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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ㅡ 조말생 묘가 있는 석실마을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4. 2. 3. 21:40

     
    전설 따라 삼백만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발품을 팔며 보고 들은 것을 포스팅하고 있는데, 오늘은 그간 보았던 서울 인근에서의 최고 비경을 공유하려 한다. 말한 대로 그 위치가 서울 인근이니 어쩌면 비경(秘景, Secret Place)이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하지만 크게 소문나지 않은 곳임은 분명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거두절미하고 우선 사진을 보자. 
     
     

    조말생 묘에서 본 석실마을 / 보이는 한강은 미호(渼湖)라고도 불린다.
    석실마을 입구 표석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1154-3에 위치한다.
    표석의 뒷면 / 지금은 사라진 석실서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고장을 옛사람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우선 겸제 정선은 미호(渼湖)라는 제목의 그림을 2점 그렸다. 미호는 이 일대의 한강을 말하는 것으로서, 위에서 내려보면 뭍에 연접한 만곡부가 정말로 물놀이, 뱃놀이를 즐길만한 호수로 보인다. 미호의 미(渼) 자는 바로 그러한 뜻인데, 지금의 미사리 건너에는 뱃놀이를 즐기는 듯한 배들이 떠 있다. 그 안의 기와집들은 필시 석실서원일 게다.   
     
     

    겸제 정선의 미호
    겸제가 그린 또 다른 미호 / 강 건너 미사리에서 바라본 미호와 석실마을이다.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남한산성 척화파의 거두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 형제를 배향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대표적인 한양 근교의 서원이다. 이 석실서원은 송시열을 배향한 도봉산 밑 도봉서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온상이 되었던 바,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따라 없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그 터에 표석만이 세워져 있다.
     
     김상용이 강화도 남문에서 자폭(自爆) 순절한 것이 맞는지,(혹은 남문루에 쌓아놓은 화약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 실화되어 폭사한 것인지) 그의 동생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주장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아울러 위기의 임금을 보필하지 않고 홀로 시골로 가 은거한 행동이 옳았는지 그릇됐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증은 이미 마쳤던 바, 여기서는 열외로 하겠다.
     
    ※ 참고
    1.  '병자호란 그때 조선에는 최명길 한 사람만 있었다'
    2.  '선원 김상용은 정말로 자폭 순절했을까?'
    3.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 끔찍이 위하던 조선의 양반'
     
     

    석실서원지 표석
    석실서원지에서 본 석실마을
    석실마을에서 본 미호
    석실마을 보호수 느티나무
    주변 풍경

     
    한없이 조용해 보이는 마을 외관과 달리 흥선대원군 때 이곳에는 한 차례 태풍이 휩쓸고 갔다. 위에서 말한 서원철폐령이 그것이다. 이에 겸제 그림 속의 큰 집들은 모두 사라졌는데, 거기서   나온 벽돌, 주춧돌, 기왓장이 이 동네 집들의 건축자재로 쓰였다 하니 서원이 좋은 일 하나는 했다. 물론 본의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후 이 마을에는 또 한번의 큰 소동이 있었다. 고종이 민왕후와 자신이 묻힐 묫자리로 경기도 금곡의 양주조씨 선영을 점찍고, 양주조씨 무덤들을 이곳으로 옮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을미사변 때 일본 무뢰배들에 의해 시해된 시해된 민왕후의 무덤은 원래 청량리 홍릉에 있었다. (지금도 홍릉수목원  안에 자리가 있다) 그러나 고종은 청량리 장지가 명당이 아니라며 1899년 경기도 금곡으로의 이장을 명했다.
     
    그렇게 마련된 것이 금곡의 홍유릉이다. 하지만 본래 금곡에 있던 2만 여기의 무덤은 갈 곳이 없어졌으니 여러 선영 무덤은 전국 이리저리 흩어지거나 망실되거나 했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고,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었지만 임금이 제 묫자리와 와이프의 묫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으니 할 말이 천지라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양주조씨의 선영은 거의 천장될 수 있었다. 금곡 선영에 있던 국초(國初)의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을 비롯한 양주조씨 조상들의 무덤은 석실서원이 자리했던 빈 땅으로 옮겨왔다. 어찌 보면 아비 흥선대원군이 아들의 유택(幽宅) 마련에 일익을 한 셈이다. 하지만 그 많은 무덤들이 제대로 이장되었을 리 만무할 터, 태조~세종 때까지 활약한 대신(大臣) 조말생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변변히 수습되지도 못했다.
     
     

    조말생의 무덤
    조말생의 무덤에서 본 한강

     
    지금 조말생의 무덤 비탈 쪽에 세워진 수 많은 석비와 석물이 당시 급작스런 이장의 증거들이다. 그중 제법 높은 관직을 가졌던 인물들의 무덤 몇 기는 훗날 후손들에 의해 평장(平葬) 형식으로 모셔졌지만 나머지는 아무 데나 묻혔고, 석비와 석물들도 미처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했다. 
     
     

    조말생 묘 비탈의 석물들
    알만한 이의 묘표도 있다.
    평장으로 모셔진 몇 기의 무덤
    양주조씨 후손들이 세운 무덤 입구의 영모재정비
    석실마을 영모재 / 조말생을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혼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으니, 낯선 무덤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며 본래 있던 묘소가 도미노 현상처럼 횡액을 당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괄(李适) 일족의 묘소이다. 오래전 남양주문화원에서는 일대를 조사하던 중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에 연루되거나 휩쓸려 처형된 이괄 문중 무덤이 이곳에 있었음을 확인했다. 새 무덤들에 의해 밀려난 이괄 일족의 깨진 묘표와 석물들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나마 근래에 마을 교각이나 교회 등이  세워지며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리 조용한 곳이라 해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혼란스럽다. 그것은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듯, 이 마을에 위치한 수석리 토성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곳 강변에 우뚝 솟은 해발 81m의 수석산에는 백제시대에 쌓은 수석리토성(水石里土城)이 존재하는데, 토루(土壘)는 145m에 불과하나 한강의 길목을 지키고 선 지리적 중요성에 삼국쟁패의 역사가 느껴진다.
     
     

    석실마을의 수석리토성 푯돌
    수석리토성 오르는 길 / 제법 가파르다.
    수석리토성 오르는 계단
    수석리 토성
    수석리 토성 안내문
    수석리 토성에서 본 낙조

     
    이 토성에서 강쪽을 향해 가면 과거 남양주와 광주를 잇던 미음나루를 만나고, 반대쪽으로 가면 조말생 신도비를 만날 수 있다. 미음나루는 과거 남한산성의 군량미를 운반하던 큰 나루였으나 지금은 쇠락하고 대신 카페와 음식점이 붐빈다. 조말생 신도비 역시 금곡동 묘적산 끝자락에 있었던 것을 고종 때 옮겨왔다. 비는 국초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숙종조 때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개인 집 가운데 있어 입구를 잘 찾아야 한다.
     
     

    미음나루 안내판
    강변의 미음나루 버스정류장
    미음나루 낙조
    가정집 울타리 밖에서 본 조말생 신도비
    가정집 옆 다산한강팰리스 마당 철제계단을 오르면 조말생 신도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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