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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의 기원 (V) ㅡ 금강산 유점사 종과 강원도아리랑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3. 6. 23. 18:21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는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관동 제일 가람으로 장안사, 표훈사, 보살사 등 60여 개 사찰을 말사로 거느렸다. 고려 후기의 문인 민지(閔漬, 1248~1326)가 작성한 <유점사 사적기(楡岾寺事蹟記)>에 따르면 인도에서 조성한 53불이 중국의 월지국(月氏國)을 경유해 항해한 지 900년 만인 AD 4년(신라 남해왕 1)에 금강산 어귀인 안창현 포구에 도착하여 유점사가 창건되었다.

     

    발견 당시 그 53불이 느릅나무 아래 놓여 있었고, 소식을 들은 남해왕이 유점사를 창건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으로, 유점사의 뜻은 '느릅나무 고개의 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야야기는 그저 전설에 불과할 터, 당시는 인도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던 시기일뿐더러, 남해왕 1년인 AD 4년은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 치세에 무려 400년 이상 앞선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흔히들 신라에 불교에 전한 묵호자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하나, 문자 그대로 얼굴이 먹처럼 검은  호인(胡人), 즉 남방계 외국인을 말한다. 즉 묵호자는 고구려에 왔던 인도의 승려로서 내친김에 불교 불모지 신라 땅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를 전래한 승려 순도(順道)와 이후의 아도(阿道)화상도 중국에서 왔다고 하나 중국에서 포교하던 인도 승려로 추정된다.(묵호자와 아도화상을 동일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마라난타라는 승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사람이 흰 피부의 서양인이었던 것과 같은 양상이다.

     

    어찌됐든 능인보전 안에 존치되었던 유점사 53불상은 꽤 유명하니 1907년 토함산 동산령을 넘던 우체부에 의해 '재발견'된 석굴암과 함께 일제에 의해 발견된  2대 보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유점사 능인보전 안에 온전히 보존된 53불을 확인한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関野貞)는 이에 대해 '기적적인 대발견'이라 기술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도둑들을 불렀는지 지금 그 53불은 단 1구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불상들은 모두 신라 하대에 제작된 것이라고는 하나, 신라하대~조선조까지의 불상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전에 촬영되었다는 아래의 44불 사진이 전하기는 하나, 이 또한  진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유점사
    유점사 능인보전과 9층석탑
    유점사의 상징 산영루
    유점사 55불 중의 44구
    유점사 55불 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불상
    국립중앙박물관의 도제(陶製) 부처 / 흙으로 빚고 유약을 발라 구운 도제불상이다. 유약이 없는 부분을 보면 백자용 백토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34년(인조12) 청나라 사신이 요구한 물건 중 "번조석불(燔造石佛)이 포함돼 있고, 정시한(丁時, 1625~1707)은 그의 <산중일기>에서 1687년(헌종 13) 금강산 보덕굴에서 "번자불(燔磁佛)"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 불상은 문헌기록 속 도제불상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진짜유점사 불상일까? / 2014년 12월 15일 안민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금강산 유점사 53불 가운데의 하나라고 추정되는 고려말~조선초 목조불상을 확인했다고 SNS에 밝혔다. 무슨 근거일까?  유점사 53불 중 좌불은 없었던 듯한데....

     

    금강산은 조선 후기까지도 10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니 사찰이 많기도 많았는데, 그중 팔람구암자(八藍九庵子, 8개의 절과 9개의 암자)가 유명하다. 그 8개 절이 정확하게 어느 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으뜸이 유점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국보급가수 하춘화가 부른 '강원도아리랑'에도 등장하나, 가사 속의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는 팔람구암자가 와전된 가사로 여겨진다. 노래 자체는 참으로 멋드러지게 구성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 봉 팔만 구암자
    유점사 법당 뒤 칠성당에 모두 모여
    팔자에 없는 아들딸 나 달라고
    백일기도를 드리지 말고
    타관객지 외로이 떠난 사람 괄시를 마소
    정선읍에 물 나드니
    허풍선이 굴굴대는 사시장철 물거품을 안고
    요리조리 조리요리 비비배뱅글 돌아가는데
    우리 집에 내 낭군은 돌아올 줄 모르네

     

     

    하춘화의 강원도아리랑+영암아리랑

     

    위 사진에서 보이는 대가람 유점사의 당우는 대부분 1800년대에 중창된 것으로 더러는 조선초기인 세종임금 중창시기에 건립된 것도 있다 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파괴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곤 산영루의 홍예 석축밖에 없다. 하지만 유점사가 지녔었다고 하는 동종 2점은 현존하니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그중 큰 것은 묘향산 보현사에 있고 작은 것은 춘천박물관에 전한다. 

     

     

    보현사 범종각의 유점사 종 / 높이 2.1미터, 둘레 4.1미터
    유점사 종 안내문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된 유점사 동종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종으로 높이 67㎝로 작으나 북한 것은 219cm의 대종이다. 북한 것은 1469년에 처음 제작된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낙산사종, 봉선사종과 유사성을 보인다. 지금의 것은 1729년에 규모를 더 키워 제작된 것이나 초본에 충실했던 까닭에 특별한 변화를 거치지는 않은 듯하다. 범자(梵字) 문양과 복련 견대(肩帶), 보살입상 등의 조각 기법을 볼 때 유점사의 종은 낙산사종, 봉선사종을 제작한 장인이거나 문하 사람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6.25 이후 유점사 터의 흙더미속에 묻혀있던 것을 파내어 보현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보현사 경내의 유점사 종
    2005년 4월 5일 낙산사 산불로 사라진 낙산사 종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 종

     

    국립춘천박물관의 것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까지 범종 양식이 중국 영향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몸통 정상부의  용뉴(범종 위쪽에 있는 용 모습의 고리)에 5개의 발가락으로 여의주를 움켜쥔 쌍용의 모습의 조형했는데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아울러 몸통에 새긴 구름과 용 또한 기법이 뛰어나고 범자 문양도 어색함이 없어 상당히 우수한 장인에 의하여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이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된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국립춘천박물관 유점사 종
    종의 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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