 없어서"라고 밝혔다.
교육자로서의 책임감을 방기한 점에 대한 가책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자신의 이기적 교육관을 떳떳이 피력할 정도로 당시 금호초등학교의 교육환경은 나빴던 듯하니, 오죽했으면 그 여교사는 이런 글을 잡지에 실었을까.... 부끄럼 따위는 1도 없이.... 아무튼 당시 금호초등학교의 환경은 그러했는데, 이후 금옥, 옥정, 금북, 금남초등학교가 생겨 학생들을 분양(?)하며 사정은 좀 나아졌다.무수막 16길의 서울금호초등학교 정문 동호로에서 본 서울금옥초등학교 <마당> 창간호
60년대의 금호동은 어쩌면 서울 서민들의 삶의 대표할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선진국 소리를 듣는 대한민국이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서울 서민들의 삶은 이러했다. GDP는 1961년 93달러였고, 이후 1977년 천 달러, 1994년 만 달러, 2006년 2만 달러를 돌파했다. 따라서 모두가 다 못살지는 않았고 일부는 잘 살았을 텐데, 금호동 사람들 역시 그러했으니 모두가 산동네, 달동네에 살지는 않았고 대지 100평 이상의 저택들도 있었으며, 이른바 집장사들이 지은 그런대로 살만한 집들도 많았다.아무튼 세상 사는 곳은 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법, 위의 GDP가 말해주듯 그간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놀란 무서운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럼에도 명암은 있어 금호동 달동네들은 1990년대까지 연탄이 필수였다. 연탄은 겨울철 산동네에 몰아치는 한강의 찬바람에 저항하는 유일한 무기로서 그 재(灰)까지도 유용했다. 연탄재를 눈길에 깔아 밟지 않으면 산동네 골목길을 걷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사진작가 한영수가 찍은 아래 금호동 달동네의 겨울 사진은 한영수의 사진답게 1956~1963년으로 두루뭉술하게 설명되지만 1960년대 초의 모습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영수가 담은 금호동 달동네
오늘은 특별히 금호동 정양원(正養院)을 소개하려 한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끔 '금호동 정양원'을 검색하는 분들을 '시라소니 린치사건의 진실(II) - 이성순과 김두한'에서 조우하게 된다. 그 글에서, 시라소니 이성순이 동대문사단 이정재에게 삥을 뜯어 정양원 상이용사와 그 가족들을 후원했다는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내가 한국전쟁 상이군인 재활센터인 금호동 정양원 관계자에게 들은 말이기도 하다.한국전쟁 부상자 모임인 대한 상이군인 연합회가 운영하던 금호동 정양원은 1960년대에는 학교 급식용 옥수수빵과 백마제과라는 이름의 건빵공장을 운영하며 재활을 이어갔지만 전쟁이 끝난 50년대에는 그야말로 막막했다. 이에 그들은 때로는 의족과 의수를 떼 휘두르는 등의 행패로써 상가에서 금품을 갈취하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던 바,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시라소니는 그들 상이용사들을 위해 이정재에게 삥을 뜯어 상이군인들과 그 자녀들에게 후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점점 액수가 과해지고 그들 상이군인들이 직영할 수 있는 동대문시장 점포를 요구하면서 이정재 부하들이 들고일어났던 바, 이것이 1953년 여름 발생한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다. 이후 정양원 상이군인들은 시라소니의 복수를 준비했는데, 그 소문을 들은 동대문 깡패들이 선제공격을 취해 금호동으로 원정을 왔다가 정양원 사람들의 목숨 건 저항에 흠씬 두드려 맞고 도망간 일도 있었다.
아무튼 시라소니는 그렇게 한국전쟁 상이용사들을 도왔고, 정부에서도 미국에서 돼지 사료의 용도로 원조받은 퓨리나사(社) 제조 옥수수 사료를 정양원에 무상지원함으로써 재활을 도왔다. 정양원에서는 그것으로 급식용 빵을 만들어 여러 학교에 싼 값으로 납품했는데, 구멍 숭숭 뚫린 그 옥수수빵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다.
정양원은 이후 정식으로 백마제과라는 제과업체를 세웠고 상이군인들이 만든 백마건빵과 별사탕은 월남전 파병군인에게 공급되기도 하고 시중에서 팔리기도 했으나, 미국으로부터의 옥수수 무상원조가 끊기고 1971년 7월 17일 큰 불이 나며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정양원이 있던 곳 / 지금은 재개발 컨테이너 사무실이 놓였다. 주변에는 롯데캐슬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아직도 옛 풍경이 남아 있다. 철거가 예정된 건물들이다. 주변의 눈길을 끄는 건물 금호동으로부터 멀지 않은 한강 까닭에 1972년 대홍수로 인한 한강물 역류에 금호동과 한남동 저지대가 물에 잠기며 난리가 났다. 내가 기억하는 사상 최고의 물난리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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