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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이 된 이소룡과 법주사 팔상전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3. 9. 1. 22:56

     

    과거 세대에는 엄청난 팬덤을 형성한 이소룡( 李小龍, Bruce Lee)이었지만 지금 세대는 그의 이름을 거의 모른다. 하긴 그가 죽은 지도 벌써 50년이니 기억을 바라는 것도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는 1940년 11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1973년 7월 20일 홍콩에서 사망한 영화배우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 이주했던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중국-독일 혼혈인이다)
     
    그래도 younger인 30대 무리들이 반색하며 그를 기억해 냈는데, 흥미롭게도 그의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아니라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를 통한 간접 기억이었다. 하긴 근자에도 TV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의 재방영을 본 적이 있으니..... 그러고 보니 유하 감독의 그 영화는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우리에게 '정무문'(精武門)이라는, 뜻은 모르지만 그럴싸한 제목의 영화로써 처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즉시 엄청난 팬덤을 형성했다. 1972년 홍콩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사가 만든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Fist of Fury', 즉 '분노의 주먹'으로 유치하다. 스토리도 그저 그래서, 태극권의 달인으로 무술도장 정무관을 운영하던 곽원갑이 의문의 죽음으로 사망하는데 그 배후에 상하이에 진출한 일본군이 있다는 것을 안 그의 제자 진진(이소룡)이 무예로써 복수한다는 단순한 내용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초 일본군이 진주한 상하이다)
     
    그럼에도 '정무문'은 흥행에 성공했다. 오직 주인공의 멋진 액션 때문이다. 이소룡은 이 영화에서 대역이나 조작 등이 없는 본인 스스로의 뛰어난 쿵후 실력을 선보이며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어필했다. 단구(171~172cm 정도에 약 61kg)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발차기는 쌍절곤이라는 현란하고 매력적인 무기와 함께 한국 젊은이들의 넋을 빼앗았던 바, 그가 싸울 때 내는 "아뵤~!"라는 괴성과 함께 가히 신드롬을 형성했다. (그래서 그 세대 남자 중에서 쌍절곤을 돌려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 Fist of Fury'의 포스터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상대역으로 나왔던 이 서양배우는 솔직히 무술실력은 영 아니었다. 체격도 너무 갸냘폈고.
    차라리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던 얘가 더 낫다.
    이소룡이 소개한 쌍절곤이라는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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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잡이의 최후 / 빠른 손동작과 발차기를 구사하는 이소룡의 무술은 따로 절권도라는 이름이 븥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죽박죽으로 개봉되었지만 이소룡의 첫 주연영화는 골든 하베스트와의 첫 작품이기도 한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이었다. 본의 아니게 얼음공장 직공으로 일하게 된 주인공이 얼음 속에 마약을 숨겨 운반·유통시키려는 마약조직에 맞서 싸우며 소탕시킨다는 스토리인데, 이소룡은 여기서 예의 화려한 무술로 전 아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나머지 배우는 전부 허접이고 이 조직 두목은 그래도 무술을 좀 할 줄 알았다.

     
    '당산대형'과 '정무문'의 성공에 힘입은 이소룡은 곧 '맹룡과강'(猛龍過江, The Way of the Dragon)을 찍었다. 이소룡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이 영화는 이탈리아 로마가 배경으로, 로마에서 고급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중국 여사장이 갱단에게 식당을 빼앗길 처지가 되자 홍콩의 삼촌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그래서 오게 된 약해빠져 보이는 중국 청년(이소룡)이 갱들을 제압하고, 이에 갱단이 용병으로 초빙한 무술실력자(척 노리스)마저 물리치고 사태를 진압한다는 내용이다. 

     
     

    척 노리스와의 액션씬
    이 대결은 꽤 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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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서의 입권은 이소룡과 척 노리스가 맞붙은 로마 콜로세움에서의 마지막 결투 씬으로, 척 노리스는 세계 가라데 챔피언 출신의 액션 스타답게 볼만한 액션을 제공했다. 그래서 1973년 뒤를 이어 이에 제작된 골든 하베스트사와 워너 브러더스사 합작 영화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에서는 무술에 능한 미국의 유명 배우 짐 켈리와 제법 인지도가 있는 (하지만 무술실력은 별로인)  존 색슨을 섭외해 캐스팅의 질을 높였다. (그밖에도 당시는 무명이었던 홍금보, 성룡, 원표 등이 단역으로 출연했다)
     
    '용쟁호투'는 제작자 워너 브라더스가 이소룡의 상품가치인 액션을 더욱 살린 영화로서, 영화의 배경 자체가 악당 두목 석견이 무술대회를 개최한 홍콩의 한 섬이었다. 주인공은 미국 정보기관의 요원으로서 신분을 숨기고 무술대회에 참가해 매춘과 마약이 자금줄인 이 범죄 집단을 분쇄시키는데, 그 영화 속 주인공은 물론 이소룡이다.  워너 브라더스의 생각은 주효해 '용쟁호투'는 2억 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그해 최고의 흥행을 거둔 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소룡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제작을 다 끝나고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레 사망을 했기 때문이다. 때는 1973년 7월 20일, 당시 나이 32세였다.

