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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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 극단의 정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5. 22:49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만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로 정배 된 이유는 이른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다. 윤상도 옥사 사건은 윤상도라는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 등의 관리를 탐관오리로 탄핵했다가 역공을 받아 국문 중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김문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전(前) 세도가의 좌장인 경주김문의 김노경을 지목했던 바, 바로 김정희의 아버지였다. 이에 김노경은 전라도 절해고도인 고금도로 유배가게 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는 윤상도가 제출한 탄핵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죄로 뒤늦게 잡혀갔는데, 안동김문은 그의 죄가 아비 김노경보다 더 깊다 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문 과정에서 관련된 증인들이 모두 고문치사하는 바람에 공소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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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테브레이와 하멜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12. 23:54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표류한 하멜 일행을 조사한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매우 열린 마음의 사내였고, 또 당대의 세계를 알고 있던 드문 관료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원진이 하멜 일행에게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吉利是段, 크리스찬)인가?" 물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는 하멜 일행을 과거 광해군이 유배되어 살던 집에서 생활하게 했다. 광해군은 그들이 도착하기 12년 전인 1641년 세상을 떠나 집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이원진은 최대한의 배려였다. 어쩌면 그는 하멜 일행을 객관인 영주관(瀛州館)에 묶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는지 모르겠으나 차마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는 터, 광해군이 살던 넓은 집을 숙소로 내주었던 것이다. 앞서 '광해군의 제주 유배지를 가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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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의 역사적 건물, 충정·성요셉·서소문아파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9. 23:58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는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기려 명명한 도로이다.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칼로 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그와 같은 죽음은 많지 않다.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의 유교사상은 죽음에까지 적용되었으니 할복과 같은 결기를 보여주는 죽음은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민영환은 차고 있던 긴 칼을 빼 유혈 낭자한 죽음의 길을 택했다. 망국의 신하로서 처절한 죄값음을 하겠다는,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굴복이 아니라 강한 저항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충정로는 이렇듯 지명의 유래가 분명하니 충정로역 부근의 충정아파트는 처음에는 그 이름이 아니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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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실종사건과 중앙정보부의 부장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7. 23:54
1979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증발했다. 그는 지금까지 소식도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른바 '김형욱 실종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결론은 대강 나와 있다. 전 중앙정보부장 시절 취득한 대통령 박정희의 비리에 대해 떠들어대던 김형욱을 현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부하를 보내 납치 살해했다는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초대 부장은 김종필이었다. 5.16 쿠데타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김종필은 미국 CIC를 모방한 정보기관을 만들어 1년 8개월을 재직했다. 실권자였던 김종필은 그 1년 8개월 동안 중앙정보부를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조직화시켰다. 이어 김용순이 2대 부장으로 2개월을 재직했고 김재춘이 3대 부장으로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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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중림동)에 살던 사람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6. 21:42
만리동이라는 명칭은 만리재(萬里재) 혹은 만리현(萬里峴)에서 유래되었다 둘 다 만리고개라는 의미이니 같은 소리인데, 조선 세종 때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최만리(崔萬里)가 이 고개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에 반대해 신하로써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가 올린 상소에는 반대의 이유가 분명하다. 대국 중국이 쓰는 문자인 한문을 버리고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것은 여진이나 일본 같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이니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그는 중국에 대해 늘 "쎼쎼"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였던 같다. 이에 세종대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제 나라 문자를 가지면 오랑캐란 말이냐? 나는 백성들이 우리나라 말을 우리 식으로 편히 적게 하려는 것이거늘,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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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기념물 1~5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5. 22:24
이번에 잠원동의 '잠실리 뽕나무'를 찾아가며 '서울시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내(內)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시(市) 차원에서 지정·보호하려는 목적으로서, 지금까지 44호가 지정되었다. 다만 종로구 세검정이나 이화장(이승만 대통령 사저)처럼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며 지정 해제된 곳도 있고, 자양동 낙천정 터처럼 장소 불확실 및 고증 미흡 등의 이유로 가치가 상실돼 해제된 곳도 있다. 마침 1~5호는 모두 1~2년 사이에 다녀온 곳이라 최근 사진을 소개한다는 의미로 포스팅해 보았다. 1~5호의 개관은 아래와 같다. 번호 이름 (한문표기) 소 재 지 지정년월일 1호 잠실리(蠶室里) 뽕나무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1-54 1973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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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원나루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뽕나무와 가장 비싼 아파트가 있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3. 22:35
앞서 말한 새말·사평나루 근방에는 잠원나루가 있었다. 잠원한강공원 신사나들목 입구에 위치한 '잠원 나루터' 표석을 보면 잠원나루는 「한남대교 북단 한강진(漢江鎭)에서 말죽거리 원지동을 거쳐 삼남지방(충청·영남·호남)으로 이어진 교통 중심지였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주변의 이수나루와 더불어 작은 나루였다는 것이 이곳 토박이들의 증언이다. 다만 이 작은 나루가 왕실과는 관계가 깊었으니 역대 임금이 헌인릉, 선정릉 행차 시 도강(渡江)하였고, 문정왕후와 같이 불심 깊은 사람은 봉은사 왕래 시 이 나루를 이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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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신사동 나루를 배 타고 건너던 시절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4. 2. 22:28
새말나루는 조선시대 한강 사평리(沙坪里)에 있던 나루터였다. 새말과 사평리는 생소한 지명이겠지만 강남구 신사동은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다. 강남구 신사동은 새말의 새(新) 자와 사평리의 사(沙) 자가 합쳐져 생긴 동명(洞名)으로, 1962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다가 1963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1975년 분구(分區)가 이루어지며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사평리는 문자 그대로 '모래밭 마을'로, 고려시대에는 사평도(沙坪渡)라 불리었다. 아울러 나룻가에 사평원(沙坪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같은 구전에 의지하자면 마을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된 듯하다. 잠원 한강공원에 세워진 표석에 따르면, 사평리는 조선시대에도 한남동 한강나루터와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어 상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