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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거운 마음으로 경청한 덕소 득수리 전설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5. 1. 7. 18:18

     

    서울 근교에 석실마을이라 불리는 동네가 두 곳 있다. 한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이요, 다른 한 곳은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석실마을이다. 둘 다 안동김씨 문중과 관계가 있는 곳으로서, 얽혀 있는 이야기도 비슷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헛갈리는 부분이 상당했는데, 그 두 곳을 두어 차례 실사한 지금은 확실한 개념 정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보고서 같은 것을 앞서 포스팅한 바 있다. 

     

    남양주시 수석동 석실마을은 '서울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ㅡ 조말생 묘가 있는 석실마을'에서,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석실마을은 '선원 김상용은 정말로 자폭 순절했을까?'에서 다루었다. 

     

     

    서울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ㅡ 조말생 묘가 있는 석실마을

    전설 따라 삼백만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발품을 팔며 보고 들은 것을 포스팅하고 있는데, 오늘은 그간 보았던 서울 인근에서의 최고 비경을 공유하려 한다. 말한 대로 그 위치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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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 김상용은 정말로 자폭 순절했을까?

    역사적인 1876년의 강화도조약 체결 장소가 이제껏 알려진 강화성(강화산성) 서문 안 군사훈련장의 전각 연무당(練武堂)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연무당이 어떻게 해서 강화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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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에서 채록한 안동김문에 관한 전설 두 꼭지를 소개하려 한다. 앞서 말한 대로 덕소리 석실마을은 조선 중기 안동김씨 김번(1479∼1544)이 이곳에 묘를 쓴 이래 안동김씨의 세거지가 된 곳이다. 그래서 대부분 김번을 입향조(入鄕祖)라고 여긴다. 언뜻 김번이라는 자가 산자수명한 이곳을 택해 정착한 후 그 후손들이 씨를 퍼뜨려 번성한 마을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니, 이곳 석실마을은 안동김씨가 들어오기 전 이미 남양홍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었다. 앞서 '아치울 고인돌과 남양홍씨 선영'에서 말한 것처럼 남양홍씨 역시 조선시대 끗발 깨나 세우던 양반가였다. 그래서 뭔가 이해가 안 된다. 일반 백성들의 마을이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듯 대단한 양반가가 세거지를 뻬앗겼다는 사실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 해득 어려운 현실을 아래와 같은 전설이 커버한다. 

     

    언급한 대로 덕소리 석실마을은 남양홍씨의 세거지였다. 물론 선산도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살던 남양홍씨 가문의 한 여자가 안동김문으로 출가했던 바, 그 남편이 바로 김번이었다. 사단은 그 홍씨부인이 친정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상을 치르러 오면서 시작되니, 그녀는 그때 지관이 택한 친정아버지의 장지(葬地)가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천하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옥호저수형은 옥항아리에 물이 담긴 형세란 뜻으로, 후손들이 모두 입신양명할 길지(吉地)라는 것이었다. 

     

    홍씨부인은 그 자리가 욕심이 났다. 어차피 출가외인이니 친정식구보다는 제 아들이나 손자의 발복을 기원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터였다. 발인 전날, 홍씨부인은 자신의 아버지 관을 묻으려고 파놓은 무덤 구덩이에 밤새 물을 길어 들이부었다. 그 이튿날 상여는 장지 앞까지 왔으나 결국 입관하지 못했으며, 나아가 길지라던 그 묏자리는 흉지로 변해 방치되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인 김번이 죽자 홍씨부인은 버려진 그 장지에 제 남편을 장사지냈다. 

     

     

    김번 묘
    김번 묘명비 / 생전의 행적을 적었다.
    김번 묘 문인석
    홍씨부인이 물을 퍼 날랐다는 전설이 어린 연못
    연못과 선산
    묘원에서 바라본 석실마을

     

    그 조상묘를 따라 석실마을로 하나 둘 안동김씨들이 이사를 해왔다. 그런데 정말로 옥호저수형의 길지가 어떤 신통력을 발휘했는지 수많은 고관대작이 배출되었던 바, 이후 300년간 이 가문은 문·무과 급제자가 300명이 넘었고, 정승·판서는 150여 명에 이르렀으며 왕비를 3명이나 배출하였다. 이에 안동김문은 비변사와 왕실까지 장악한 최고의 명가로 조선말까지 군림을 하게 되니, 안동김씨 60년 세도를 연 장동김문(서울 장동에 사는 안동김씨 문중)의 김조순 역시 뿌리는 이곳 석실마을이다.

     

     

    순조의 장인이었던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 1765~1832) / 훈련대장·부제학·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안동김문 세도정치의 기반을 닦았다.
    김조순의 일가는 고종 때까지도 세도를 누렸다.

     

    장동김문이 부귀와 문화를 구가한 조선 최고의 명가로 자리하게 된 데는 김상용(1561~1637)과 김상헌(1570~1652)이라는 두 명의 명신(名臣)을 빼놓을 수 없다.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 척화파이자 충의지신(忠義之臣)이었던 이 두 사람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하니, 특히 예조판서 김상헌은 척화파의 거두로서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과 사사건건 맞서 싸운 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남한산성' 속의 김상헌과 최명길
    석실마을 김상헌의 묘 / 김상헌은 청음(靑陰) 혹은 석실산인(石室山人)의 호를 사용했다.
    무덤 곁의 묘명비
    김상헌 신도비
    송백당유허비 / 김상헌이 심양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은거한 석실마을 송백당터에 세워졌던 기념비석이다. 송백(松柏)은 절개의 상징인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를 의미한다.
    취석비 / 취석(醉石)은 '도연명이 술 마시던 바위'라는 뜻으로, 도연명의 고사와 김상헌의 충절을 비겨 송시열이 써 준 글씨를 각자했다. 언덕 위에 김상헌 묘가 보인다.