     
     

    무술대회 참가자로 나온 짐 켈리와 존 색슨
    이소룡과 맞붙은 오하라는 무술유단자로 나왔음에도 병을 깨서 덤비는 양아치 행동을 보여 영화의 격을 떨어뜨렸다. 화살표가 엑스트라로 출연한 재키 찬(성룡)이다.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던 멋진 몸
    특히 광배근이 일품이었다.
    '용쟁호투'에서 그는 가장 화려한 쌍절곤 솜씨를 선사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과잉운동으로 인해 먹은 근육이완제의 과다복용에서부터 영화배우 팅 페이(Betty Ting Pei)와의 복상사에 이르기까지 소문이 무성했다. 심지어는 뛰어난 무술실력의 그가 실제 킬러로 고용될까 두려워한 범죄조직 보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음모론까지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근육이완제와 팅 페이와의 복상사 설은 신빙성이 실렸으니, 이소룡의 배우자인 린다에 의하면 그가 죽은 곳은 팅 페이의 아파트였고 약간의 마약 성분과 근이완제가 함유된 이쿠아제식(Equagesic)이라는 진통제가 부검시 그의 몸 안에서 검출되었다.
     
    팅 페이도 점심식사 후 두통을 호소한 이소룡에게 아스피린과 이쿠아제식을 건넸다고 했다. 그후 이소룡은 잠이 들었으나 깨어나지 않았고, 오후 7시 30분 사망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복상사는 아니었으니, 그는 앞서 골든 하베스트사 제작자인 레이먼드 초우 및 팅 페이와 만나 점심 식사를 하며 현재 제작 중인 영화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에 대해 논의했고, 저녁 7시에는 초우, 팅 페이 및 007 제임스 본드 영화배우였던 조지 라젠비(George Lazenby)와 함께 저녁 식사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소룡의 공식 사인은 '약물 예민 반응으로 인한 사고사'였다.  
     
    골든 하베스트사는 미완성의 유작이 된 문제의 '사망유희'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사와의 '사망유희'를 완성하지 않은 채 워너 브라더스사와 '용쟁호투'를 먼저 찍었던 것인데, 문제는 이소룡이 찍은 '사망유희'의 전체 분량이 길어야 40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룡(본명 김태정)이라는 한국 배우를 투입해 큰 선글라스를 씌워 잔여분을 채웠는데, 당연히 엉망이었다. 
     
    다만 '사망유희'의 라스트 씬이 된 법주사 팔상전에서의 고수들과의 싸움은 여러모로 화제가 됐다. '사망유희'의 제작에도 관여한 이소룡은 생전에 한국의 법주사에 관광을 왔다가 5층목탑 팔상전을 보고 색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국의 고탑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탑의 각 층을 올라가며 무술고수와 대결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팔상전 내부와는 다르지만 팔상전을 연상케 하는 셋트를 홍콩에 꾸민 후 필리핀 무술 고수 댄 이노산토, 한국 합기도 사범 지한재 등을 불러 각 층의 고수로 등장시켰다.
     
    그는 그 탑의 마지막 층에는 NBA 출신의 농수선수 카림 압둘자바를 배치시켰다. 따라서 219cm의 상대와 싸우는 이소룡의 발차기는 더욱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반면 압둘자바의 발차기는 너무 후졌다) 이소룡이 가고도 그가 그런 법주사 스케치와 압둘자바와의 결투 장면은 법주사 홍보용으로 필상전에 오래 전시돼 있었다. 영화사에 걸린 것도 아니고 대가람 법주사에 이 그림이 걸렸다니, ㅎㅎ 생각해 보니 이것도 웃긴 일이다. 지금은 이소룡의 발차기도 필상전 스토리도 모두 전설이 되었다.  

     
     

    법주사 팔상전
    압둘 자바와의 결투
    팔상전에 걸렸던 이소룡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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