     

    김상헌의 형 선원(仙源)  김상용 또한 안동김문 충절의 표상이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성의 남문을 지키다가 청나라 군대가 침공하자 문 위에 쌓아놓은 화약을 터뜨려 손자 김수전과 함께 폭사해 순절한 인물이다. 까닭에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기려졌고 예조에 의해 치제(致祭, 나라에서 내리는 제사)로 모셔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380년이 지난 어느 날,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책임연구원이 발표한 글로써 불편한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의 죽음은 절사(節死)가 아니라 담배불 실화로 인한 사고사로서, 오히려 청군과 싸울 무기였던 4000근의 화약과 화포 및 성문을 날려버린, 그리고 곁에 있던 손자와 의병장 권순장 등도 함께 폭사시킨 장본인임이 규명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 10년 전인 정묘호란 때 유도대장(留都大將, 임금이 서울을 비웠을 때 도성을 지키던 대장)이던 그가 적병의 임진강 도강(渡江) 소식을 듣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 사실 또한 밝혀졌다.

     

    그로 인해 도적이 횡행하여 여러 관청이 불타고, 노량나루에 보관해 두었던 양곡 1000여 석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에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인조 임금이 "도성을 무너지게 한 김상용을 추고하라!" 는 어명을 내린 적도 있는 문제적 인물이었으나, 훗날 안동김문의 끈질긴 상소로 결국은 만고의 충신으로 포장되는 데 성공한다. 이와 같은 거짓 포상은 현대사에서도 발생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바, 과거에는 오죽했으랴 싶다. 

     

     

    석실마을 김상용 묘 / 왼쪽은 손자 김수전 묘
    김상용 신도비
    최근에 세워진 충효각 / 김상용과 손자 김수전의 정려문(文)을 걸었다.

     

    아무튼 안동김씨는 그렇게 명문가가 되었으니, 장동김문은 서울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60년 세도를 누렸고 남양주의 남은 안동김씨 역시 향반(鄕班)으로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시골 양반의 세도는 오히려 장동김문을 능가하였으니, 그 단적인 증명이 바로 덕소리 석실마을 '득수리고개'다. 고개를 넘을 때 수레를 들고 지나갔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하였을까?  

     

    득수리 고개는 덕소리 석실마을과 율석마을 사이에 있던 얕은 고개로 한양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가는 행인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의 안동김씨 양반들은 행인들이 내는 소음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행인들은 득수리 고개를 넘을 때는 말소리, 발소리를 죽여야 했는데 문제는 수레였다. 수레 소리는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곳 양반들이 명했다. "앞으로 이곳을 지날 때 수레를 들고 지나가라!"

     

    그 못된 향반들은 수석동 석실서원을 배경으로 세도를 부렸다. 석실서원은 위에서 말한 김상용, 김상헌 형제를 배향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서울 근교의 대표적 서원이다. 이 석실서원은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흥선대원군이 꼭 찍어 철폐를 명했을 정도로 폐해가 큰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한즉 서원이 남아날 리 없었으니 흔적조차 없이 깡그리 사라졌고, 덕소리 석실마을의 안동김씨도 힘을 상실했다. 지금 그곳에 남은 안동김씨는 단 3가구라는 후문이다.

     

     

    득수리 고개로 추정되는 곳
    남양주 석실마을에 세워진 석실서원지 표석 / 위세 높던 석실서원의 유일한 흔적이다.

     

    덕소리 석실마을은 현재 공장 창고만 즐비하고 농사 짓는 가구마저 적다. 농가 하우스에서 만난 마을주민의 말을 빌리면 지금 안동김씨는 거의 떠났지만 매년 시제 때 수십 명의 종중사람이 모여 제를 올린다고 한다. 더불어 나와 같은 호사가들이 전국 8대 명당이라 하는 김번의 유택을 보러 가끔씩 찾는다고 하는데, 나는 몇 번을 보아도 그곳이 명당인지 모르겠다. 풍월로 들었던 좌청룡 우백호 같은 산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이와 같은 출가외인 유형의 풍수전설이 어디 여기 뿐이랴? 전국에 비슷 비슷한 전설을 공유하고 있는 곳은 허다하니 내가 사는 구리시 장자못 전설은 강원도 황지 못 전설과 거의 동일하다. 장자못 전설은 탁발승에 쌀 대신 똥을 퍼준 심술장이의 마을에 폭우가 퍼부어 마을이 연못으로 바뀌었다는 권선징악 유형의 전설이다. 최래옥의 서울대 석사논문 '설화와 그 소설화 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따르면 전국의 장자못 전설은 138종이나 되고, 실제 채록된 곳만 해도 39개 지역이다. 출가외인 유형의 풍수전설도 찾아보면 만만치 않으리라 본다.  

     

     

    전국 8대 명당이라는 김번의 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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